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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퇴와 멸망 ===
=== 쇠퇴와 멸망 ===
[[파일:Empire of the Great Qing (orthographic projection).svg|thumb|200px|left|[[1896년]], 청 제국 강역도. 홍콩과 연해주, 외만주 지역, 중앙아시아의 이리지역, 카슈가르를 상실한 이후의 지도이다.]]
[[파일:Empire of the Great Qing (orthographic projection).svg|thumb|200px|left|[[1896년]], 청 제국 강역도. 홍콩과 외만주 지역, 중앙아시아의 이리지역, 카슈가르를 상실한 이후의 지도이다.]]
강희제 이후 [[옹정제]]·[[건륭제]]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대에 이은 청의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백련의 난|백련]], 천리의 난을 계기로 청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 건륭제 즉위 시기에 [[그레이트브리튼 연합 왕국]]은 1792년 [[매카트니]] 사절단을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 초중기에는 공행무역만이 실시되었다.
강희제 이후 [[옹정제]]·[[건륭제]]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대에 이은 청의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백련의 난|백련]], 천리의 난을 계기로 청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 건륭제 즉위 시기에 [[그레이트브리튼 연합 왕국]]은 1792년 [[매카트니]] 사절단을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 초중기에는 공행무역만이 실시되었다.



2019년 8월 8일 (목) 12:06 판

다이칭 구룬 / 대청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國
1618년~1924년
문장
국새
국가공금구
1765년, 청 제국의 최대 강역
1765년, 청 제국의 최대 강역
수도혁도아랍(1583~1587)
불아랍(1587~1603)
혁도아랍(1603~1619)
계범(1619~1620)
살이호(1620~1621)
요양(1621~1625)
성경(1625~1644)
북경(1644~1912) 북위 39° 55′ 동경 116° 23′  / 북위 39.917° 동경 116.383°  / 39.917; 116.383
정치
정치체제전제 군주제
황제천명제 (1618~ 1626)
강희제 (1661 ~ 1722)
옹정제 (1722 ~ 1735)
건륭제 (1735 ~ 1796)
선통제 (1908 ~ 1912)
역사
 • 여진국 성립
•대금 성립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황제 퇴위
•황실 해체
1616년
1618년
1636년
1644년
1911년
1912년
1924년
지리
면적13,150,000 km2
내수면 비율2.8%
인문
공용어만주어, 몽골어, 중국어, 티베트어
인구
1820년 어림383,100,000명
경제
통화위안 (1889년부터) ()
기타
현재 국가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홍콩의 기 홍콩
마카오 마카오
러시아의 기 러시아
아프가니스탄의 기 아프가니스탄
인도의 기 인도
부탄의 기 부탄
몽골의 기 몽골
파키스탄의 기 파키스탄
미얀마 미얀마
이전 국가
다음 국가
후금
명나라
중가르 칸국
겔룩파
북원
정씨왕국
중화민국 임시 정부 (1912년)
청나라 소조정
러시아 제국
복드 칸국
티베트 왕국
타이완 민주국
영국령 홍콩
인도 제국

대청국(大淸國,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Daicing Gurun, 1616년 2월 17일 또는 1618년 또는 1636년 6월 5일 ~ 1912년 2월 12일 또는 1924년 1월 5일)은 대청국(大淸國, 만주어: ᠠᠮᠪᠠ
ᠠᠴᡳᠩ
ᡤᡠᡵᡠᠨ
Amba Cing Gurun)[1],ᡩᠠᡳ대청제국(大淸帝國)[2] 청조(淸朝)[3]이라고도 한다. 1618년에, 여진(만주어: ᠵᡠᡧᡝᠨ
ᡤᡠᡵᡠᠨ
Jušen Gurun)의 영명한(英明汗, 만주어: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Genggiyen Han)이었던 누르가치가 건국한 대금(만주어: ᠠᠮᠪᠠ
ᠠᡳ᠌ᠰᡳᠨ
Amba Aisin)을 근간으로, 아들 태종 숭덕제는 대금에서 대청(만주어: ᡩᠠᡳᠴᡳᠩ Daicing)으로 국호를 바꾼 뒤, 중국 대륙을 대표적으로 지배하는 육상 제국이 됐다. 만주족이 통치한 제국이자, 중국사의 마지막 전제군주정이다.

1635년 10월 13일, 탄생한 만주족의 청 제국은 광대하였으며 융성했었다 또 인구도 증가하였다. 청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옹정제)이 통치했다.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유라시아 육상 제국을 이룩하였다. 중에서, 심지어 원나라보다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1683년부터 1830년까지는 그야말로 청 제국의 평화시대(팍스 시니카)였다.[4] 이민족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제8대 도광제부터 말대 선통제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1912년에 선통제가 퇴위하였고, 1924년에, 공식적으로 황실이 해체되어 육상 제국의 종말과 동시에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 넘게 이어졌던 봉건 왕조가 끝나게 된다.

