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덕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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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타이지는 후금의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 하기 위하여 [[조선]] 연해의 가도(樓島)에 근거지를 두고 배후를 위협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하였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ref> 이때 홍 타이지는 조선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대명전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희생(犧牲)과 맹서(盟誓) 그리고 저주(詛呪)라는 형식을 수반하는 맹약을 강요하여 체결하였고, 이 맹약을 통해 후금은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의 대외관계를 상당히 제한했다.<ref>남호현, 《朝淸關係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盟約’의 역할》, 조선시대사학회</ref> 홍 타이지는 정묘호란을 통해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여 조선을 항복시켰다고 선언했다.<ref>{{서적 인용|저자=[[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문노당역주회|제목=만문노당역저: 태종|날짜=2017년 9월 30일|쪽=99~103}}</ref>
홍 타이지는 후금의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 하기 위하여 [[조선]] 연해의 가도(樓島)에 근거지를 두고 배후를 위협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하였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ref> 이때 홍 타이지는 조선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대명전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희생(犧牲)과 맹서(盟誓) 그리고 저주(詛呪)라는 형식을 수반하는 맹약을 강요하여 체결하였고, 이 맹약을 통해 후금은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의 대외관계를 상당히 제한했다.<ref>남호현, 《朝淸關係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盟約’의 역할》, 조선시대사학회</ref> 홍 타이지는 정묘호란을 통해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여 조선을 항복시켰다고 선언했다.<ref>{{서적 인용|저자=[[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문노당역주회|제목=만문노당역저: 태종|날짜=2017년 9월 30일|쪽=99~103}}</ref>


1629년 홍 타이지는 문서처리 기구인 서방(書房,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ᠪᡳᡨᡥᡝᡳ<br />ᠪᠣᠣ}}|Bithei Boo}}) 설립했고 이 기구에 많은 [[한족]] 관료를 기용했다. 1631년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제도인 육부(六部,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ᠨᡳᠩᡤᡠᠨ<br />ᠵᡠᡵᡤᠠᠨ}}|Ninggun Jurgan}})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기구를 완비했다.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육부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해 나갔다. 육부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ᠪᠠᡨᠠᡳ}}|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ref name="Lee>{{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7~168}}</ref>
1629년 12월부터 홍 타이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명나라]]의 영역을 침략했다. 청군은 [[요서]]를 지나치고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홍산구(洪山口)로 진격했다.<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戊寅。上督大軍入邊。攻克洪山口城。駐師城內。擢洪山口人方遇清為備禦。給與敕命。令守洪山口。招集流亡。盡心供職。俟後有功。不次擢用。又有明千總一員。把總一員。遁匿山中。聞城克。率百人擐甲執械來降。上嘉之。擢千總為備禦。把總為千總}}</ref> 3개월 뒤 홍 타이지는 묵던에 있던 아민과 쇼토를 불러 영평(永平)과 천안(遷安) 등의 네 개의 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명군의 반격에 아민을 비롯한 야전 지휘관들은 거주민들을 관대하게 다루라는 홍 타이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천안과 영평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회군해버렸다. 이 사건은 청의 대민관계에 악영향을 미쳤고, 명 변방의 백성들을 회유하려던 홍 타이지의 노력에 큰 흠집을 냈다. 이에 홍 타이지는 죄를 범한 이들을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처벌했다.<ref name="Rowe">{{서적 인용|저자=William T. Rowe|title=China's Last Empire: The Great Qing|series=History of Imperial China|publisher=An Imprint of Harvard University Press|isbn=978-0674066243}}</ref><ref>{{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5}}</ref>


그해 12월부터 홍 타이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명나라]] 침략했다. 청군은 [[요서]]를 지나치고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홍산구(洪山口)로 진격했다.<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戊寅。上督大軍入邊。攻克洪山口城。駐師城內。擢洪山口人方遇清為備禦。給與敕命。令守洪山口。招集流亡。盡心供職。俟後有功。不次擢用。又有明千總一員。把總一員。遁匿山中。聞城克。率百人擐甲執械來降。上嘉之。擢千總為備禦。把總為千總}}</ref> 3개월 뒤 홍 타이지는 묵던에 있던 아민과 쇼토를 불러 영평(永平)과 천안(遷安) 등의 네 개의 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명군의 반격에 아민을 비롯한 야전 지휘관들은 거주민들을 관대하게 다루라는 홍 타이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천안과 영평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회군해버렸다. 이 사건은 청의 대민관계에 악영향을 미쳤고, 명 변방의 백성들을 회유하려던 홍 타이지의 노력에 큰 흠집을 냈다. 이에 홍 타이지는 죄를 범한 이들을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처벌했다.<ref name="Rowe">{{서적 인용|저자=William T. Rowe|title=China's Last Empire: The Great Qing|series=History of Imperial China|publisher=An Imprint of Harvard University Press|isbn=978-0674066243}}</ref><ref>{{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5}}</ref>
3년 후인 1631년, 홍 타이지는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를 포위했다. 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성을 공격했다. 몇 주간의 전투, 협상, 그리고 지방 지휘관들의 갑작스런 변절 후에 대릉하성은 후금에 함락됐다. 이것은 점차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ref>{{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4~224}}</ref>


1630년 [[의정왕대신회의]]는 아민이 명령을 거역하고,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이 적과 대치하지 않고, 많은 병력을 잃은 죄를 비롯한 16개 죄목으로 그를 사형시킬 것을 규탄했고, 홍 타이지는 이를 감형하여 그를 유폐시켰다. 이로써 홍 타이지는 양람기를 보유한 아민을 숙청하는데 성공했고,<ref name="Wakeman"/> 이듬해 9월 19일 대릉하성 전투의 선봉에 선 탓에 병력 손실을 본 망월타이가 정람기로의 인원 보충 요구를 거부당하자 홍 차이지에게 칼을 뽑아들자,<ref>{{서적 인용|제목=[[만문로당]]|연도=1778|인용문=han hendume. tuttu oci minde alaha niyalma holtohobi kai. muse mektefi fonjiki. alaha niyalma holtoci. holtoho niyalma be waki. alaha niyalma inu oci. yabuhakū niyalma be waki seme. dere fularafi jili banjime hendufi morilaha. tere gisun de manggūltai beile hendume. han serengge. siden be hendumbi dere. mimbe canggi ainu bakcin arafi gisurembi. han seme eitereme haldabaxame banjici ojorakū oci. mimbe ainci waki sembidere seme hendume. loho be julesi obufi fesin be jafame seferdere de. ini emu eme de banjiha deo degelei taiji. sini arbušara mudan waha kai seme šukilara jakade. eteretele genehe. tede beile jili banjifi.}}</ref> 의정왕대신회의가 소집되었으며 홍 타이지는 망굴타이를 일반 버이러로 강등하고, 정람기의 권력을 삭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ref>《大淸太宗文皇帝實錄》 卷10, p.8</ref>
같은 해에 홍 타이지는 아민과 망굴타이를 제거하고 다이샨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체계적으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홍 타이지에게 필요한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중국식 정치 방식이었다.


