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최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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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숙빈의 궐 내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숙빈은 이시기에 전후로 출궁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이현궁 출궁 후에도 숙종은 숙빈과 단 한번의 왕래도 없었고 암행을 나갈 때에도 이현궁을 항상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는데, 숙종은 숙빈이 죽었을 때 당시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 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도 않았다. 또한 숙빈의 묘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숙종은 두번이나 최씨를 일반인보다 못한 취급을 한 것도 모자라 명당으로 묘자리를 정해서 올린 사관을 귀양까지 보낸 정도로 매우 감정이 안좋았던 기록이 [[(숙종 44년 1718년 4월 20일1번째 기사, 숙종44년 1718년 4월 29일 1번째기사)]] 실록에 그대로 있는데, 이 기록만 보더라도 숙빈에 대한 경계와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숙빈의 궐 내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숙빈은 이시기에 전후로 출궁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이현궁 출궁 후에도 숙종은 숙빈과 단 한번의 왕래도 없었고 암행을 나갈 때에도 이현궁을 항상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는데, 숙종은 숙빈이 죽었을 때 당시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 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도 않았다. 또한 숙빈의 묘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숙종은 두번이나 최씨를 일반인보다 못한 취급을 한 것도 모자라 명당으로 묘자리를 정해서 올린 사관을 귀양까지 보낸 정도로 매우 감정이 안좋았던 기록이 [[(숙종 44년 1718년 4월 20일1번째 기사, 숙종44년 1718년 4월 29일 1번째기사)]] 실록에 그대로 있는데, 이 기록만 보더라도 숙빈에 대한 경계와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영조는 숙빈의 신분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특히 소령원에 있는 기록과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들은 영조에 의해 기록된 것인데, 여경방에서 태어났다고 기재한 내용도 그렇고 평생 어머니의 신분 컴플렉스에 시달린 영조가 어머니가 7살에 입궁했다는 내용을 기재한 것도 역사학자들도 고지고대로는 믿지 않고 있다. 고종의 주장한 침방나인 설도 고종이 영조의 직계후손이라는 이유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조는 숙빈의 신분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특히 소령원에 있는 기록과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들은 영조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여경방에서 태어났다고 기재한 기록과 어머니의 신분 컴플렉스에 평생동안 시달린 영조가 어머니가 7살에 입궁했다는 내용을 기재한 것도 역사학자들도 고지고대로 믿지 않고 있다. 숙빈을 왕후로 추존하려고 시도하였다가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례만 보더라도 영조는 어머니의 출생과 신분을 상승시키거나 조작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 동시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숙빈은 역대 후궁과는 달리 많은 존호가 붙여져있는데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종의 주장한 침방나인 설도 고종이 영조의 직계후손이라는 이유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사후 ==
== 사후 ==

2019년 6월 9일 (일) 17:46 판

숙빈 최씨
숙원, 숙의, 귀인, 빈
이름
최복순(崔福順)
별호 숙원 최씨 (淑媛崔氏)
숙의 최씨 (淑儀崔氏)
귀인 최씨 (貴人崔氏)
숙빈 최씨 (淑嬪 崔氏)
시호 화경(和敬)
신상정보
출생일 현종 11년, 1670년 12월 17일
사망일 숙종 44년, 1718년 3월 9일 무오일
사망지 창의동 사가
국적 조선 조선
왕조 조선 왕조
부친 최효원(崔孝元)
모친 정경부인 남양 홍씨
배우자 숙종
자녀 3남
영수, 영조, 왕자(요절)
종교 미상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년 12월 17일(음력 11월 6일) ~ 1718년 4월 9일(음력 3월 9일))는 조선의 19대 왕 숙종(肅宗)의 총관후궁이자, 21대 왕 영조(英祖)의 생모이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본명은 최복순(崔福順)이다.

