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 안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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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가 죽은 후에도 문정왕후는 그녀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었고 후사 없이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비 [[인순왕후]]는 안씨의 자손인 하성군을 즉위시켰다.<ref>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8, ISBN 978895091894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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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그녀의 후손들이다.
선조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그녀의 후손들이다.


== 사후 ==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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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 가족 관계 ==

2018년 5월 18일 (금) 14:32 판

창빈 안씨
昌嬪 安氏
창빈 안씨 묘역
창빈 안씨 묘역
추존
신상정보
출생일 1499년 9월 2일(1499-09-02)
출생지 조선 경기도 금천
사망일 1549년 11월 7일(1549-11-07)(50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빈방
국적 조선
배우자 중종
자녀 영양군(아들)
이이수(아들)
정신옹주(딸)
덕흥대원군(아들)
종교 불교

창빈 안씨(昌嬪 安氏, 1499년 ~ 1549년)는 중종의 후궁이다. 덕흥대원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생애

1499년 9월 2일(음력 7월 27일) 금천에서 안탄대의 딸로 태어나, 1507년에 내명부 궁인으로 들어갔다.

뛰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행동이 정숙하고 참신하여[1] 대비 윤씨의 눈에 들어 대비의 후원으로 스무 살에 중종의 승은을 입어[1] 숙용까지 그 지위가 올랐다.

영양군을 1521년에 생산하였고, 정신옹주를 1526년에, 덕흥군을 1530년에 낳았다. 품행이 단정하여 문정왕후와의 사이도 돈독했고, 중종 사후에도 문정왕후의 만류로 인하여 관례대로 승려가 되지 않고 궐 안에 머물렀다. [1]

안씨가 죽은 후에도 문정왕후는 그녀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었고 후사 없이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비 인순왕후는 안씨의 자손인 하성군을 즉위시켰다.[2]

선조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그녀의 후손들이다.

사후

1549년 11월 7일(음력 10월 18일)에 죽어 양주 장흥에 묻혔으나 덕흥대원군이 풍수가들의 말을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장을 하였으며,[3] 손자인 선조가 그녀를 정1품 으로 봉하여 창빈이란 칭호를 올리고 제사를 모셨다.

가족 관계

본가 안산 안씨(安山 安氏)

  • 아버지 : 안탄대(安坦大)
  • 어머니 : 정경부인 황씨(貞敬夫人 黃氏)

왕가(王家 : 전주 이씨)

각주

  1. 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6~117, ISBN 9788950918941
  2. 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8, ISBN 9788950918941
  3. 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9, ISBN 9788950918941

같이 읽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