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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전향 장기수 北送, 그 후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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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200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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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12.12.18}}</ref> 2003년 9월 24일 식물인간 상태라는 리인모를 만난 한완상은 1993년 북송 당시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10년째 살고 있어서 놀랐다고 밝혔다. 한완상은 송환 당시 통일부통리였다. <ref>{{저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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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길을 찾아서] 북한 딸집서 10년째 생존한 리인모 노인
|제목=[길을 찾아서] 북한 딸집서 10년째 생존한 리인모 노인

2019년 7월 3일 (수) 12:17 판

리인모[1](李仁模, 표준어: 이인모, 1917년 8월 24일 ~ 2007년 6월 16일)는 조선인민군 언론인이다. 종군기자 출신으로, 남한에서 34년간 비전향 장기수로 있다가 석방된 후 1993년 3월 19일 최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 사람이다.

생애

1917년 함경남도 풍산군 개마고원 지대에서 화전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일본 도쿄공업고등학교에 다니다 중퇴했을 정도로 인텔리였다. 선배 및 친구들과 함께 항일운동에 뛰어든 후 스물한 살 때 서울로 옮겨 활동하다 45년 6월 일제의 탄압에 산속으로 피신한 후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풍산, 흥남 지역에서 조선노동당 지역 선전국장으로 활동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 중 인민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가 되어 전선을 따라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후퇴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대의 신문을 발행하는 일을 하였다. 경남도당 선전부장 대리로 일하다가 52년 지리산 대성골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돼 광주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당시 36세였다. 이후 34년간 복역하면서 전향을 거부하여 비전향장기수가 되었다. [1]

한국전쟁 당시 그의 역할을 두고 대한민국의 재판 기록은 의용군 강제 모집이나 빨치산 활동으로 적시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군기자로서 전선 취재를 담당한 것으로 주장해 상충한다.

1952년 검거되어 7년간 복역했고 1959년 출소했지만 1961년 6월 부산에서 지하당 활동 혐의로 붙잡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76년 만기가 지났지만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으로 88년 10월까지 복역했다.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출소한 후 그는 양아들 김상원의 경남 김해 집에서 생활했다.[2]

출소 후 많은 글을 써서 비전향장기수의 존재를 국내외에 널리 알려 한국 정부의 인권 개선에 기여했다. 송환 문제가 불거진 것도 1989년 월간 말지에 북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수기 '내 청춘 통일에 묻어'를 연재하면서부터다. 이게 1991년 9월 21일자 북한 노동신문에 실리면서 북한은 1991년 9월 대남방송인 평양방송을 통해 리인모의 송환을 요구한다. 두 달 뒤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12월 10~13일)을 취재하러 내려온 북한 중앙방송 기자가 부인 김순임씨와 외동딸 현옥씨 등 북녘 가족의 답장과 사진을 남측 취재진에 전해왔다. 이후 북한은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등에서 이를 줄기차게 송환을 요구했다.

마침내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 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가족 방문'이라는 명분으로 리인모의 방북을 허용(송환)했다. 리인모는 폐렴으로 입원 중이던 부산대병원에서 경찰헬기 편으로 판문점에 도착했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한 가족들, 부인 김순임씨와 딸 현옥씨, 그리고 외손주들과 만난 후 휠체어에 의지한 채 북으로 향했다.[3] 북한은 판문점을 거쳐 평양 도착까지의 리인모 송환 실황중계를 반복 보도한 가운데 이를 '김일성.김정일의 은덕'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 등으로 표현하며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펼쳤다.[4]

그의 북송은 1992년 7.7선언 4주년을 맞아 남북 간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 이산가족 희망지역 정착 제의에 따라 이뤄졌다. 정부는 리인모가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을 감안해 '장기방북' 형식을 취했고 그의 주민등록증을 회수하기도 했다.[5] 김영삼은 퇴임 후 인터뷰에서 리인모를 조건없이 북한에 보내게 된 것이 자신의 결단이었음을 밝혔다. [6] 그는 1993년 3월 9일 각 언론사 편집·보도국장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한 자리에서 기사거리로 "선물을 주겠다"며 리인모 북송 방침을 밝혔다. 정부와 청와대 참모들과 한마디 협의 없이 민감한 사안을 불쑥 터뜨렸다.[7] 북한이 리인모 송환을 요구할 때마다 정부는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의 조건을 내세워 거부해왔는데 취임 12일째인 김영삼이 느닷없이 "그냥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보내줄 것"이라고 발표해버린 것이다.