1632년 1월 무렵 홍 타이지는 예부의 참정 이백용(李伯龍)의 건의를 받아들여<ref name="Taizung">{{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丙申 上以元旦朝賀屆期諭八旗諸貝勒大臣曰禮部參政李伯龍疏奏我國朝賀行禮時不辨官職大小常有隨意排列踰越班次者應請酌定儀制等語此言誠是今元旦朝賀。應令八旗諸貝勒獨列一班行禮。外國來歸蒙古諸貝勒大臣次之八旗文武官員次之。各照旗序行禮至貝勒莽古爾泰因其悖逆。定議治罪革大貝勒稱號。自朕即位以來。國中行禮時曾與朕竝坐。今不與坐。恐他國聞之。不知彼過。反疑前後互異。彼年長於朕。可否仍令竝坐。著巴克什達海庫爾纏覺羅龍什索尼與大貝勒代善及諸貝勒會議具奏尋會議時諸貝勒執不可竝坐者半代善曰上諭誠是彼之過不足介懷即仍令竝坐亦可頃之又曰我等既戴皇上為君又與上竝坐恐滋國人之議謂我等奉上居大位又與上竝列而坐甚非禮也禮本人情人心所安。即天心所佑。各遵禮而行自求多福斯神佑之矣自今以後上南面中坐以昭至尊之體我與莽古爾泰侍坐上側外國蒙古諸貝勒坐於我等之下如此方為允協諸貝勒皆曰善於是以其議奏聞上從之}}</ref>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하고 다이샨과 홍 타이지가 나란히 않는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고, 다이샨으로 부터 이 자리에서 자신이 홍 타이지의 신하이며, 망굴타이와 함께 지존인 그를 보좌할 것이라는 발언을 받아냄으로써 자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다.<ref name="Taizung"/>
홍 타이지는 1629년에 문서처리 기구인 비트허이 보오(書房,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ᠪᡳᡨᡥᡝᡳ<br />ᠪᠣᠣ}}|Bithei Boo}}) 설립했고 이 기구에 [[한족]] 관료를 상당수 기용했다. 1631년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제도인 닝군 주르간(六部,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ᠨᡳᠩᡤᡠᠨ<br />ᠵᡠᡵᡤᠠᠨ}}|Ninggun Jurgan}})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기구를 완비했다.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닝군 주르간은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했다. 닝군 주르간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阿巴泰,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ᠪᠠᡨᠠᡳ}}|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7~168}}</ref>

홍 타이지는 1631년 9월 초를 전후로, 외번 몽골군과 만주군을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 인근에 집결시켰다. 대릉하성의 병력이 보병 7천, 마병 7천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是日。於大凌河城南。獲一漢人。訊之。言明修築大凌河城。已經半月。城牆已完。雉堞完其半。有總兵祖大壽及副將八員。參遊約二十員。馬兵七千。步兵七千。夫役商賈。約萬餘人在焉。於是大軍遂以是夜進圍其城}}</ref>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대릉하성을 공격했고,<ref name="Wakeman"/> 11월 21일 대릉하성은 식량이 고갈되어 많은 아사자를 내고 항복했다.<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戊辰。大凌河城內各官皆與祖大壽同謀歸降。獨副將何可剛不從。大壽執之令二人掖出城外於我諸將前殺之可剛顏色不變不出一言含笑而死城內饑人爭取其肉大壽遂遣副將四員遊擊二員來誓 上與諸貝勒對 天誓曰明總兵官祖大壽、副將劉天祿、張存仁、祖澤潤、祖澤洪祖可法、曹恭誠、韓大勳、孫定遼、裴國珍、陳邦選李雲鄧長春劉毓英竇承武。參將遊擊吳良輔高光輝劉士英盛忠祖澤遠胡弘先祖克勇祖邦武施大勇夏得勝李一忠劉良臣張可範、蕭永祚韓棟段學孔張廉吳奉成方一元塗應乾陳變武方獻可劉武元楊名世等今率大凌河城內官員兵民歸降。凡此歸降將士。如誑誘誅戮。及得其戶口之後。復離析其妻子。分散其財物牲畜。天地降譴奪吾紀算若歸降將士懷欺挾詐。或逃或叛。有異心者。天地亦降之譴。奪其紀算。顯罹國法如遵守此盟 天地垂佑。壽命延長。世澤久遠安享太平大壽等誓曰祖大壽等率眾築城。遇滿洲國兵。圍困三月。軍餉已盡。率眾出降傾心歸汗。毫無猜疑歸順以後官軍人民家口俱獲保全。若大壽等違心背盟天地鑒之。殃及其身。死於刀箭之下。儻汗以計詐害。亦惟汗自知之。誓畢。上遣巴克什庫爾纏覺羅龍什。詣大壽諭曰既經盟誓天地。當用何策以取錦州其急言之。大壽曰我即親至御前。商議此事。庫爾纏、龍什、回奏上復遣諭曰。盟誓雖申。民心未定。今晚且勿來。期以詰朝相見大壽曰。事已定。更何猜疑。我即至御前。議取錦州之策。庫爾纏、龍什、還奏上遂令之來命諸貝勒出迎於一里外。諸貝勒行抱見禮大壽曰。諸貝勒來迎。何以克當。諸貝勒曰。將軍親至。豈有不迎之理。一鼓盡時。方至御營。上出幄。列炬以俟。大壽欲跪見。上止之。行抱見禮。令大壽先入幄。大壽謝不敢。遂竝入。命坐於上左。設饌宴之。以金巵酌酒。親賜大壽。大壽辭。候上先上先讓大貝勒代善飲次上飲。次命大壽飲。大壽曰。我所攜之物。日久已罄。願借汗酒。奉獻御前。於是酌酒跪進。上飲畢。上以御服黑狐帽、貂裘、及金玲瓏鞓帶、緞鞾、雕鞍白馬、賜大壽曰。初來歸我。宜拜天地。以禮相見。因暮夜。不能成禮且在戎行。攜物無多。不能以嘉物相贈也。大壽奏曰蒙上優待若此夫復何言我雖至愚豈木石等耶遂定取錦州之策大壽辭入城上送出俟大壽行方入幄}}</ref> 대릉하성 전투의 경제적 효과가 미미했지만,<ref>{{서적 인용|저자=谷井陽子|제목=八旗制度の研究|출판사=京都大學學術出版會|연도=2015|쪽=223}}</ref> 점차 새롭게 흥기하던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ref name="Wakeman">{{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4~224}}</ref>