생애

충무위 부사과를 지내고 후일 증 영의정으로 추증최효원(崔孝元)과 남양홍씨의 딸로서 1670년 12월 17일(음력11월 6일)에 태어났다.[1] 1936년 장봉선 등이 편찬한 정읍군지에 의하면 숙빈 최씨는 정읍현 태인면에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다 한다. 그때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영광군수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태인의 대각교에서 남루한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민유중의 부인 송씨가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고, 인현왕후가 왕비를 간택되어 입궁할 때 대동시켰다고 한다.[2] 다른 설에 의하면 숙빈의 고향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 마을이라고도 한다.[2] 그러나 외할아버지 홍계남(洪繼南)이 한성 출신이었다 한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숙빈최씨가 태어난 곳은 여경방 서학동(현재의 서울 세종로 일대)이다. 서학동은 말 그대로 서부의 학교 서학이 있는 동네로서 여경방에 속한 곳이었다. 영조는 이 곳 생가에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과 외조부 홍계남의 자손이 대대로 살면서 팔지 못하게 했으니 꽤나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숙빈최씨를 위해 별도의 사당 육상궁(毓祥宮)을 세우고 시호(諡號)를 올리는 등 추숭 작업을 마무리 한 뒤에 뒤늦게 생가 복원을 꾀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육상궁이 경복궁의 서북쪽인 북부 순화방에 있었으므로 가까운 거리에 생가를 두고자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의 본관은 해주 최씨라고 하나 해주 최씨의 시조 최온(崔溫)의 몇대 후손인가는 불분명하다. 숙빈의 직계조상은 할아버지 최태일, 증조부 최말정, 고조부 최억지의 이름이 전하지만, 이들은 해주 최씨 족보에 실리지 못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7세 때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다만 최숙빈의 출신에 대한 이설 중의 하나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는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여 숙빈이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설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숙빈 최씨가 7살에 입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4] 7살은 보통 궁녀들이 입궁하는 평균 연령대이고, 그렇기 때문에 최씨가 침방 나인으로 있었다는 설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은 숙빈이 침방나인 시절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5]. 그렇지만 침방 나인의 경우 궁녀 직첩 중에서 두번째로 높은 서열이라 아들인 영조가 신분 컴플렉스에 시달린 것에 비해서는 너무 높은 직책이라는 의견도 있어 확실하지 않으며, 오히려 침방나인의 시중을 들었던 각심이 출신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태이다.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 컴플렉스에 평생을 시달렸고 7살에 입궁했다는 두 가지 확실한 기록만을 놓고 봤을 때에는 침방 나인으로 입궁하였다 인현왕후 폐출시 같이 출궁 후 서인들에 의해 무수리로 재입궁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지만 역사학자들은 7살에 입궁했다는 숙빈 최씨 신도비 기록 자체가 영조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입장이다.

최씨가 처음 승은을 입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숙종 19년(1693년) 처음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고 그해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으나 영수 왕자는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신주기가 10개월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1692년 겨울 정도에 숙종과 인연을 맺고 1693년 1월 초에 임신한 것으로 본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1694년) 숙종의 특명으로 종2품 숙의(淑儀)가 되었고[6] 그해 9월 13일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는데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이다. 숙종 21년(1695년)에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단종의 복위(숙종 24년(1698년) 기념으로 정1품 빈으로 봉해지면서 숙(淑)이란 휘호를 얻어 숙빈(淑嬪)이 되었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인현왕후의 사후 숙종에게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한 것으로 알려졌다.[7] 그 후 희빈 장씨가 사사되기 하루 전에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고 국법을 바꾸기에 이르었다. 숙종이 이와 같이 국법을 내린 것은 희빈 장씨와 같은 사례를 방지하고자 했다는 숙종의 의지였다고는 하지만 속내는 이미 서인의 영수로 떠올라 서인의 실세로 자리잡은 숙빈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희빈이 죽으면 영빈과 숙빈이 다음 중전 후보였는데 영빈은 명문가 소생에 자녀가 없다는 점에서 유리한 적합한 왕비 후보였고, 숙빈의 경우 출신이 미흡하여 결격사유가 되었지만 아들인 연잉군을 낳았고 서인들의 새로운 영수로 떠오른 여인이라 서인들의 세력을 발판과 지지를 기반으로 새로운 중전후보라 숙종입장에서는 노론세력의 지지을 받는 숙빈을 경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실제로 숙종은 내명부가 권력의 중심에 서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숙종은 희빈 장씨 사사전 비망록을 내린 후 사사후에는 곧바로 처녀간택으로 새로운 중전후보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소론집안 출신의 여인 위주로 찾기 시작했다. 소론집안의 여식으로 찾는 다는 것 자체가 노론의 추존을 받는 숙빈을 경계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다음 해 5월에는 이현궁 토목공사에 3개월 이상이 걸린다는 상소를 무시하고 그대로 공사를 밀어붙여 완공에 맞춘 9월에는 중전 책봉을 완료하였고 10월에는 모든 후궁들의 품계를 높여주어 내명부를 새롭게 개편하였는데 이와 같은 절차들은 숙빈최씨를 내명부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숙종의 철저한 계산에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숙빈의 궐 내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숙빈은 이시기에 전후로 출궁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이현궁 출궁 후에도 숙종은 숙빈과 단 한번의 왕래도 없었고 암행을 나갈 때에도 이현궁을 항상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역대 임금들은 왕실 지친이나 오래도록 내명부의 후궁으로 있거나 총애가 깊은 후궁이 죽으면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를 했는데, 숙종은 숙빈이 죽었을 때 당시 "제수를 넉넉히 보내고 예장하라" 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동안 정무를 정지하며 애도하지도 않았다. 또한 숙빈의 묘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숙종은 두번이나 최씨를 일반인보다 못한 취급을 한 것도 모자라 명당으로 묘자리를 정해서 올린 사관을 귀양까지 보낸 정도로 매우 감정이 안좋았던 기록이 (숙종 44년 1718년 4월 20일1번째 기사, 숙종44년 1718년 4월 29일 1번째기사) 실록에 그대로 있는데, 이 기록만 보더라도 숙빈에 대한 경계와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영조는 숙빈의 신분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특히 소령원에 있는 기록과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들은 영조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여경방에서 태어났다고 기재한 기록과 어머니의 신분 컴플렉스에 평생동안 시달린 영조가 어머니가 7살에 입궁했다는 내용을 기재한 것도 역사학자들도 고지고대로 믿지 않고 있다. 숙빈을 왕후로 추존하려고 시도하였다가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례만 보더라도 영조는 어머니의 출생과 신분을 상승시키거나 조작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 동시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숙빈은 역대 후궁과는 달리 많은 존호가 붙여져있는데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종의 주장한 침방나인 설도 고종이 영조의 직계후손이라는 이유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사후

