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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득(李鐵得, [[1780년]] ~ ?)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국사범으로 [[조선 장조]]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였다. [[상계군]] 이담의 이복 동생이고 ,[[풍계군]] 이당의 이복 형이다. 전계대원군 이광의 이복 형이다. [[조선 순조|순조]]의 서 사촌형이다.
이철득(李鐵得, [[1780년]] ~ ?)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국사범으로 [[조선 장조]]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였다. [[상계군]] 이담의 이복 동생이고 ,[[풍계군]] 이당의 이복 형이고, [[전계대원군]] 이광의 이복 형이다. [[조선 순조|순조]]의 서 사촌형이다.


[[1812년]](순조 12) 당시 나이 30대였으나 미혼이었으며, [[1813년]]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자녀가 없었고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에도 조명받지 못하였다.
[[1812년]](순조 12) 당시 나이 30대였으나 미혼이었으며, [[1813년]]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자녀가 없었고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에도 조명받지 못하였다.

2018년 4월 28일 (토) 17:05 판

이철득(李鐵得, 1780년 ~ ?)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국사범으로 조선 장조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였다. 상계군 이담의 이복 동생이고 ,풍계군 이당의 이복 형이고, 전계대원군 이광의 이복 형이다. 순조의 서 사촌형이다.

1812년(순조 12) 당시 나이 30대였으나 미혼이었으며, 1813년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자녀가 없었고 철종 즉위 후에도 조명받지 못하였다.

생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상계군 이담, 이창순, 이창덕의 이복 동생이며 풍계군 이당의 이복 형이었다. 그의 생모가 성득의 생모와 동일인인지 전산군부인 이씨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정조에게는 서조카가 된다 그는 한성부에서 태어났지만 홍국영상계군정조의 양자로 추대하려던 사건으로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족을 따라 강화도로 가서 성장하였다.

한때 그의 이름이 상계군 담의 아명으로 추정되었으나 상계군1786년 의문의 독살은 당했고 그의 이름은 1801년(순조 1) 이후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기사에 등장한다.

비변사등록1812년 2월 강화부로 파견된 금부도사 심노숭(沈魯崇)이 조정에 보고한 보고서에 의하연 그는 당시 만32세였으며, 당시 미혼이었다 한다. 한때 그는 풍계군과도 동일인물로도 추정되었으나 풍계군은 선원록 선원보략에 의하면 1783년생 이라 한다.

1801년(순조 1) 3월 적모 상산군부인 송씨와 적형수 평산군부인 신씨천주교에 귀의한 일로 사사당한 뒤 아버지 은언군 이인도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사사되었다. 그는 천극죄인의 신분이 되어 형제인 이성득, 이당, 이광 등과 함께 강화도의 한 민가에 감금되었다.

1805년 8월 27일 강화도에 이철득, 이성득, 이쾌득이 감금당한 집에 불이 나 강화부유수 오재소(吳載紹)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1]

전산군부인 이씨의 묘비문에 의하면 전산군부인 이씨가 낳은 첫 아들은 요절하였다 하며[2], 그가 이성득의 동복 친동생인지 혹은 전계대원군의 동복 친형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1812년 무렵까지는 생존해 있었는데 덩시까지도 그는 미혼이었다. 1813년 이후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망 장소와 사망 원인은 미상이며 묘소의 위치도 미상이다.

자녀를 남기지 못했고 일찍 사망하여 철종 즉위 후에도 조명받지 못했다.

주석

  1. 승정원일기 1898권 1805년(순조 5년, 청 가경 10년) 8월 29일 기유 19번째 기사
  2. 전계군의 친형, 김포시 통진면 마송리 전산군부인 이씨 묘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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