1635년은 후금의 발전이 또 하나의 분수령을 맞은 해였다. 한해 전에 홍 타이지와 상쟁하던 [[차하르]]의 수장이자 몽골의 카간인 [[링단 칸|릭단 칸]]이 사망한 후, 이 해에 릭덴 카안의 아들 [[에제이]]가 후금에 투항에 온 것이었다. 이로써 후금의 직접 통치하에 들게 된 몽골인의 수가 대폭 증가했고, 후금 통치하에 여진인과 한인 수가 비슷해지자, 삼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이 필요하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의 핵심 종족인 [[여진족|주션]]({{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ᠵᡠᡧᡝᠨ}}|Jušen}})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1~152}}</ref>
1635년은 후금의 발전이 또 하나의 분수령을 맞은 해였다. 한해 전에 홍 타이지와 상쟁하던 [[차하르]]의 수장이자 몽골의 카간인 [[링단 칸|릭단 칸]]이 사망한 후, 이 해에 릭덴 카안의 아들 [[에제이]]가 후금에 투항에 온 것이었다. 이로써 후금의 직접 통치하에 들게 된 몽골인의 수가 대폭 증가했고, 후금 통치하에 여진인과 한인 수가 비슷해지자, 삼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이 필요하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의 핵심 종족인 [[여진족|주션]]({{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ᠵᡠᡧᡝᠨ}}|Jušen}})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1~152}}</ref>

2019년 7월 30일 (화) 14:06 판

숭덕제
崇德帝
대청국 황제
재위 1636년 5월 15일-1643년 9월 21일
전임 본인 (후금국 천총한)
후임 순치제
몽골 카간
재위 1635년-1643년 9월 21일
전임 에제이 칸
후임 아이비어 자사크 칸
재위 1626년 10월 20일-1636년 5월 15일
전임 천명한
후임 본인 (숭덕제)
이름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ᠣᠩ
ᡨᠠᡳᠵᡳ
)
묘호 태종(太宗, 만주어: ᡨᠠᡳᡯᡠᠩ Taidzung)
시호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 弘德彰武 寬溫仁聖 睿孝敬敏 昭定隆道 顯功 文皇帝)
연호 천총(天聰, 만주어: ᠠᠪᡴᠠᡳ
ᠰᡠᡵᡝ
Abka-i Sure)
숭덕(崇德, 만주어: ᠸᡝᠰᡳᡥᡠᠨ
ᡝᡵᡩᡝᠮᡠᠩᡤᡝ
Wesihun Erdemungge, 몽골어: ᠪᠣᠭᠳᠠ
ᠰᠡᠴᠡᠨ
데게렌 에르뎀트)
신상정보
출생일 1592년 11월 28일(1592-11-28)
사망일 1643년 9월 21일(1643-09-21)(50세)
왕조 청 제국
가문 아이신 교로 하라
부친 누르가치
모친 몽고저저
배우자
자녀 본문 참조

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후금의 제2대 한이자, 청 제국의 창업 군주이다.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ᡥᠣᠩ
ᡨᠠᡳᠵᡳ
Aisin Gioro Hong Taiji). 묘호태종(太宗, 만주어: ᡨᠠᡳ‍ᡯᡠᠩ Taidzung)이다. 후금 연호는 천총(天聰, 만주어: ᠠᠪᡴᠠᡳ
ᠰᡠᠷᡝ
Abkai Sure, 몽골어: ᠲᠩᠷᠢ ᠶᠢᠨ
ᠰᠡᠴᠡ
Tengri-yin Seče)이고, 청 제국 연호는 숭덕(崇德, 만주어: ᠸᡝᠰᠢᡥᡠᠨ
ᠡᠷᡩᡝᠮᡠᠩᡬᡝ
Wesihun Erdemungge, 몽골어: ᠳᠡᠭᠡᠳᠦ
ᠡᠷᠳᠡᠮᠳᠡᠢ
Degedü Erdemtü)이다. 시호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줄여서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만주어: ᡨᠠᡳᡯᡠᠩ
ᡤᡝᠩᡤᡳᠶᡝᠨ
ᡧᡠ
ᡥᡡᠸᠠᠩᡩᡳ
Taidzung Genggiyen Šu Hūwangdi), 별호로는 태종한조종(太宗汗祖宗, 만주어: ᡨᠠᡳᡯᡠᠩ
ᡥᠠᠨ
ᠮᠠᡶᠠ
Taidzung Han Mafa)이 있다.[1][2] 생전 존호매우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신성한 군주(弘德彰武皇帝, 만주어: ᡤᠣᠰᡳᠨ
ᠣᠨ᠋ᠴ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몽골어: ᠠᠭᠤᠳ‍ᠠ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Aγuda Örüsiyegči Nayiramdaγu Boγda Qa'an)이다.

이름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관행은 홍타이지지만 원래는 홍 타이지라고 표기해야 한다.[3]

홍 타이지의 이름은 한문 사료에서 여러 표기로 등장하는데 황태극(皇太極)[4], 홍대시(紅歹是)[5], 홍대시(洪大時)[6], 홍태극(洪太極)[7], 홍태주(洪太主)[8], 홍태시(洪佗始)[9], 홍태시(洪台時)[10], 홍타실(洪他失)[11] 등이 있다.

사실 그의 진짜 정확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12] 현대학자들은 홍 타이지가 본명이 아니라 칭호라고 많이 여기는데, 몽골 귀족의 칭호인 콩타이지(渾台吉, 몽골어: ᠬᠤᠩ
ᠲᠠᠶᠢᠵᠢ
Qong Tayiji)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13][14] 러시아의 한 학자인 G.V. 고르스키는 홍 타이지의 본명을 아바하이(Abakhai)라 주장하여 한때 서구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 한문만주 문자로 서술된 문헌에 등장하지 않아 오류로 여겨진다.[15] 명대 진인석(陳仁錫)의 《산해기문(山海紀聞)》에는 홍 타이지를 갈간(중국어 정체자: 喝竿, 병음: Hēgān)이라 하였고[16], 조선의 《인조실록》에는 명 장수 서고신(徐孤臣)의 말을 인용하면서 홍 타이지를 흑환발렬(黑還勃烈)이라고 기록했다. 일본의 한 학자 미타무라 타이스케(三田村泰助)는 흑환(黑還)을 홍 타이지의 본명, 발렬(勃烈)을 만주어 버이러를 음차한 것으로 해석하여 홍 타이지의 실제 이름을 허칸(Hekan)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17]

생애

생애 초반

1592년 11월 28일, 홍 타이지는 누르가치의 측복진이었던 예허나라 몽고저저의 소생으로, 누르가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누르가치의 차남 다이샨, 누르가치의 아우인 슈르하치의 차남 아민(阿敏, (만주어: ᠠᠮᡳᠨ Amin), 누르가치의 5남 망굴타이(莽古爾泰, (만주어: ᠮᠠᠩᡤᡡᠯᡨᠠᡳ Manggūltai) 등과 함께 사대왕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치세

후금의 한

《만주실록(滿洲實錄, 만주어: ᠮᠠᠨᠵᡠ ᡳ
ᠶᠠᡵᡤᡳᠶᠠᠨ
ᡴᠣᡠᠯᡳ
Manju-i Yargiyan Kooli)》에 수록된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한 조선군의 항복을 받고 있는 네 버이러를 묘사한 《강공립솔병귀향도(姜功立率兵歸降圖, 만주어: ᠰᠣᠯᡥᠣ ᡳ
ᡩᡠ
ᠶᡠᠸᠠᠨᡧᡠᠸᠠᡳ
ᡤᡳᠶᠠᠩ
ᡤᡠᠩ
ᠯᡳᠶᡝᡳ
ᠴᠣᠣᡥᠠ
ᡤᠠᡳᡶᡳ
ᡩᠠᡥᠠᡥᠠ
Solho-i du yuwanšuwai giyang gung liyei cooha gaifi dahaha)》