역사

건국

1618년 총명하고 밝은 한(聰英明汗

만주어: ᠠᠪᡴᠠᡳ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Sure Genggiyen Han)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재위: 1583년~1626년)가 1115년 여진족완안부가 생여진을 통일하고 건국한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대금(만주어: ᠠᡳ᠌ᠰᡳᠨ Amba Aisin)으로 정하고, 천명(天命, 만주어: ᠠᠪᡴᠠᡳ
ᡶᡠᠯᡳᠩᡤᠠ
Abkai Fulingga)로 개원했고, 후계자 하늘의 총명한 한(天總汗, 만주어: ᠠᠪᡴᠠᡳ
ᠠᠪᡴᠠᡳ
ᡥᠠᠨ
Abkai Sure Han)은 1636년, 성경에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 만주어: Gosin Onco Hūwaliasun Enduringge Han)이 되어 국호를 대청(大淸,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Daicing)으로 고치고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숭덕제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 때 청의 팔기군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1644년)

청 제국의 산해관 통과전의 세력도와 강희제 시기의 청 제국 형세도.

청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와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髮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과 멸시를 받았는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이 학살 되었으며,[5][6] 물론 정사도 아니고 근거도 빈약하지만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청 제국은 전체적으로는 타 민족에 대해 정책을 훌륭히 펼친 제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7]

쇠퇴와 멸망

1896년, 청 제국 강역도. 홍콩과 외만주 지역, 중앙아시아의 이리지역, 카슈가르를 상실한 이후의 지도이다.

강희제 이후 옹정제·건륭제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대에 이은 청의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백련, 천리의 난을 계기로 청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 건륭제 즉위 시기에 그레이트브리튼 연합 왕국은 1792년 매카트니 사절단을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 초중기에는 공행무역만이 실시되었다.

19세기 무렵에 이러한 편무역으로 인해 중국으로의 은 유출 정도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을 실시했으나, 피해를 입은 청 제국에서 엄금론을 펼치며 임칙서를 무역항에 파견하고 아편을 소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1842년 난징 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할양되었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들이 쇄도해오면서 청 제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난국을 맞는다.

1851년 홍수전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 제국은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을 겪고 있었다. 이후, 청 제국은 휴전 중재역할을 맡은 러시아 제국에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외만주를 모모두 할양하고 베이징에 외국 공사관의 주재를 허용하였다. 서구열강세력들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었다. 태평천국 운동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 등의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파견한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증국번·이홍장 등 기술적 개혁의 필요성을 깨달은 한인 신사층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킴으로써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관독상판제와 표면적인 개혁이라는 점 등 뚜렷한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그 와중의 청일전쟁이 청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 운동이 실패했음이 드러났고, 청의 반복된 패전으로 인해 청 제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변법자강 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위안스카이·이홍장 등 보수세력의 반격(무술정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대규모로 일어난 의화단 운동으로 일본 등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을 겪고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며 청 제국은 위기에 내몰렸다. 한편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위협요소가 되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로 사건의 심각성을 자각한 보수파와 서태후조차 외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 등을 시찰하였으며, 국내적으로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신식 군대도 신설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결국 청 제국은 1911년 10월 10일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인해 와해되고, 혁명의 중심인물 쑨원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수립하였다. 청 황실은 자금성 내에서 청나라 소조정을 이루어 사실상 고립된 상태로 사직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1924년, 펑위샹의 정변으로 인해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외교

청나라 초, 정성공 등 청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다시 쇄국정책(海禁, 하이진)을 실시하였다. 마침내, 1683년 7월, 정성공의 손자 정극상이 투항하고 청 제국은 타이완 섬을 평정하였다. 1684년, 청나라 조정은 정식으로 바다를 열어, 백성들에게 대외무역을 허락하였다. [8] 또한, 월동(粵東)오문(澳門)(일설에는 광저우), 복건(福建)의 장주부(漳州府), 절강(浙江)의 영파부(寧波府), 강남(江南)의 운대산(雲台山)에 각각 월해관(粵海關), 민해관(閩海關), 절해관(浙海關), 강해관(江海關)을 설립하고 대외무역을 관리하고 관세를 징수하는 기관으로 삼았다. 강절민월 4대 해관은 각자 소재지 성(省)에 소속된 해관 항구를 다스렸으니, 통상적으로 10여개에서 수십개의 해관 항구를 직할로 두었다.[9]

