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토 뤼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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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뤼티는 막후의 중요 인물이 되었다. 뤼티의 사회 정책은 양면적이었다. 뤼티는 [[실업자]] 구제 및 빈민 구호 정책을 반대했다. 그런 한편 강력한 경제로 얻은 이득은 일부 소수가 아닌 인구 전체에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뤼티는 1930년대 말 핀란드의 사회 [[복지]] 정책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체로 뤼티는 사업 및 산업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를 반대했으며, 러시아 제국 시절 러시아화 정책과 핀란드 내전을 거치면서 [[반소주의|반소주의자]]가 되었다.{{sfnp|Turtola|2000|page=407}} 그렇다고 뤼티가 독일식 [[나치즘]]이나 [[라푸아 운동]] 같은 핀란드 자생적 극우정치에 찬동한 것도 아니다. 뤼티는 영미식 자유경제의 찬양자였다.{{sfnp|Turtola|2000|page=408}}
1930년대 뤼티는 막후의 중요 인물이 되었다. 뤼티의 사회 정책은 양면적이었다. 뤼티는 [[실업자]] 구제 및 빈민 구호 정책을 반대했다. 그런 한편 강력한 경제로 얻은 이득은 일부 소수가 아닌 인구 전체에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뤼티는 1930년대 말 핀란드의 사회 [[복지]] 정책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체로 뤼티는 사업 및 산업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를 반대했으며, 러시아 제국 시절 러시아화 정책과 핀란드 내전을 거치면서 [[반소주의|반소주의자]]가 되었다.{{sfnp|Turtola|2000|page=407}} 그렇다고 뤼티가 독일식 [[나치즘]]이나 [[라푸아 운동]] 같은 핀란드 자생적 극우정치에 찬동한 것도 아니다. 뤼티는 영미식 자유경제의 찬양자였다.{{sfnp|Turtola|2000|page=408}}


== 총리 및 대통령 재임 ==
== 총리 재임 ==
뤼티는 [[핀란드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의 [[배이뇌 탄네르]], [[농업동맹]]의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와 신뢰관계를 구축했다. 1939년 가을, 뤼티는 총리직을 제안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11월 30일 [[겨울전쟁]]이 터지면서 받아들였고 12월 1일 취임했다. 뤼티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상황의 현실적 분석에 주력했고 외무장관 탄네르와 이 전쟁이 최대한 빨리 끝나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뤼티와 탄네르는 모두 영어가 유창했고 서방과 가까운 정치인들이었다.{{sfnp|Turtola|2000|page=408}}

전쟁 초기 단계에 소련은 [[테리요키]]에 [[핀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고 뤼티-탄네르 내각과는 대화 창구를 닫아버렸다. 1939년 12월에서 1940년 1월 사이 핀란드 육군은 결사적으로 방어전에 임해 전술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외교적 협상의 여지를 마련했다. 결국 소련은 테리요키 괴뢰정부를 버리고 [[스톡홀름]]을 통해 핀란드와 협상을 모색했다. 영불 서방 연합국이 전쟁에 개입하려는 낌새를 보인 것도 소련이 협상에 나선 요인이기도 했다.{{sfnp|Turtola|2000|page=409}} 뤼티는 다른 각료들을 설득해 1940년 3월 13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으로 핀란드는 영토의 5분의 1을 소련에게 빼앗겼고, 그 빼앗긴 땅에 살던 카리알라인 40만 여명은 난민 신세가 되었다.

[[File:Ryti descends from the parliament building.jpg|thumb|1940년 12월 19일 취임 선서를 하고 홀로 의회를 나오는 뤼티. 뤼티의 전임자 칼리오가 같은 날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뤼티는 그 전임자 [[아이모 카얀데르]]에 비해 유능한 총리임을 입증했다. 8월, 칼리오 대통령이 [[뇌졸중]]을 일으켜 와병하면서 국무는 총리 뤼티와 군부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만네르헤임 원수]], 기업가이자 장군 [[루돌프 발덴]], 그리고 외무장관 탄네르가 도맡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조약을 주도했던 뤼티는 유력한 다음 대통령 후보로 부상했다.{{sfnp|Turtola|2000|page=409}}

카리알라 난민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는 문제 등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기에 대통령 간접선거인단 선거도 따로 열리지 못했고, 수정헌법이 가결되어 의회의원들이 대통령 선거인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7년 의회에서 열린 간접선거 결과 뤼티가 칼리오의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득표수는 총 300표 중 288표였다.

