이지 (조선 초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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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3일 (월) 23:13 판

이지(李漬)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생애

1402년(태종 2) 지평(持平)으로 재직 중 대사헌(大司憲) 이지(李至) 등과 함께 상소하여, 단 둘이서 상소[1]했던 내서사인(內書舍人) 이지직(李之直)과 좌정언(左正言) 전가식(田可植)에게 죄주기를 청했다.

이 때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했으나, 왕이 마음을 바꿔 상소를 받아들인 후 사표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간관(諫官)들끼리 탄핵하는 일이 일어나자, 이지(李至)는 면직되고, 이지(李漬), 좌사간(左司諫) 최긍(崔兢), 우사간(右司諫) 송인(宋因), 우헌납(右獻納) 이양명(李陽明),·좌정언 신개(申槪), 집의(執義) 윤창(尹彰), 지평 김천(金闡)은 파직되었다.

1409년(태종 9) 요동(遼東)의 명 군인들이 민가의 소와 말을 빼앗아 간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경력(經歷)으로서 명 사신 기보(祁保)에게 이를 고하고, 빼앗아 간 것을 돌려 달라고 청하여 허락받았다.

1411년(태종 11) 집의에 임명되었고, 1414년(태종 14) 양주부사(楊州府使)로 재직 중 철원부사(鐵原府使) 남금(南琴), 광주목사(廣州牧使) 황록(黃祿)과 함께 둔전(屯田)을 함부로 설치했다는 이유로 탄핵되기도 했으나, 왕이 이를 눈감았다.

같은 해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거쳐[2], 이후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옮겼으나, 1419년(세종 원년) 종부시(宗簿寺)에서 숙직하지 않았으므로 파직되었다.

1429년(세종 11) 해주목사(海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3], 이후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논란

그가 비슷한 시대에 살던 다른 인물인 조선의 개국공신 완산군(完山君) 이백유(李伯由)의 증손으로 이속(李粟)의 손자이며 이숙희(李叔僖)의 아들인 전주이씨 시중공파 이지(李漬)와 동일인인지, 우계이씨 이지(李漬)와 동일인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밖에 연안이씨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지낸 이지(李漬)인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각주

  1. 상소를 할 때는 최소 3명이 필요했다.
  2. 『태종실록』
  3. 『세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