1622년 4월 13일, 누르가치는 자신의 일곱 아들과 친동생 슈르가치의 아들 아민을 부른 자리에서 자신의 후계자믄 힘센 자나 강한 자는 안 되고, 팔기의 기주 여덟 명을 여덟 왕으로 삼게 하고, 여덟 왕이 논의하여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한으로 추대하고, 만약 한이 여덟 왕의 의견을 묵살하고 폭정을 일삼는다면 한을 교체하고, 만약 한이 교체 의견을 거부한다면 폐위할 것을 당부했다.[18]

1626년 9월 30일에, 누르가치가 병사하자, 요토가 그 동생 사하랸과 함께 다이샨에게 홍 타이지를 받들어 한의 지위를 이어받게 할 것을 청하자, 다이샨이 여러 버이러에게 홍 타이지를 강력하게 지지할 것을 선언했다.[19]

누르가치에 이어 새로운 한으로 즉위한 홍 타이지는 암바 버이러 다이샨, 아민 버이러, 망굴타이 버이러 세 버이러를 형으로 대우하며 한의 양측에 앉게 했고, 어느 곳이든지 항상 한과 나란히 앉게하고 아래에 앉도록 하지 않았다.[20]

홍 타이지는 후금의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 하기 위하여 조선 연해의 가도(樓島)에 근거지를 두고 배후를 위협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하였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21] 이때 홍 타이지는 조선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대명전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희생(犧牲)과 맹서(盟誓) 그리고 저주(詛呪)라는 형식을 수반하는 맹약을 강요하여 체결하였고, 이 맹약을 통해 후금은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의 대외관계를 상당히 제한했다.[22] 홍 타이지는 정묘호란을 통해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여 조선을 항복시켰다고 선언했다.[23]

1629년 홍 타이지는 문서처리 기구인 서방(書房, 만주어: ᠪᡳᡨᡥᡝᡳ
ᠪᠣᠣ
Bithei Boo)을 설립했고 이 기구에 많은 한족 관료를 기용했다. 1631년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제도인 육부(六部, 만주어: ᠨᡳᠩᡤᡠᠨ
ᠵᡠᡵᡤᠠᠨ
Ninggun Jurgan)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기구를 완비했다.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육부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해 나갔다. 육부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만주어: ᠠᠪᠠᡨᠠᡳ 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24]

그해 12월부터 홍 타이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명나라를 침략했다. 청군은 요서를 지나치고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홍산구(洪山口)로 진격했다.[25] 3개월 뒤 홍 타이지는 묵던에 있던 아민과 쇼토를 불러 영평(永平)과 천안(遷安) 등의 네 개의 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명군의 반격에 아민을 비롯한 야전 지휘관들은 거주민들을 관대하게 다루라는 홍 타이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천안과 영평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회군해버렸다. 이 사건은 청의 대민관계에 악영향을 미쳤고, 명 변방의 백성들을 회유하려던 홍 타이지의 노력에 큰 흠집을 냈다. 이에 홍 타이지는 죄를 범한 이들을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처벌했다.[26][27]

1630년 의정왕대신회의는 아민이 명령을 거역하고,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이 적과 대치하지 않고, 많은 병력을 잃은 죄를 비롯한 16개 죄목으로 그를 사형시킬 것을 규탄했고, 홍 타이지는 이를 감형하여 그를 유폐시켰다. 이로써 홍 타이지는 양람기를 보유한 아민을 숙청하는데 성공했고,[28] 이듬해 9월 19일 대릉하성 전투의 선봉에 선 탓에 병력 손실을 본 망월타이가 정람기로의 인원 보충 요구를 거부당하자 홍 차이지에게 칼을 뽑아들자,[29] 의정왕대신회의가 소집되었으며 홍 타이지는 망굴타이를 일반 버이러로 강등하고, 정람기의 권력을 삭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30]

1632년 1월 무렵 홍 타이지는 예부의 참정 이백용(李伯龍)의 건의를 받아들여[31]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하고 다이샨과 홍 타이지가 나란히 않는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고, 다이샨으로 부터 이 자리에서 자신이 홍 타이지의 신하이며, 망굴타이와 함께 지존인 그를 보좌할 것이라는 발언을 받아냄으로써 자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다.[31]

홍 타이지는 1631년 9월 초를 전후로, 외번 몽골군과 만주군을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 인근에 집결시켰다. 대릉하성의 병력이 보병 7천, 마병 7천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32]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대릉하성을 공격했고,[28] 11월 21일 대릉하성은 식량이 고갈되어 많은 아사자를 내고 항복했다.[33] 대릉하성 전투의 경제적 효과가 미미했지만,[34] 점차 새롭게 흥기하던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28]

1635년은 후금의 발전이 또 하나의 분수령을 맞은 해였다. 한해 전에 홍 타이지와 상쟁하던 차하르의 수장이자 몽골의 카간인 릭단 칸이 사망한 후, 이 해에 릭덴 카안의 아들 에제이가 후금에 투항에 온 것이었다. 이로써 후금의 직접 통치하에 들게 된 몽골인의 수가 대폭 증가했고, 후금 통치하에 여진인과 한인 수가 비슷해지자, 삼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이 필요하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의 핵심 종족인 주션(만주어: ᠵᡠᡧᡝᠨ Jušen)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35]

또한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 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손에 넣은 천총한은 이제 몽골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군주를 자처할 수 있었다.[36]

1635년 11월 22일,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하고 '만주'를 공식적이고 유일한 족명으로 선포했다.

원문

만주어:

ᡨᡝᡵᡝ ᡳᠨᡝᠩᡤᡳ᠈ ᡥᠠᠨ ᡥᡝᠨᡩᡠᠮᡝ᠈ ᠮᡠᠰᡝᡳ ᡤᡠᡵᡠᠨ ᡳ ᡤᡝᠪᡠ ᡩᠠᠴᡳ ᠮᠠᠨᠵᡠ᠈ ᡥᠠᡩᠠ᠈ ᡠᠯᠠ᠈ ᠶᡝᡥᡝ᠈ ᡥᠣᡳᡶᠠ ᡴᠠᡳ᠈ ᡨᡝᡵᡝ ᠪᡝ ᡠᠯᡥᡳᡵᠠᡴᡡ ᠨᡳᠶᠠᠯᠮᠠ ᠵᡠᡧᡝᠨ ᠰᡝᠮᠪᡳ᠈ ᠵᡠᡧᡝᠨ ᠰᡝᡵᡝᠩᡤᡝ ᠰᡳᠪᡝᡳ ᠴᠣᠣ ᠮᡝᡵᡤᡝᠨ ᡳ ᡥᡡᠨᠴᡳᡥᡳᠨ ᡴᠠᡳ᠈ ᡨᡝᡵᡝ ᠮᡠᠰᡝ ᡩᡝ ᠠᡳ ᡩᠠᠯᠵᡳ᠈ ᡝᡵᡝᠴᡳ ᠵᡠᠯᡝᠰᡳ ᠶᠠᠶᠠ ᠨᡳᠶᠠᠯᠮᠠ ᠮᡠᠰᡝ ᡤᡠᡵᡠᠨ ᡳ ᡩᠠ ᠮᠠᠨᠵᡠ ᠰᡝᡵᡝ ᡤᡝᠪᡠ ᠪᡝ ᡥᡡᠯᠠ᠈ ᠵᡠᡧᡝᠨ ᠰᡝᠮᡝ ᡥᡡᠯᠠᡥᠠ ᡩᡝ ᠸᡝᡳᠯᡝ᠈