송환 후 리인모는 한국전쟁 전 혼인했던 부인과 딸과 함께 생활했다. 북한은 고위층이 사는 서장동에 단독주택을 마련해 주고 주치의가 딸리고 몸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했다고 한다. 96년 5월 말부터 6월 초 사이 미국에서 신병치료를 받기도 했다.[8] 2001년 8월 19일 `2001년 민족통일대축전' 남측 대표단에 포함돼 방북한 양아들 김상원과 8년 5개월 만에 만났다.[9] 2002년 6월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통일대회 행사 때 남측 딸을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만났다고 알려졌다.[10] 2003년 9월 24일 식물인간 상태라는 리인모를 만난 한완상은 1993년 북송 당시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10년째 살고 있어서 놀랐다고 밝혔다. 한완상은 송환 당시 통일부통리였다. [11] 그는 2007년 6월 16일 89세로 사망, 인민장으로 치러져 평양의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12] [13] 북한은 부인 김순임이 2015년 1월 12일 사망하자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는 등 장례식을 대대적으로 치렀다. [14]

리인모는 비전향장기수 첫 송환자로서 북한에서 줄곧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신념과 의지의 화신' '통일의 영웅' 등으로 일컬어졌다. `체제 및 정치선전'에 더할 수 없는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송환 직후인 4월 15일 자신의 생일에 입원 중인 리인모를 찾아 격려하고 노동당 당원증을 수여했다. '김일성 훈장'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도 수여됐다. 문필활동의 공로로 북한 문필가·언론인들에게 주어지는 `3·1월간상'을 수상했고 또 통일부문 인사들이 영예로 생각하는 `조국통일상'도 받았다.[15]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93년 3월19일'(저자 한웅빈)이 95년 발간됐고,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제11~13부)이 만들어졌다. 가요와 기념 우편엽서, 우표도 나왔다. 2008년 평양 통일거리에는 동상이 건립되기도 했다. 량강도 김형직군에 있는 모교인 파발인민학교는 '리인모 인민학교'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16] [17] [18] [19]

논란

리인모의 말년에 관해 논란이 있다. 2007년 89세로 사망할 때까지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며 죽은 후에도 '신념과 의지의 전형인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라고 칭송받[20]는 한편 보수 언론에서는 선전용 교화소 발언으로 북한 당국에 밉보여 외롭게 죽었다고 주장한다. 송환 당시에 이미 폐렴을 앓아 휠체어 신세였던 리인모는 2003년 9월 이후부터 사망한 2007년 6월 16일까지의 행적을 언론에서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 그 이유가 투병과 노쇠함 때문인지 북한 당국에 밉보였기 때문인지 불명확하다.

리인모가 북한 당국에 밉보였다고 거론되는 게 교화소, 즉 수형시설에서의 발언 때문이다. 문제의 발언은 2008년 펴낸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에 처음 등장하며 열악한 환경의 교화소에서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나온다. 리인모와 수형시설 관련 내용이 처음 등장하는 2006년 데일리NK 기사와 2008년 나온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에는 수형시설을 둘러본 리인모가 김정일(또는 중앙당)에게 개선을 건의(또는 보고)했으며 실제로도 수형 여건이 개선되고 수형자 대우가 달라졌다고 나온다. 그러나 2009년 주간조선부터는 문제의 교화소 발언으로 리인모의 대우가 달라져 불이익을 당하는 식의 기사가 나온다. 2017년 조선펍 기사에 이르러서는 리인모의 폭탄발언을 전해들은 김정일이 화를 내었다고 나온다. 이 같은 부분은 초창기 기사에는 등장하지 않은 것이며 주간조선 기사 이후에 등장하고 발언 내용도 3년, 1년, 한 달 등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2001년 문제의 발언이 있었고 리인모가 북한 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다면 2002년 6월엔 금강산에서 남측 딸을 만나고 2003년 9월 24일 자신의 집을 방문한 한완상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식물인간 상태라는 리인모가 북송 후 10년째 살고 있어 놀랐다는, 송환 당시 통일부통리였던 한완상의 증언은 인상적이다.

