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털링 다리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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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7일 (수) 12:45 판

스털링 다리 전투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의 일부

현재의 스털링 다리
날짜1297년 9월 11일
장소
결과 스코틀랜드 승리
교전국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앤드류 데 모레이
윌리엄 월리스
서리 백작 7세 존 데 워렌
휴 데 크레싱햄
병력
기병 300,
보병 10,000명
기병 1,000-3,000,
보병 15,000-50,000명
피해 규모
경미함. 6,000명 전사 혹은 대충 30-40% 사망.

스털링 다리 전투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의 전투이다. 1297년 9월 11일 앤드류 데 모레이(Andrew de Moray)와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가 서리 백작 7세 존 데 워렌(John de Warenne, 7th Earl of Surrey)과 휴 데 크레싱햄(Hugh de Cressingham)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을 스털링 근처 포르스 강(River Forth) 근교에서 격파하였다.


전투

서리는 둔바르 전투(Battle of Dunbar)에서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쉽게 승리를 거두었고, 그는 이제 그의 판단대로 다룰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이나 상대하게 될 것으로 믿었다. 스털링에 있는 작은 다리는 오직 두 명의 기병들이 나란히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스코틀랜드군은 강 북쪽 연안의 부드럽고 평평한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르빈(irvine)에서 항복한 후에 잉글랜드 군에 가담한 스코틀랜드 기사인 리차드 룬디경(Sir Richard Lundie)은 6명의 기병들이 동시에 건널 수 있는 여울을 넘어 기병대를 지휘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에드워드왕의 재무업무를 맡고 있던 크레싱햄은 전쟁이 길어져서 생기는 불필요한 지출을 염려하여, 남작에게 이러한 조언을 무시하고, 다리로 곧장 돌격할 것을 명령했다.

스코틀랜드군은 9월 11일 잉글랜드의 기사들과 보병들이 느린 속도로 다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1296년의 무질서한 스코틀랜드군은 이미 사라져있었고, 월리스와 모레이는 그들의 군대로 하여금 견고한 방어태세를 취하도록 훌륭히 통솔하고 있었다. 많은 수의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궁수들이 다리를 건너려고 했으나, 스코틀랜드군이 이들을 막아내고, 또 서리 백작이 늦잠을 자기도 해서 잉글랜드와 웨일즈 궁수들은 본군으로 소환되었다. 헤임버그 연대기(Chronicle of Hemingburgh)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의 두 지휘관들은 "적의 대군이 몰려들어와 그들이 스코틀랜드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을 때까지" 기다렸다. 4500명의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보병대, 그리고 몇백의 기병대로 구성된 선봉부대가 다리를 건너려고 할 때 공격명령이 내려졌다. 스코틀랜드 창병들은 높은 지대로부터 빠른 속도록 스털링 다리를 향해 내려왔고, 교두보에 대한 잉글랜드군의 주도권을 탈환했다. 서리남작의 전위대는 본대와 분산된 상태가 되었다. 강의 북부에 있던 중무장 기병대들은 남쪽에 있는 분산된 그들의 동료들을 구하려다가 함정에 걸려 분산되었다. 오직 한명의 기사 요크셔 출신의 서 마르마둑 트웽(Marmaduke Tweng)만이 놀라운 평정심을 보여주며, 무수한 창날들을 돌파하며 전투를 벌여 다리를 돌파해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백여명의 기사들은 살해당했고, 그 중에는 살진 휴 데 크레싱햄도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은 크레싱햄의 가죽을 벗겨내고 몸을 조각내어 승리를 기념하는 상징으로 삼았다. 레너코스트 연대기(The Lanercost Chronicle)는 이때 윌리엄 월리스가[1]"뒷발자국 끝에서 잘라낸 크레시암의 가죽 조각의 넓은 부분을 이용하여 칼을 매는데 쓰는 수대를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병대의 피해가 컸는데 그 중에서도 웨일즈 부대의 피해가 더 컸다. 갑옷을 벗을 수 있던 병사들은 간신히 수영을 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장 유능한 전사이자 여전히 만만치 않은 수의 궁병대를 지휘하고 있는 서리 백작은 강의 남쪽에 남아있었고, 아직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병력의 대부분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전방으로 전열을 유지하고 있어서 스코틀랜드군은 승세를 타고 남쪽으로 치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트웽이 도망치는 데 성공한 후에 서리 백작은 스털링 성의 수비병들을 고립된 상태로 남겨두고 스코틀랜드의 저지대를 반역자들의 영향력에 방치해 둔 채 다리의 파괴를 명령한 후 베릭(Berwick)으로 퇴각했다. 스코틀랜드의 하이 스튜어드(High Steward)인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와 레녹스 백작 말콤(Malcolm, Earl of Lennox)은 서리 백작의 군대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다리 북부에서 잉글랜드군이 대패하는 모습을 보고 퇴각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보급 마차들은 숲이 우거진 늪지대인 포우즈(The Pows)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와 다른 스코틀랜드의 영주들에게 공격을 당하였고, 많은 패잔병들이 이들에게 살해당했다.

전투지점은 전투로부터 얼마 후에 새워진 오늘날 스털링 다리의 상류 쪽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전투는 윌리엄 월리스의 중대한 승리의 하나로 끝을 맺었다.


영향

스털링 다리의 전투는 잉글랜드에게 있어서 완벽한 대패였다. 이 전투는 유리한 지형 하에서는 보병이 기병보다 더 유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코틀랜드 군이 유리한 지형에서 보병이 기병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이 교훈을 완벽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이 전투에서 앤드류 데 모레이를 제외한 스코틀랜드군의 사상자는 확실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모레이가 전투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전투 후에서 몇 주간 명목상이나마 윌리엄 월리스와 같이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11월 쯤 패혈증으로 결국 사망하였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1300년 11월 모레이의 삼촌 보드웰의 서 윌리엄 데 모레이(Sir William de Moray of Bothwell)사건의 심문기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앤드류 모레이가 '스털링에서 살해당했다'라는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월리스는 북 잉글랜드에 대하여 파괴적인 공격을 감행하였고, 이 공격이 스코틀랜드 전쟁을 그다지 진전시키지는 못했으나, 그의 군대의 사기에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1298년 3월 그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자(Guardian of Scotland)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월리스가 이런 영광된 지위에 오르자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는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플랑드르에서 북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1298년 여름 폴커크(Falkirk)의 평원에서 마주쳤고, 결국 윌리엄 월리스가 패하였다.


픽션에서 다루어지는 스털링 다리 전투

스털링 다리 전투는 1995년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heart)에서 묘사되었다. 그러나 감독 멜 깁슨(Mel Gibson; 주연 윌리엄 월리스 역할도 맡았다.)은 영화적으로 멋지게 묘사하기 위해 실제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를 채택 하지 않고, 평원에서 전투를 벌인것으로 각색했다.[2]


각주

  1. Chronicle of Lanercost, ed. H.Maxwell, vol.1, p.164.
  2. Director's commentary on the film "Braveheart". Scene 10

참조문헌

  • Barrow, G. W. S., Robert Bruce and the Community of the Realm of Scotland, 1976.
  • Brown, C., "William Wallace" 2005.
  • Ferguson, J., William Wallace: Guardian of Scotland., 1948.
  • "The Chronicle of Lanercost 1272 – 1346", ed. H. Maxwell, 1913.
  • Nicholson, R., Scotland-the Later Middle Ages, 1974.
  • Prestwich, M., The Three Edwards: War and State in England, 1272–1277,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