1940년 12월 19일, 칼리오는 퇴임 전 마지막으로 군사 사열식에 참여했다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했고, 뤼티가 대통령직에 올랐다.{{sfnp|Turtola|2000|page=410}}


== 말년 ==
== 말년 ==

2017년 8월 7일 (월) 18:20 판

리스토 헤이키 뤼티
Risto Heikki Ryti
핀란드의 기 핀란드총리
랑겔
링코미에스
임기 1939년 12월 1일 – 1940년 12월 19일
전임 아이모 카얀데르
후임 유카 랑겔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공화국 대통령
임기 1940년 12월 19일 – 1944년 8월 4일
전임 퀴외스티 칼리오
후임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남작
총리 루돌프 발덴
요한 빌헬름 랑겔
에드빈 링코미에스

신상정보
출생일 1889년 2월 3일(1889-02-03)
출생지 핀란드 후이티넨
사망일 1956년 10월 25일(1956-10-25)(67세)
사망지 핀란드 헬싱키
학력 헬싱키 대학교 법학석사
정당 국민진보당
종교 신지학
상훈

리스토 헤이키 뤼티(핀란드어: Risto Heikki Ryti [risto heikːi ryti][*]: 1889년 2월 3일 – 1956년 10월 25일)는 핀란드정치가이다. 겨울전쟁 당시 총리를, 계속전쟁 당시 대통령을 역임했다. 전후 핀란드 전쟁책임 재판의 주요 피고로 기소되었다.

초기 생애

사타쿤타 후이티넨에서 7형제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농부 카를레 에베르트 뤼티(Kaarle Evert Ryti)이고 무친은 이다 비비카 윤틸라(Ida Vivika Junttila)였다. 본래 소농 집안이었으나 뤼티의 유년기 즈음에는 살림이 펴서 뤼티는 가족의 대농장 일을 거들면서 책과 학문을 탐구하며 자랐다.[1] 포리 문법학교에서 잠시 배운 뒤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다가 1906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했다. 뤼티 이외에 형제들은 대학 입학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누이 세 명은 입학했다.[2]

뤼티 1909년 가을 대학을 졸업했다. 이때는 제2차 러시아화 정책이 실행중이던 기간으로, 수도 헬싱키의 정치적 기류가 요동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피해 뤼티는 고향 사타쿤타로 돌아가 라우마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 시기 핀란드 제일의 갑부인 알프레드 코르델린을 알게 되었다. 뤼티는 코르델린의 변호사가 되었고,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2] 또 이 시기에 공부를 계속하여 1912년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14년 옥스포드 대학교로 가서 해사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 와중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핀란드로 귀국했다. 1916년 게르다 파울라 세를라키우스(Gerda Paula Serlachius, 1886년–1984년)와 결혼했다.[3] 뤼티 부부는 슬하에 헨리크(1916년-2002년), 닐로(1919년–1997년), 에바(1922년–2009년) 세 자녀를 두었다.

1차대전 개전에서 핀란드 독립에 이르는 사이의 기간 동안 뤼티는 코르델린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었고, 코르델린이 뤼티에게 자기 사업의 총괄 관리자가 되어줄 것을 제안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1917년 11월 코르델린은 러시아 볼셰비키들에게 살해당했다.[3]

초기 정치 경력

뤼티가 1918년-1935년에 살았던 집.

1918년 핀란드 내전이 터지자 뤼티는 어느 한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적군이 장악한 헬싱키에서 지하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내전 이후 뤼티는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 1919년 국민진보당 소속으로 의회의원에 선출되었는데, 당시 나이 30살로 의원들 중 두 번째로 어렸다. 같은 해, 국민진보당 동료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가 초대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3] 뤼티는 1919년-1924년, 1927년-1929년 의회의원을 역임했다. 의원으로서 법무위원회, 재무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24년-1927년에는 헬싱키 시 평의회 평의원을 역임했다.

핀란드 역사학자 마르티 투르톨라(Martti Turtola)에 따르면, 뤼티의 이른 정치적 성공은 뤼티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적 성향이 내전 직후 잘 먹히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민진보당이 군소정당으로 쪼그라드는 와중에도 뤼티 개인은 정치적으로 계속 성공했는데, 이는 뤼티가 경제 전문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 공직자 위치를 자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4]

1921년, 32살의 뤼티는 유호 벤놀라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입각했다. 1924년까지 재무장관직을 두 차례 연임했다. 1923년에는 스톨베리 대통령이 뤼티를 핀란드 국립은행 총재로 임명했다.[5] 뤼티는 1939년 총리에 취임하기 전까지 국립은행 총재직을 유지했다. 은행 총재로서의 역할은 1924년 1월 재무장관직을 사임한 뒤부터 실질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정치생활 초기 시기 뤼티는 관청 회계를 바로잡는 데 성공했다. 뤼티는 스톨베리파였지만 적핀란드 가담자들을 사면하는 것에 반대했다. 뤼티가 보기에 적군 가담자들은 범죄자들이었고, 그는 핀란드 내전의 사회적 원인을 직시하기를 거부했다.[3]

1925년, 뤼티는 36세의 나이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2차 투표에서 뤼티는 가장 많은 지지표를 모았지만 3차 결선투표에서 스웨덴 인민당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를 지지하면서 캐스팅보트가 기울었다. 뤼티는 109대 172로 렐란데르에게 패배했다.[6] 1930년대 뤼티는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나고 대신 경제 정책에 영향을 발휘했다. 뤼티는 고전자유주의 경제학의 철저한 지지자였다. 뤼티는 핀란드 마르카금태환화폐로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뤼티가 경제정책을 주도하던 당시 핀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물가하락책을 선택하지 않았고, 1926년 금마르카의 가치를 대폭 절상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핀란드는 영국이 그랬듯이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6]