2006년 1월 15일 데일리NK는 리인모로 인해 2002년부터 북한 수형시설의 인권 실태가 개선된 적이 있다고 중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미래한국이 2006년 1월 16일 이를 전재했다. 이 기사에는 문제의 발언 내용은 없지만 리인모의 건의를 받은 북한 당국의 조치는 굉장히 긍정적이다. 북한으로 송환된 후 리인모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둘러봤으며 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접 제기해 북한 수형시설의 인권실태가 한때 개선됐다는 것이다. 리인모가 북한의 감옥을 둘러보게 된 이유는 본인의 희망에 의해서였으며, 2001년 말 평안남도 평성 교화소와 함경북도 회령 교화소, 평안북도 증산군 11호 단련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정치범 종신 수용소 등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인모의 건의 후에 교화소 내에 구타가 사라지기도 하고 2002년에는 대사면 조치가 내려져 수형자 절반이 출소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는 2005년 11월 국가정보원이 국회 정보위에 제출한 자료 ‘북한의 인권개선 노력’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21] 이것은 리인모가 교화소 관계자 앞에서 폭탄발언을 한 게 아니라 정식 계통을 밟아서 김정일에게 건의했고 그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건의로 리인모가 불이익을 받은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2008년 5월 6일 도서출판 시대정신이 펴낸 재중 탈북자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22]에 리인모와 교화소 관련 내용이 나온다. 책 2부 중 '탈주자에 대한 공개총살' 부분에는 교화소에서 도주자 총살이 없어졌다. 도주자는 사형이 아니라 형기가 늘어났는데 그게 리인모 덕분이라고 밝힌다. 한국에서 34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조선(북한)으로 돌아왔는데, 몇 개의 교화소를 돌아보고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중앙당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의 보고 덕분에 그때부터 전거리 교화소에서 사형당한 도주자는 없었다(책 p. 145)는 것이다. [23] [24] 북한 일반 교화소의 실상을 최초로 밝힌 이 책에는 문제의 발언이 처음 등장한다. 북한 당국이 리인모의 보고를 받고 수형자 대우를 개선한 모습을 싣고 있다.

2009년 6월 23일 주간조선은 리인모가 선전용 감옥을 둘러본 뒤 “이런 감옥에선 단 1년도 살 수 없다”고 발언한 후 모든 선전활동이 중단된 채 고립돼 외롭게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25]고 보도했다. 새로운 사실을 ~알려졌다로 표현하면서 주장의 근거는 밝히지 않았고 리인모의 발언 내용 중 3년이 여기서는 1년으로 나온다. 수형시설 개선 건의 내용은 없으며 북한 당국에 불이익을 당하는 리인모 모습이 그려진다.

데일리NK의 2009년 10월 7일 기사 “도주자의 말로 어떻게 되는지 똑바로 보라”는 리준하의 ‘교화소 이야기’ 책 2부 중 '탈주자에 대한 공개총살' 부분(p. 140~146)을 그대로 전재한 것으로 리인모와 교화소 관련 내용은 책과 같다. [26] 새로운 기사가 아니라 리준하의 책 ‘교화소 이야기’ 내용을 전재한 것이므로 주간조선 보도의 영향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데일리NK는 2010년 3월 19일 기사에서 북한 정권의 융숭한 대접은 리인모의 언행 한마디에 중단됐다는 주장도 있다고 밝힌다. 리인모가 북한의 교화소를 둘러보고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후 그를 활용한 모든 선전활동이 중단됐고 이후 그는 사회와 고립돼 외롭게 연명하다 2007년 6월 생을 마쳤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다[27]는 것이다. 문제의 발언이 등장하지만 건의라는 형식이 없고 북한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는 리인모가 서술된다. 문제의 교화소 발언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기존에 나온 2006년 1월 15일, 2009년 10월 7일 기사와 상반된다. 그것도 2001~2002년 무렵의 정보가 불과 5개월 사이에 정반대로 바뀌었다. 그사이에 리인모가 불이익을 받는 기사가 2009년 6월 23일 주간조선에 실렸다.

2011년 2월 7일 뉴데일리에는 남한에서 36년 옥살이를 한 비전향좌익수 이인모가 북한에서 로동교화소를 돌아본 뒤 “나 같으면 한 달 안에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28] 여기는 3년이 아니라 한 달로 나온다. 북한당국의 반응과 리인모의 불이익당하는 모습은 없다.

2013년 뉴스파인드는 칼럼에서 리인모가 선전용 교화소를 둘러보고 나서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진 후 그를 활용한 모든 선전활동이 중단됐고 이후 그는 사회와 고립돼 외롭게 연명하다 2007년 6월 생을 마쳤다는 주장도 있다[29]고 주장했다. 주장의 근거는 밝히지 않았고 수형시설 개선 건의 내용은 없으며 리인모가 불이익을 받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2015년 3월 13일 동아일보는 탈북자 김미란의 증언 기사에서 증산교화소에 이인모가 와서 이 교화소에서는 일년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란 말을 한 다음부터 이인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30]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는 3년이 아니라 1년으로 나온다. 북한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는 리인모가 그려진다.