국제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의 일부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중국은 1876년 10월 영국에 처음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새로운 중국 외교사를 썼다. 중국이 외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은 중국의 대외관계에 중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며, 중국이 근대 서양 국제법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한 의미를 지니는 변화였다. 이후 청조는 30년 동안 모두 18개 국가에 연인원 68명의 공사 또는 부사(副使)를 파견했고, 1877년부터는 57개 지역에 영사를 파견했다.[10]

경제

명 말에서 청 초에 이르는 시기에, 시장이 확대되고 상인들의 교역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에 가족 중심으로 이뤄지던 회사들이 합자(合資) 형식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청 초기에는 극장, 광산, 연안 및 해외 운송, 상업 작물, 전당업 등의 사업에 자금을 제공하는 합자회사들이 등장하였다.[11] 북경, 성도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인들이 모이는 회관(會館)들이 생겨났다. 회관은 숙박이나 창고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상인과 기술자들이 교역을 조정하는 기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명 말부터 등장한 이런 회관들은 18세기 무렵에는 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12]

외국 무역이 활발해져, 은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였다. 청은 18세기 초에 인두세(정은)를 따로 거두지 않고, 토지세(지은) 속에 포함시켜, 세금 제도를 단순화한 지정은제를 시행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선교사를 앞세운 서구열강이 교역을 원하자, 청나라는 교역항을 광저우로 한정하여 서양 상인들을 통제하고, '공행'이라는 특허 상인의 조합에 대외 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공행무역 등으로 서양 상인들의 무역량이 적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청나라의 차와 생사는 유럽에서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과 청의 무역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유럽의 상인들 중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해 가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에서 '무역 역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막대한 양의 은을 청에 지불하게 된 영국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청나라에게 무역 제한조치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19세기가 되자, 영국은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매년 급격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편 수출양이 증가하자, 청나라는 국내의 아편중독자가 늘어나는가 하면, 막대한 양의 은이 빠져나가게 된다. 이무렵 청나라는 '은본위제'를 실시했었는데,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무역'으로 인해 은의 급격한 감소로 국가체제의 위기를 맞게된다. 1830년대에는 은의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하고, 그 결과 은으로 세금 납부하던 농민들과 상인들은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났고, 결국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국가 재정이 곤란한 지경에 빠져 버린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외세 열강세력들의 침탈이 본격적으로 심화되면서 청나라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게 된다.

청나라때에는 양자강 중류 지역이 최대의 쌀 재배 지역이 되고, 감자, 양파, 땅콩, 옥수수 등의 외래작물이 재배되었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상품 작물 재배와 함께 면, 제지, 제당 등의 분야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였다.

문화

청 제국은 중원의 방대한 한족 지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중원에서 중국의 전통문화와 여러 제도를 답습하고, 한족의 협력을 얻어 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한족의 지식인층을 회유하여 관심을 정치와 사회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하여 대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강희 연간의 『강희자전(康煕字典)』, 옹정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건륭의 『사고전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반면에 반청적(反淸的)이라 판단한 사상에는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른바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인 고증학(考證學)은 이미 명대에 시작을 보았지만 청조의 사상 탄압은 한인 학자로 하여금 더욱더 고증학으로 나아가게 하여 정치 문제로부터 도피시켰다. 그러나 고증학은 그 자신 일종의 과학적 객관주의이며,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도 더해져 학문의 전분야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가령 실제의 측량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등은 이러한 학풍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청대에는 소설과 희곡의 발달이 한층 더 현저하여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 『요재지이(聊齊志異)』 등 걸작이 나왔고, 희곡도 풍성하게 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 외에 카스틸리오네에 의하여 서양의 화법(畵法)이 받아들여졌고, 건축은 원명원(圓明園)과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도 비길 만한 훌륭한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의복의 큰 특징은 단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속은 바지이고 옆으로 트어져 있는 형식인데 이때 전족이 몸에 나쁨에도 불구하고, 귀족은 물론 서민까지 퍼져있었다.

종교

기독교

경교와 천주교

중국에서는 일찍이 당나라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京敎)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대진사라는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명나라때부터 마테오 리치 신부(1552년-1610년)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교하면서 겪었던 어려움 중 하나는 조상제사문제였다. 조상제사문제는 1704년 조상제사에 반대하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조상제사를 중국인전통으로 존중하는 예수회간의 신학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결국 교황청에서 조상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여 금지함에 따라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13] 천주교 선교사들은 유럽에 중국 문화를 소개하여 유럽 지식인들의 중국연구열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중국인들과 똑같은 을 입는 등 중국전통문화를 존중하였다.