1920년대에 뤼티는 스칸디나비아와 영국, 미국의 은행업계 간에 국제 접점을 마련했다.[7] 월스트리트 저널은 뤼티의 정책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고, 1934년에는 영국-핀란드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로열 빅토리아 훈장 기사사령관장을 수훈받았다. 뤼티는 영란은행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대공황 이전까지 금본위제를 고집한 정책적 공통점 등과 뤼티 개인의 탁월한 영어 실력이 그 바탕이 되었다. 뤼티는 영란은행 중역들과 정기적으로 통화하면서 경제 및 재무 정책을 논의했다. 뤼티는 국제연맹에서도 경제문제와 통화정책에 관한 여러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7]

1930년대 뤼티는 막후의 중요 인물이 되었다. 뤼티의 사회 정책은 양면적이었다. 뤼티는 실업자 구제 및 빈민 구호 정책을 반대했다. 그런 한편 강력한 경제로 얻은 이득은 일부 소수가 아닌 인구 전체에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뤼티는 1930년대 말 핀란드의 사회 복지 정책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체로 뤼티는 사업 및 산업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를 반대했으며, 러시아 제국 시절 러시아화 정책과 핀란드 내전을 거치면서 반소주의자가 되었다.[7] 그렇다고 뤼티가 독일식 나치즘이나 라푸아 운동 같은 핀란드 자생적 극우정치에 찬동한 것도 아니다. 뤼티는 영미식 자유경제의 찬양자였다.[8]

총리 재임

뤼티는 사회민주당배이뇌 탄네르, 농업동맹의 대통령 퀴외스티 칼리오와 신뢰관계를 구축했다. 1939년 가을, 뤼티는 총리직을 제안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11월 30일 겨울전쟁이 터지면서 받아들였고 12월 1일 취임했다. 뤼티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상황의 현실적 분석에 주력했고 외무장관 탄네르와 이 전쟁이 최대한 빨리 끝나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뤼티와 탄네르는 모두 영어가 유창했고 서방과 가까운 정치인들이었다.[8]

전쟁 초기 단계에 소련은 테리요키핀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고 뤼티-탄네르 내각과는 대화 창구를 닫아버렸다. 1939년 12월에서 1940년 1월 사이 핀란드 육군은 결사적으로 방어전에 임해 전술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외교적 협상의 여지를 마련했다. 결국 소련은 테리요키 괴뢰정부를 버리고 스톡홀름을 통해 핀란드와 협상을 모색했다. 영불 서방 연합국이 전쟁에 개입하려는 낌새를 보인 것도 소련이 협상에 나선 요인이기도 했다.[9] 뤼티는 다른 각료들을 설득해 1940년 3월 13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으로 핀란드는 영토의 5분의 1을 소련에게 빼앗겼고, 그 빼앗긴 땅에 살던 카리알라인 40만 여명은 난민 신세가 되었다.

1940년 12월 19일 취임 선서를 하고 홀로 의회를 나오는 뤼티. 뤼티의 전임자 칼리오가 같은 날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뤼티는 그 전임자 아이모 카얀데르에 비해 유능한 총리임을 입증했다. 8월, 칼리오 대통령이 뇌졸중을 일으켜 와병하면서 국무는 총리 뤼티와 군부의 만네르헤임 원수, 기업가이자 장군 루돌프 발덴, 그리고 외무장관 탄네르가 도맡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조약을 주도했던 뤼티는 유력한 다음 대통령 후보로 부상했다.[9]

카리알라 난민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는 문제 등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기에 대통령 간접선거인단 선거도 따로 열리지 못했고, 수정헌법이 가결되어 의회의원들이 대통령 선거인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7년 의회에서 열린 간접선거 결과 뤼티가 칼리오의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득표수는 총 300표 중 288표였다.

1940년 12월 19일, 칼리오는 퇴임 전 마지막으로 군사 사열식에 참여했다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했고, 뤼티가 대통령직에 올랐다.[10]

말년

개인사

각주

  1. Turtola (2000), 403쪽.
  2. Turtola (2000), 404쪽.
  3. Turtola (2000), 405쪽.
  4. Martti Turtola, "Risto Ryti: A Life for the Fatherland"
  5. “Board Members in the history of the Bank of Finland”. Bank of Finland. 
  6. Turtola (2000), 406쪽.
  7. Turtola (2000), 407쪽.
  8. Turtola (2000), 408쪽.
  9. Turtola (2000), 409쪽.
  10. Turtola (2000), 410쪽.
전임
아이모 카얀데르
제14대 핀란드의 총리
1939년 12월 1일 – 1940년 12월 19일
후임
유카 랑겔
전임
퀴외스티 칼리오
제5대 핀란드 공화국 대통령
1940년 12월 19일 – 1944년 8월 4일
후임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