tere inenggi. han hendume. musei gurun-i gebu daci manju. hada. ula. yehe. hoifa kai. tere-be ulhirakū niyalma jušen sembi. jušen serengge sibei coo mergen-i hūncihin kai. tere muse-de ai dalji. ereci julesi yaya niyalma muse gurun-i da manju sere gebu-be hūla. jušen seme hūlaha-de weile.

— 만문원당(滿文原檔)
해석

이 날에 한이 말하길, "우리의 나라의 이름은 본래 만주,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이니라.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이 주션이라 한다. 주션이라는 것은 시버의 초오 머르건의 후예이니라. 그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로부터 앞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 나라의 본래 이름인 만주라고 부르라. 주션이라고 부르면 죄이다."

즉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 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족을 새로운 명칭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37]

청 제국의 군주

평복차림의 숭덕제

1636년 홍 타이지는 팔기는 물론 내몽골 왕공 및 한족 무장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식을 올리고 칭기스 칸으로부터 이어져 온 몽골 제국의 전통을 완전히 복원·계승하였음을 보이는 것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시각으로, 옛 몽골 제국의 동쪽 절반을 청이 지배하는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스스로 세 언어로 된 칭호인 매우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신성한 군주(弘德彰武皇帝, 만주어: ᡤᠣᠰᡳᠨ
ᠣᠨ᠋ᠴ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몽골어: ᠠᠭᠤᠳ‍ᠠ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Aγuda Örüsiyegči Nayiramdaγu Boγda Qaγan)를 칭하였으며,[38][39] 국호를 기존의 아이신 구룬(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Aisin Gurun)에서 다이칭 구룬(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Daicing Gurun)으로 개칭하고, 만주인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골인의 카안이 됐다. 이는 곧 만주족이 한인, 몽골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종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40] 사강 세첸의 《몽골원류》는 누르가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숭덕제가 정권(몽골어: ᠲᠥᠷᠥ Törö)을 장악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인들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41]

같은 해, 홍 타이지는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감찰 기관인 도찰원(都察院, 만주어: ᡠᡥᡝᡵᡳ
ᠪᡝ
ᠪᠠᡳᠴᠠᡵᠠ
ᠶᠠᠮᡠᠨ
Uheri-be Baicara Yamun)을 설립했다. 도찰원의 임무는 황제에게 간언하고, 버이러와 대신들의 불법을 규찰하며, 닝군 주르간을 감찰하고, 논의와 상주에 참여하며,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었다. 도찰원도 버이러들의 권력을 잠식했다.[42] 홍 타이지는 더 이상 여러 친왕(親王, 만주어: ᠴᡳᠨ
ᠸᠠᠩ
Cin Wang)과 동등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유일한 황제(천자)였고, 기의 수장들은 관료의 일부분이었다. 이 움직임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했다. 하나는 남쪽의 광활한 땅을 정복하는 데에 적합한 최상의 정치 조직 형태를 제공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명 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43]

1636년 당시 홍 타이지가 제위에 올랐다고 선포하면서 들이민 근거 중 하나는 10년 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홍 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거부했다. 홍 타이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44] 홍 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홍 타이지는 조선의 사신들의 소동으로 인해 인해 '미완'에 그쳤던 자신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에서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의 사신이 아니라 국왕인 인조를 출성시켜 의례의 현장에서 자신과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묵던의 '황제 즉위식'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의례를 구현하고자 했다.[45]

홍 타이지는 총 다섯 차례에 걸친 중원 침공 중에 북경성을 포위하기도 하고 북경 인근 지역과 산서·산동의 여러 주현을 약탈하며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성도 거점으로 유지하지 못했다. 산해관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 정복 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홍 타이지는 먼저 산해관 외곽의 4개의 성, 즉 금주, 송산, 행산, 탑산을 공략하여 산해관에 접근하고자 하였다.[46][47]

1640년 3월 18일, 홍 타이지가 지르가랑과 도도를 각각 좌·우익 군의 대장으로 임명하여 금주 근방에 주둔시키고 둔전을 행하여 공격 거점을 구축함으로써, 송산(松山)·금주(錦州) 전투가 발발했고,[48] 1642년 4월, 마침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산해관 외곽 2백 리 지역의 명의 군사 거점을 붕괴시켜 관외 지역을 석권하고 산해관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49]

송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요서 지역을 거점으로 확보하자, 한족 관료들은 좀 더 과감하게 북경을 직접 공격할 것을 상주하였다.[49] 그러나 홍 타이지는 무리해서 산해관을 장악하거나 북경을 점령할 의도가 없었고, 가능하다면 명나라와 화의를 맺고 청 내부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50]

그해 10월 홍 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에 임명하여 제6차 중원 침공에 나서게 하였다. 이번에도 산해관을 우회하여 장성을 넘어간 청군은 북경 외곽을 거쳐 산동까지 거침없이 누비며 약탈전을 수행하였다. 이때 총 88개 성을 점령하고 금 1만 2천여 량, 은 220만 량, 포로 37만 명, 타마(駝馬)·나려(騾驢)·우양(牛羊) 32만 마리를 획득하였다. 이듬해 6월 군사들의 피로로 인해 묵던으로 귀환할 때까지 청군은 장장 8개월간 북경 인근 지역과 산동 일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었다.[51]

사망

청 소릉
원문

○是夜。亥刻。上無疾。端坐而崩。上在位十有七年。壽五十有二

해석

○이날 밤 21시~23시에 상이 병이 없었는데 단정하게 앉아서 붕어하였다. 상의 재위 17년이었고 나이 52세였다.

1640년대 초에 청 제국의 완전한 체제가 갖추어졌지만 아직은 순탄하지 않았다. 청의 백성들은 흉작으로 고통을 받았고,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서 습격과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팔기군은 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명의 장수 오삼계에게 막혀 고전하고 있었다. 쉽게 성공을 거듭했던 청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1643년 9월 21일 숭덕제가 급사하자 그의 어린 아들 푸린이 승계했고, 숭덕제의 이복 동생인 도르곤이 섭정을 맡았다.[52]

심양의 소릉(昭陵)에 안치되었다.