특히 2017년 전 조선-체코 신발 합영회사 사장 김태산이 쓴 조선펍 글에는 기존의 자료에는 보이지 않던 내용이 등장한다. 리인모가 교화소 관련 문제의 발언을 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김정일이 “역시 자유를 맛본 자들은 믿을게 못돼”라고 화를 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리인모의 말이 나온 순간부터 30분도 채 되기 전에 노동당과 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 3개의 통보선으로 리인모의 교화소 행적과 발언 내용이 김정일에게 직보되었고 이에 대한 김정일의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리인모는 “당과 수령의 신임을 저버린 쓸모없는 고깃덩이” 취급을 받았고 마침내 2007년 6월 누구도 찾지 않는 속에서 고독한 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31] 역시 주장의 근거는 없다. 심지어 해당 글 끝에는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라고 되어 있다. 또 리인모가 김정일에게 건의했다는 내용이 여기서는 행정계통 등으로 직보받은 김정일이 분노했다고 나온다. 리인모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고 외롭게 죽는다고 나온다.

참고자료

연관 항목

각주

  1. “남북정상회담 앞두고 생각나는 이름, 이인모 선생”. 오마이뉴스. 2018.03.13. 
  2. “‘북으로 간 양아버지 리인모 선생 묘소에 가고 싶다더니…’”. 오마이뉴스. 2015.10.15. 
  3. “[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소사] <129>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북한 송환”. 한국일보. 2014.03.17. 
  4. “北韓,李仁模씨 송환후 대대적 선전 공세”. 연합뉴스. 1993.03.20. 
  5. “사망한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씨는 누구”. 연합뉴스. 2007.06.17. 
  6. "나는 이래서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다". 연합뉴스. 2007.11.29. 
  7. “[박관용 회고록] 대통령 홀로 뛰는 것은 위험천만”. 시사저널. 2016.05.12. 
  8. “외국서 신병치료한 북한 고위 인물들”. 연합뉴스. 2001.08.15. 
  9. “북송 리인모씨, 방북 양아들 만나”. 2001.08.20. 2012.12.18. 
  10. “비전향 장기수 北送, 그 후 2년”. 2002.09.02. 2012.12.18. 
  11. “[길을 찾아서] 북한 딸집서 10년째 생존한 리인모 노인”. 한겨레. 2012.12.18. 
  12. 《중앙일보》 (2007.7.10) 한국 언론이 처음 가 본 북한 '열사릉' 〈하〉
  13. “북송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씨 사망”. 연합뉴스. 2007.06.17. 
  14. “북한, 첫 북송 비전향 장기수 아내 띄우기 나서”. 연합뉴스. 2015.01.12. 
  15. “이인모씨의 바쁜 북한 생활”. 연합뉴스. 1999.02.24. 
  16. “비전향 장기수 부인도 영웅 대접…북한의 속셈”. sbs. 2015.01.18. 
  17. “北의 비전향장기수 평가와 대우”. 연합뉴스. 2005.10.02. 
  18. “북송 비전향장기수 '특별' 대우”. 연합뉴스. 2007.06.17. 
  19.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 사망”. 경향신문. 2007.06.17. 
  20. “북한, 비전향장기수 리인모 띄우기.."불굴의 혁명전사". 연합뉴스. 2015.03.19. 
  21. “북송 장기수 이인모가 북한인권개선 위해 노력?”. 미래한국(데일리NK 인용). 2006.01.16. 
  22. “교화소 이야기-최초로 밝혀지는 일반 교화소의 실상”. 시대정신. 2008.05.06. 
  23. “北 교도소 실태 최초 고발한 ‘교화소 이야기’”. 데일리NK. 2008.05.07. 
  24. “재중 탈북자가 전하는 北 '감옥' 실상”. 연합뉴스. 2008.05.27. 
  25. 《주간조선》 (2009.6.23) 억류 여기자 수감 북한 교화소는 어떤 곳
  26. ““도주자의 말로 어떻게 되는지 똑바로 보라””. 데일리NK. 2009.10.07. 
  27. “이인모는 송환 후에도 金부자에 충성다짐했을까?”. 데일리NK. 2010.03.19. 
  28. “이곳이 수용소”. 뉴데일리. 2011년 2월 7일. 
  29. 《뉴스파인더》 (2013.3.18) 북송됐던 리인모, 과연 행복했을까
  30. ““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동아일보. 2015.03.13. 
  31. “북송된 미전향장기수 이인모가 "쓸모없는 고깃덩이"로 버려진 이유는?”. 조선펍. 2017년 9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