개신교

개신교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세기 독일에서 태동한 모라비안 교인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국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일러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사람들과 똑같은 을 입음으로써 중국인들에게 다가섰는데,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영어: China Inland Mission,CIM)를 결성하여 1898년 중국 후난성을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여 1951년에 철수할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1964년 OMF(영어: Overseas Missonary Fellowship)으로 선교회의 이름을 바꾸었다.[14]

청나라의 중앙 관제

중앙 정치 제도

청나라명나라의 정치제도와 관료제도를 팔기군과 만한병용을 제외하고는 동일하게 사용했다.

행정구역

가경 25년(1820년) 시기, 청나라의 행정구분도.
광서 34년(1908년) 시기, 청나라의 행정구분도.

청나라 초기 행정구역은 18개의 성(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 성은 7~13개의 부(府)로 나뉘었고, 각 부는 다시 7~8개의 현(縣) 또는 주(州)로 분류되었다.

건륭제 말기인 18세기 말 청나라에는 1,281개의 현과 221개의 주가 있었다.[15]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은 성-부-주-현-청 (省-府-州-縣-廳)이었고, 성에는 민정과 감찰을 위해 포정사(布政使) ·안찰사(按察使)가 있었다. 또한, 1-2개 성에 총독 1명이, 1개 성에 순무 1명이 있었다. 그리고 각 성에는 장관급에 해당하는 제독 (군사), 총원 (교육), 학정사 (?), 도원이 있었다. 그리고 부 ·주 ·현에는 지부(知府) ·지주(知州) ·지현(知縣)이 수장이었다.

같이 보기

각주

  1. 《taidzu dergi hvwangdi i ben gi bithe》dergi debtelin, amba cing gurun i ben gi bithe. taizdu abkai hese be alifi. forgon be mukdembuhe.
  2. , 《고종실록》 39권, 광무 3년 9월 11일 양력 4번째기사, 光緖二十五年八月初七日。 大淸帝國欽差議約全權大臣二品銜太僕寺卿徐壽朋。
  3. 효종실록》 8권, 순치 9년 3월 30일 신축 2번째기사, 遽遭李子成之亂, 且綠淸朝侵伐南京, 弘光天子被害, 天下洶擾, 小商等不敢回歸, 轉投交趾, 行商爲業, 今至七年。 竊聞, 淸朝, 愛民如子, 故將還本土, 正月二十二日自日本發船, 二月初九日到貴國地方, 遇風船敗, 同伴二百十三人皆溺死, 存者僅二十八人。 懇祈老爺, 大發慈悲, 直送小商等于日本, 則庶可得生也。 若送北京, 道路逾遠, 二三年當到本土, 而其全生得達, 不可必也。 自此距日本, 纔數日程, 自日本距南京, 亦數月程, 父母、妻子重得相逢, 恩莫大焉。 伏乞稟于國王殿下, 施行云云。" 卓男悉記所見, 且將供辭, 報于濟州牧使李元鎭, 元鎭馳狀以聞。 
  4. 조르주 뒤비 (2006). 《지도로 보는 세계사》. 채인택 옮김. 생각의 나무. 228쪽. ISBN 89-8498-618-6.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5. 杜文凱 (1985년 6월). 《《淸代西人见闻录》》. 中國人民大學出版社(중국인민대학출판사). 53页(페이지)쪽. 
  6. 司徒琳 著 (1992년 12월). 《李榮慶等譯《南明史》》. 上海古籍出版社(상하이고적출판사). 131页(페이지)쪽. 
  7. 《明熹宗賣錄 卷4》. 明代中國人口,最後的全國官方統計,爲5,165.5459人,時間爲明光宗泰昌元年。 
  8. 《淸聖祖實錄》卷一一七,第10頁
  9. 劉軍《財經問題硏究》(大連)2012年11期 第21-30頁
  10.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4쪽. ISBN 978-89-91965-12-6. 국제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의 일부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중국은 1876년 10월 영국에 처음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새로운 중국 외교사를 썼다. 중국이 외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은 중국의 대외관계에 중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며, 중국이 근대 서양 국제법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한 의미를 지니는 변화였다. 이후 청조는 30년 동안 모두 18개 국가에 연인원 68명의 공사 또는 부사(副使)를 파견했고, 1877년부터는 57개 지역에 영사를 파견했다.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11. 나퀸 (1998), 83쪽
  12. 나퀸 (1998), 84-85쪽
  13. 《5시간만에 읽는 교회사》/유현덕 지음/작은 행복 p.181
  14. 한국 OMF홈페이지에 올라온 OMF역사 설명문
  15. 나퀸 (1998), 31쪽

참고 자료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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