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 (169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1번째 줄:
'''이종성''' (李宗城, [[1692년]] ∼ [[1759년]]) 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자고, 호는 오천,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다.
'''이종성''' (李宗城, [[1692년]] ∼ [[1759년]]) 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자고, 호는 오천,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조선의 공신|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항복]]의 5세손이며 [[좌의정]] [[이태좌]]의 아들이다.
[[소론]]의 지도자로, [[노론]] [[유척기]] 등과 손잡고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하였다. [[이항복]]의 5세손이며 [[좌의정]] [[이태좌]]의 아들이다.


== 생애 ==
[[조선 숙종|숙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7년]] [[조선 영조|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에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그 후 이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좌의정·영의정 등을 지냈다.
[[조선 숙종|숙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7년]] [[조선 영조|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정자 재직 중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조선의 공신|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듬해에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그 후 이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좌의정·영의정 등을 지냈다.


그는 [[성리학]]에도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재직중 [[장헌세자]]를 한마음으로 잘 보살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적당들이 간계를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저서로 《오천집》이 있다.
그는 [[성리학]]에도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재직중 [[장헌세자]]를 한마음으로 잘 보살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적당들이 간계를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유척기]] 등과 함께 장헌세자의 보호자의 한 사람이었다. 저서로 《오천집》이 있다.

== 저작 ==
* 《오천집》


== 참고 자료 ==
== 참고 자료 ==

2018년 9월 23일 (일) 14:36 판

이종성 (李宗城, 1692년1759년) 은 조선문신이다. 자는 자고, 호는 오천, 본관은 경주이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소론의 지도자로, 노론 유척기 등과 손잡고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하였다. 이항복의 5세손이며 좌의정 이태좌의 아들이다.

생애

숙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7년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정자 재직 중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듬해에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그 후 이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좌의정·영의정 등을 지냈다.

그는 성리학에도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재직중 장헌세자를 한마음으로 잘 보살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적당들이 간계를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유척기 등과 함께 장헌세자의 보호자의 한 사람이었다. 저서로 《오천집》이 있다.

저작

  • 《오천집》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