가족 관계

정후

정실(가한 즉위 전)

봉호 시호 이름(성씨) 재위년도 생몰년도 국구(장인, 장모) 별칭 비고
대복진(大福晉)
원비(元妃)
니오후루 씨
(鈕祜祿氏)
1593년 ~ 1612년 일등홍의공(一等弘毅公)
니오후루 어이두(鈕祜祿 額亦都)
후금 건국 전에 사망함.
황후로 추봉되지 않음.
적복진(嫡福晉)
계비(繼妃)
우라나라 씨
(烏拉納喇氏)
울라나라 박도(烏拉納喇 博克多) 우라나라 아바하이의 고모.
천명제 때 폐출됨.
황후로 추봉되지 않음.

황후

봉호 시호 이름(성씨) 재위년도 생몰년도 국구(장인, 장모) 별칭 비고
대복진(大福晉)
황후(皇后)
효단문황후
(孝端文皇后)
보르지기트 저르저르
(博爾濟吉特 哲哲
/박이제길특 철철)
(1626년 ~ 1636년)
1636년 ~ 1643년
1600년 ~ 1649년 화석복친왕(和碩福親王)
보르지기트 망구스(博爾濟吉特 莽古思)
화석복비(和碩福妃)
군부(衮布)
중궁국군복진(中宮國君福晋)
정궁황후(正宮皇后)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
측복진(側福晉)
장비(莊妃)
효장문황후
(孝莊文皇后)
보르지기트 붐부타이
(博爾濟吉特 布木布泰
/박이제길특 포목포태)
(추존) 1613년 ~ 1688년 화석충친왕(和碩忠親王)
보르지기트 차이상(博爾濟吉特 寨桑)
화석현비(和碩賢妃)
박리(博禮)
서영복궁복진(西永福宮福晉)
영복궁장비(永福宮莊妃)
황모장비(皇母莊妃)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
소성황태후(昭聖皇太后)
소성태황태후(昭聖太皇太后)
효단문황후의 조카.
사후 황후로 추존됨.

측실(후궁)

측비

봉호 시호(존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별칭 비고
대복진(大福晋)
신비(宸妃)
민혜공화원비
(敏惠恭和元妃)
보르지기트 하르조
(博尔濟吉特 海蘭珠
/박이제갈특 해란주)
1609년 ~ 1641년 동관저궁복진(東關雎宮福晋)
관저궁신비(關雎宮宸妃)
대복진(大福晋)
귀비(貴妃)
의정대귀비
(懿靖大貴妃)
보르지기트 나목종
(博尔濟吉特 娜木鍾
/박이제길특 나목종)
? ~ 1674년 서인지궁복진(西麟趾宮福晉)
인지궁귀비(麟趾宮貴妃)
다라대복진(多羅大福晉)
측복진(側福晋)
숙비(淑妃)
강혜숙비
(康惠淑妃)
보르지기트 바트마조
(博尔濟吉特 巴特瑪璪
/박이제길특 파특마조)
동연경궁복진(東衍慶宮福晋)
연경궁숙비(衍慶宮淑妃)

측복진

봉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별칭 비고
측복진(側福晋) 여허나라 씨(叶赫那拉氏)
측복진(側福晋) 자루트보르지기트 씨(扎魯特博尔濟吉特氏) 신복진(新福晉)
동궁복진(東宮福晉)

소복진

봉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별칭 비고
소복진(小福晋) 나라 씨(納喇氏)
소복진(小福晋) 차하르키러 씨(察哈尔奇壘氏) ? ~ 1645년
소복진(小福晋) 얀자 씨(顔扎氏)
소복진(小福晋) 이르건기오로 씨(伊尔根覺羅氏)
소복진(小福晋) 사인노얀 씨(賽音諾顔氏)
소복진(小福晋) 커이커러 씨(克伊克勒氏)

황자

- 봉호(시호) 시호 이름 별칭 생몰년도 생모 자식 비고
장남 화석숙친왕
(和碩肅親王)
무(武) 아이신기오로 호오거
(愛新覺羅 豪格
/애신각라 호격)
화석패륵(和碩貝勒) 1609년 ~ 1648년 원비 니오후루 씨 7남 1녀 원래 황위 계승자이나
도르곤 세력과의 정쟁에서 밀림.
차남 아이신기오로 로거
(愛新覺羅 洛格
/애신각라 낙격)
1611년 ~ 1621년 계비 울라나라 씨 요절함.
3남 아이신기오로 로보호이
(愛新覺羅 洛博會
/애신각라 낙박회)
1611년 ~ 1617년 원비 니오후루 씨 요절함.
4남 보국공
(輔國公)
아이신기오로 여부슈
(愛新覺羅 葉布舒
/애신각라 엽포서)
1627년 ~ 1690년 서비 얀자 씨 1남 1녀
5남 화석승택친왕
(和碩承澤親王)
유(裕) 아이신기오로 쇼서
(愛新覺羅 碩塞
/애신각라 석새)
다라승택군왕(多羅承澤郡王) 1629년 ~ 1655년 측비 여허나라 씨 3남 2녀
6남 진국공
(鎭國公)
각후(慤厚) 아이신기오로 고서
(愛新覺羅 高塞
/애신각라 고새)
1637년 ~ 1670년 서비 나라 씨 5남
7남 보국공
(輔國公)
아이신기오로 창슈
(愛新覺羅 常舒
/애신각라 상서)
1637년 ~ 1699년 서비 이르건기오로 씨 10남
8남 1637년 ~ 1638년 민혜공화원비 보르지기트 씨 요절함.
9남 패자(貝子) 아이신기오로 푸린
(愛新覺羅 福臨
/애신각라 복림)
1638년 ~ 1661년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8남 6녀 제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
10남 보국공
(輔國公)
아이신기오로 토우서
(愛新覺羅 韜塞
/애신각라 도새)
1639년 ~ 1695년 서비 커이커러 씨 9남
11남 화석양친왕
(和碩襄親王)
소(昭) 아이신기오로 보무보고르
(愛新覺羅 博穆博果尔
/애신각라 박목박과이)
1642년 ~ 1656년 의정대귀비 보르지기트 씨 요절함.

