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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방제'''(崔方濟, ? ~[[1839년]] [[11월 26일]])은 19세기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생이자, [[최양업]]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신학교 동기이다.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마카오]]로 보내져서 공부하다가 병으로 별세하였다. [[피에르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ref>{{저널 인용 |저자=박해진 |날짜=1994 |제목=역사탐방 : 민족혼의 제단에 바친 밀알 - 김대건과 민영환 - |url=http://kiss.kstudy.com/journal/thesis_name.asp?tname=kiss2002&key=1776811 |저널=도시문제 |출판사=대한지방행정공제회 |권=29 |호=302 |doi= |쪽=128|확인날짜=2016-02-13|인용문=조선에서 가까운 北京에 유학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마카오까지 가게 된 데는 모방신부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방신부는 처음부터 北京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그렇게 탐탁스럽게 여지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카톨릭정통의 맥을 이어받지 못하고 어딘가 世俗化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ref>
'''최방제'''(崔方濟, ? ~[[1839년]] [[11월 26일]])은 19세기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생이자, [[최양업]]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신학교 동기이다.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마카오]]로 보내져서 공부하다가 병으로 별세하였다. [[피에르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ref>{{저널 인용 |저자=박해진 |날짜=1994 |제목=역사탐방 : 민족혼의 제단에 바친 밀알 - 김대건과 민영환 - |url=http://kiss.kstudy.com/journal/thesis_name.asp?tname=kiss2002&key=1776811 |저널=도시문제 |출판사=대한지방행정공제회 |권=29 |호=302 |doi= |쪽=128|확인날짜=2016-02-13|인용문=조선에서 가까운 北京에 유학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마카오까지 가게 된 데는 모방신부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방신부는 처음부터 北京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그렇게 탐탁스럽게 여지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카톨릭정통의 맥을 이어받지 못하고 어딘가 世俗化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ref>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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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1일 (토) 19:58 판

최방제(崔方濟, ? ~1839년 11월 26일)은 19세기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생이자, 최양업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신학교 동기이다. 1836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마카오로 보내져서 공부하다가 병으로 별세하였다. 피에르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1]

각주

  1. 박해진 (1994). “역사탐방 : 민족혼의 제단에 바친 밀알 - 김대건과 민영환 -”. 《도시문제》 (대한지방행정공제회) 29 (302): 128. 2016년 2월 13일에 확인함. 조선에서 가까운 北京에 유학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마카오까지 가게 된 데는 모방신부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방신부는 처음부터 北京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그렇게 탐탁스럽게 여지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카톨릭정통의 맥을 이어받지 못하고 어딘가 世俗化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