숙빈은 병신년(숙종 42, 1716년)에 병환이 들어 사가로 나아가 치료하라는 숙종의 명으로 3년동안 사가에 머물렀다. 그녀는 오래도록 임금과 왕비의 안후를 거르게 됨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졌고, 조금만 차도가 있으면 곧 대궐로 갔다고 한다.[8] 무술년(숙종 44, 1718년) 3월 9일 무오일에 창의동 사가에서 49세로 사망하였다. 세 내전(왕, 왕비, 동궁)에서 중궁의 관원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되 부의가 특별히 두터웠고, 이 해 5월 경신일에 양주의 고령동 옹장리 서쪽 언덕에 예장(禮葬)으로 장사를 지냈다.[8]

그녀의 아들 연잉군왕세제를 거쳐 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이다. 영조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20년(1744년)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 29년(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 또한 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9] 영조 29년 육상궁에 관제(官祭)를 지낸 후, 명나라 효종(孝宗)이 생모를 추존하여 모비(某妣)라 하였다가 다시 황모(皇母)라고 칭한 예에 따라 숙빈은 왕의 사친(私親)이 아닌 선비(先妣)로 정호되었다.[10] 영조는 살아생전 '사친은 항상 소심(小心)하고 신중하였다.'고 자주 회고했다.[11] 영조 49년, 용강의 박흥조가 신문고를 울려 소령원을 능으로 봉하는 일을 청했으나 식량을 주어 쫓아보냈다.[12]

가족관계

본가 해주 최씨(海州 崔氏)

  • 조부 : 증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 판의금 부사 최태일(贈 議政府 左贊成 兼 義禁府 判義禁 府事 崔泰逸)
  • 조모 : 증 정경부인 평강 장씨(贈 貞敬夫人 平康 張氏)
    • 아버지 : 증 의정부 영의정 최효원(贈 議政府 領議政 崔孝元, 1638~1672)
  • 외조부 : 영천군수 증 좌찬성 홍계남(永川郡守 贈 左贊成 洪季男)
  • 외조모 : 증 정경부인 강릉 김씨(贈 貞敬夫人 江陵 金氏)
    • 어머니 : 증 정경부인 남양 홍씨(贈 貞敬夫人 南陽 洪氏)
      • 언니 : 최씨(崔氏)
      • 오빠 : 만호 증 승정원 좌승지 최후(萬戶 贈 承政院 左承旨 崔垕)
      • 올케 : 증 숙부인 순흥 안씨(贈 淑夫人 順興 安氏)

왕가(王家 : 전주 이씨)

관련 작품

서적

  • 김이영 글, 백철 그림,《동이》(2010년, 이가서)
  • 정재인, 김이영, 이병훈 《동이》(2010년, MBC 프로덕션)
  • 이준혁, 《동이》(2010년, 문예춘추사)
  • 김종성, 《최숙빈》(2010년, 부키)

같이 보기

각주

  1. 출처 《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2. 이영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3) 62페이지
  3.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숙빈최씨
  4. 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5.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6. 《조선왕조실록》,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2일(무술) 1번째기사
  7. 《조선왕조실록》, 숙종 27년 신사(1701,강희 40) 9월23일 최종기사
  8.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숙빈최씨 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9. 《조선왕조실록》
  10. 《조선왕조실록》, 영조 80권, 29년(1753 계유 / 청 건륭(乾隆) 18년) 10월 22일(계묘) 1번째기사
  11. 《조선왕조실록》, 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1일(신유) 2번째기사
  12. 《조선왕조실록》, 영조 120권, 49년(1773 계사 / 청 건륭(乾隆) 38년) 윤3월 28일(정해) 2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