황녀

- 봉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부마 별칭 비고
장녀 고륜오한공주
(固倫敖漢公主)
1621년 ~ 1654년 계비 울라나라 씨 박이제길특 반제
(博爾濟吉特 班第)
오한군주(敖漢郡王)
차녀 고륜온장공주
(固倫溫莊公主)
마객탑(馬喀塔) 1625년 ~ 1663년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에제이 칸
(額哲 可汗)
박이제길특 아포나
(博爾濟吉特 阿布奈)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영녕공주(固倫永寧公主)
3녀 고륜정단공주
(固倫靖端公主)
1628년 ~ 1686년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기탑특
(博爾濟吉特 奇塔特)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연경공주(固倫延慶公主)
4녀 고륜옹목공주
(固倫雍穆公主)
아활(雅豁) 1629년 ~ 1678년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필륵탑갈이
(博爾濟吉特 畢勒塔噶爾)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흥평공주(固倫興平公主)
5녀 고륜숙혜공주
(固倫淑慧公主)
아도(阿圖) 1632년 ~ 1700년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색포등
(博爾濟吉特 色布騰)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화순공주(固倫和順公主)
6녀 고륜공주
(固倫公主)
1633년 ~ 1649년 측비 자루트보르지기트 씨 이이근각라 과찰
(伊爾根覺羅 夸札)
조졸함.
7녀 고륜단헌공주
(固倫端獻公主)
1633년 ~ 1648년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갱길이격
(博爾濟吉特 鏗吉爾格)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숙철공주(固倫淑哲公主)
조졸함.
8녀 고륜단정공주
(固倫端貞公主)
1634년 ~ 1692년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파아사호랑
(博爾濟吉特 巴雅斯護朗)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창락공주(固倫昌樂公主)
고륜영안공주(固倫永安公主)
9녀 1635년 ~ 1652년 측비 자루트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합상
(博爾濟吉特 哈尙)
조졸함.
10녀 현군(縣君) 1635년 ~ 1661년 서비 나라 씨 과이가 휘새
(瓜爾佳 輝塞)
11녀 고륜단순공주
(固倫端順公主)
1636년 ~ 1650년 의정대귀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갈이마색낙목
(博爾濟吉特 葛爾瑪索諾木)
조졸함.
12녀 향군품급
(鄕君品級)
1637년 ~ 1678년 서비 사인노얀 씨 박이제길특 반제
(博爾濟吉特 班第)
13녀 1638년 ~ 1657년 서비 나라 씨 과이가 합랍
(瓜爾佳 哈拉)
조졸함.
14녀 화석각순공주
(和碩恪純公主)
아길격(阿吉格) 1641년 ~ 1704년 측비 차하르키러 씨 오응웅(吳應熊) 화석장공주(和碩長公主)
화석건녕공주(和碩建寧公主)
양녀
- 화석순철공주
(和碩肫哲公主)
1612년 ~ 1648년
- 화석공주
(和碩公主)
1615년 ~ 1637년 박이제길특 만주습례
(博爾濟吉特 曼珠習禮)
극결군왕(克勤郡王) 요토(岳託)의 독녀이자
예열친왕(禮烈親王) 다이샨(代善)의 손녀.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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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han i araha jakūn gūsai manjusai mūkun hala be uheri ejehe bithe sioi》 "mini taidzu han mafa taidzung han mafa abkai hese be ambarme alifi, dergi oci."
  2. 《御製八旗滿洲氏族通譜序》, "我們的太祖汗祖宗太宗汗祖宗天命把大接受皇上."
  3. 구범진 (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글방. 22쪽. ISBN 9788972916826. 
  4. 《太祖武皇帝實錄》
  5. 이민환,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
  6. 광해군일기
  7. 이윤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북스펍, 2012
  8. 광해군일기
  9.  《鲁庵文集》
  10. 박지원, 《열하일기
  11. 徐慶淳, 《夢經堂日史》
  12. Crossley, Pemela Kyle. 《만주족의 역사》. 돌베게. 352쪽. ISBN 9788971995310. 
  13. Rawski, Evelyn S. (1991). 〈Ch'ing Imperial Marriage and Problems of Rulership〉. Watson, Rubie S.; Ebrey, Patricia Buckley. 《Marriage and Inequality in Chinese Societ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70–203쪽. ISBN 0-520-06930-7. 
  14. Elliott, Mark C. (2001),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397쪽, ISBN 0-8047-4684-2 
  15. Grupper SM. Manchu patronage & Tibetan Buddhism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Ch'ing Dynasty. J. Tibet. Soc., no 4, 1984, 69쪽
  16. 《山海紀聞·一·紀名號決戰勝》:「一,奴酋名號。號憨者,主也。【四男名喝竿,稱憨,不出戰。】」
  17. 三田村泰助, 「再び清の太宗の即位事情に就いて」, 《東洋史研究》7-1, 1942
  18. 《만문로당》. 1778. ilan biyai ice ilan i inenggi.jakūn juse acafi ama han de abkai buhe doro be adarame toktobumbi. adarame ohode. abkai hūturi enteheme ombi seme fonjire jakade. han hendume. ama be sirame gurun de ejen obure de. hūsungge etuhun niyalma be ume ejen obure. husungge etuhun niyalma gurun de ejen ohode. ini hūsun be dele arame banjifi. abka de waka ojorahū. emu niyalma udu bahanambi seme. geren i hebe de isimbio. jakūn juse suwe jakūn wang oso. jakūn wang emu hebei banjici. ufararakū okini. jakūn wang suweni gisun be mararakū niyalma be tuwafi. suwe ama i sirame gurun de ejen obu. suweni gisun be gaijarakū. sain jurgan be yaburakū oci. jakūn wang suweni sindaha han be suwe halame. suweni gisun be mararakū sain niyalma be sonjofi sinda. tere halara de. efime injeme hebei icihiyame halaburakū. marame cira aljaci. sini ehe niyalmai ciha obumbio. tuttu oci. ehe i halambi kai. jakūn wang suweni dolo. aika baita gurun i doro dasara de. 
  19. 청사고》. 十一年八月,太祖崩,岳託與其弟薩哈璘告代善,請奉太宗嗣位,代善曰: “是吾心也!” 告諸貝勒定策。 太宗辭讓再三,代善等請益堅,乃即位。 是冬,伐蒙古喀爾喀紥魯特部,擒貝勒巴克等,斬鄂爾齋圖,俘所屬而歸。 
  20. . 1778. daci manju gurun i doro hengkilere de. amba beile. amin beile. manggūltai beile. ilan beile be ahūn seme kunduleme han i juwe ashan de tebuhe. yaya bade inu han i adame tebure dabala. fejile teburakū bihe.  다음 글자 무시됨: ‘만문로당’ (도움말); |제목=이(가)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21.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제국》, 민음사
  22. 남호현, 《朝淸關係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盟約’의 역할》, 조선시대사학회
  23.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문노당역주회 (2017년 9월 30일). 《만문노당역저: 태종》. 99~103쪽. 
  24.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7~168쪽. ISBN 9788994606514. 
  25. 《太宗文皇帝實錄》. 1655. ○戊寅。上督大軍入邊。攻克洪山口城。駐師城內。擢洪山口人方遇清為備禦。給與敕命。令守洪山口。招集流亡。盡心供職。俟後有功。不次擢用。又有明千總一員。把總一員。遁匿山中。聞城克。率百人擐甲執械來降。上嘉之。擢千總為備禦。把總為千總 
  26. William T. Rowe. 《China's Last Empire: The Great Qing》. History of Imperial China. An Imprint of Harvard University Press. ISBN 978-0674066243. 
  27. Frederic Wakeman (1986). 《The Great Enterpris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65쪽. ISBN 9780520235199. 
  28. Frederic Wakeman (1986). 《The Great Enterpris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64~224쪽. ISBN 9780520235199. 
  29. 만문로당》. 1778. han hendume. tuttu oci minde alaha niyalma holtohobi kai. muse mektefi fonjiki. alaha niyalma holtoci. holtoho niyalma be waki. alaha niyalma inu oci. yabuhakū niyalma be waki seme. dere fularafi jili banjime hendufi morilaha. tere gisun de manggūltai beile hendume. han serengge. siden be hendumbi dere. mimbe canggi ainu bakcin arafi gisurembi. han seme eitereme haldabaxame banjici ojorakū oci. mimbe ainci waki sembidere seme hendume. loho be julesi obufi fesin be jafame seferdere de. ini emu eme de banjiha deo degelei taiji. sini arbušara mudan waha kai seme šukilara jakade. eteretele genehe. tede beile jili banjifi. 
  30. 《大淸太宗文皇帝實錄》 卷10, p.8
  31. 《太宗文皇帝實錄》. 1655. ○丙申 上以元旦朝賀屆期諭八旗諸貝勒大臣曰禮部參政李伯龍疏奏我國朝賀行禮時不辨官職大小常有隨意排列踰越班次者應請酌定儀制等語此言誠是今元旦朝賀。應令八旗諸貝勒獨列一班行禮。外國來歸蒙古諸貝勒大臣次之八旗文武官員次之。各照旗序行禮至貝勒莽古爾泰因其悖逆。定議治罪革大貝勒稱號。自朕即位以來。國中行禮時曾與朕竝坐。今不與坐。恐他國聞之。不知彼過。反疑前後互異。彼年長於朕。可否仍令竝坐。著巴克什達海庫爾纏覺羅龍什索尼與大貝勒代善及諸貝勒會議具奏尋會議時諸貝勒執不可竝坐者半代善曰上諭誠是彼之過不足介懷即仍令竝坐亦可頃之又曰我等既戴皇上為君又與上竝坐恐滋國人之議謂我等奉上居大位又與上竝列而坐甚非禮也禮本人情人心所安。即天心所佑。各遵禮而行自求多福斯神佑之矣自今以後上南面中坐以昭至尊之體我與莽古爾泰侍坐上側外國蒙古諸貝勒坐於我等之下如此方為允協諸貝勒皆曰善於是以其議奏聞上從之 
  32. 《太宗文皇帝實錄》. 1655. ○是日。於大凌河城南。獲一漢人。訊之。言明修築大凌河城。已經半月。城牆已完。雉堞完其半。有總兵祖大壽及副將八員。參遊約二十員。馬兵七千。步兵七千。夫役商賈。約萬餘人在焉。於是大軍遂以是夜進圍其城 
  33. 《太宗文皇帝實錄》. 1655. ○戊辰。大凌河城內各官皆與祖大壽同謀歸降。獨副將何可剛不從。大壽執之令二人掖出城外於我諸將前殺之可剛顏色不變不出一言含笑而死城內饑人爭取其肉大壽遂遣副將四員遊擊二員來誓 上與諸貝勒對 天誓曰明總兵官祖大壽、副將劉天祿、張存仁、祖澤潤、祖澤洪祖可法、曹恭誠、韓大勳、孫定遼、裴國珍、陳邦選李雲鄧長春劉毓英竇承武。參將遊擊吳良輔高光輝劉士英盛忠祖澤遠胡弘先祖克勇祖邦武施大勇夏得勝李一忠劉良臣張可範、蕭永祚韓棟段學孔張廉吳奉成方一元塗應乾陳變武方獻可劉武元楊名世等今率大凌河城內官員兵民歸降。凡此歸降將士。如誑誘誅戮。及得其戶口之後。復離析其妻子。分散其財物牲畜。天地降譴奪吾紀算若歸降將士懷欺挾詐。或逃或叛。有異心者。天地亦降之譴。奪其紀算。顯罹國法如遵守此盟 天地垂佑。壽命延長。世澤久遠安享太平大壽等誓曰祖大壽等率眾築城。遇滿洲國兵。圍困三月。軍餉已盡。率眾出降傾心歸汗。毫無猜疑歸順以後官軍人民家口俱獲保全。若大壽等違心背盟天地鑒之。殃及其身。死於刀箭之下。儻汗以計詐害。亦惟汗自知之。誓畢。上遣巴克什庫爾纏覺羅龍什。詣大壽諭曰既經盟誓天地。當用何策以取錦州其急言之。大壽曰我即親至御前。商議此事。庫爾纏、龍什、回奏上復遣諭曰。盟誓雖申。民心未定。今晚且勿來。期以詰朝相見大壽曰。事已定。更何猜疑。我即至御前。議取錦州之策。庫爾纏、龍什、還奏上遂令之來命諸貝勒出迎於一里外。諸貝勒行抱見禮大壽曰。諸貝勒來迎。何以克當。諸貝勒曰。將軍親至。豈有不迎之理。一鼓盡時。方至御營。上出幄。列炬以俟。大壽欲跪見。上止之。行抱見禮。令大壽先入幄。大壽謝不敢。遂竝入。命坐於上左。設饌宴之。以金巵酌酒。親賜大壽。大壽辭。候上先上先讓大貝勒代善飲次上飲。次命大壽飲。大壽曰。我所攜之物。日久已罄。願借汗酒。奉獻御前。於是酌酒跪進。上飲畢。上以御服黑狐帽、貂裘、及金玲瓏鞓帶、緞鞾、雕鞍白馬、賜大壽曰。初來歸我。宜拜天地。以禮相見。因暮夜。不能成禮且在戎行。攜物無多。不能以嘉物相贈也。大壽奏曰蒙上優待若此夫復何言我雖至愚豈木石等耶遂定取錦州之策大壽辭入城上送出俟大壽行方入幄 
  34. 谷井陽子 (2015). 《八旗制度の研究》.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23쪽. 
  35.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1~152쪽. ISBN 9788994606514. 
  36.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
  37.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2쪽. ISBN 9788994606514. 
  38. 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
  39.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
  40.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8~169쪽. ISBN 9788994606514. 
  41.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195쪽. ISBN 9788958289326. 
  42.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8쪽. ISBN 9788994606514. 
  43.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40쪽. ISBN 978-89-9460627-9. 
  44. 병자호란 미스터리…전쟁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
  45. 구범진 (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글방. 300~301쪽. ISBN 9788972916826. 
  46. 魏源 (1984). 《聖武記》 1. 中華書局. 29쪽. 
  47. 박민수 (2018년 6월). “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 《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07): 222~223. 2019년 6월 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8. 박민수 (2018년 6월). “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 《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07): 223. 2019년 6월 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9. 박민수 (2018년 6월). “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 《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07): 226. 2019년 6월 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0. 박민수 (2018년 6월). “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 《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07): 229. 2019년 6월 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1. 박민수 (2018년 6월). “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 《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07): 228. 2019년 6월 6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2.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43쪽. ISBN 978-89-9460627-9. 

관련 항목

외부 링크

전임
청 태조
중국의 국가 원수
1626년 ~ 1643년
후임
청 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