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인노첸시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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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6년 로타르 3세가 2차 원정을 감행했으나 이번에도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인노첸시오와 아나클레토 간의 오랜 분쟁은 1138년 1월 25일 아나클레토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1136년 로타르 3세가 2차 원정을 감행했으나 이번에도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인노첸시오와 아나클레토 간의 오랜 분쟁은 1138년 1월 25일 아나클레토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Image:B Innozenz II1.jpg|thumb|left|1140-1143년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재건축된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의 모자이크화. 교황이 성당의 모형을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왼쪽에는 성 라우렌시오와 성 갈리스토가 있다.]]
[[Image:B Innozenz II1.jpg|thumb|left|1140-1143년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개축된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의 모자이크화. 교황이 성당의 모형을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왼쪽에는 성 라우렌시오와 성 갈리스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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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
1139년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를 지지했던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가 [[파문]]되면서 마침내 교회는 평화를 되찾았다.
1139년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를 지지했던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가 [[파문]]되면서 마침내 교회는 평화를 되찾았다. 인노첸시오 2세의 남은 재위기간은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을 완전개 개축한 것 외에는 특별히 업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


== 생애 ==
== 생애 ==

2017년 8월 5일 (토) 12:47 판

인노첸시오 2세
전임자호노리오 2세
후임자첼레스티노 2세

교황 인노첸시오 2세(라틴어: Innocent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II)는 제164대 교황(재위: 1130년 2월 14일 ~ 1143년 9월 24일)이다. 본명은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이탈리아어: Gregorio Papareschi)이다. 그의 선출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재임 첫 8년은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 2세의 지지자들에 맞서 교황으로서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대립 교황에 맞서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와 의견의 일치를 보면서 그의 지지를 얻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주재하였다.

초기 삶

파파레스키는 트라스테베레 구역의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그는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라벤나의 길베르트)를 개인적으로 수행한 성직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 파스칼 2세는 그를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교황 젤라시오 2세와 동행하여 프랑스로 건너갔다.[1] 그는 교황 갈리스토 2세로부터 각종 요직을 두루 거치며 여러가지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보름스 협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보름스로 교황 사절로 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112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의 평화 협정을, 1123년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교황 사절로 파견되었다.

교황 선출

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가 선종한 순간 추기경단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분열을 막기 위하여 추기경들은 교황청 상서국장 아이메릭에 의해 구성된 8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에게 교황 선거를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노년층이 추기경단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젊은 층은 위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 내적 쇄신을 추구하던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 추기경이 다섯 표를 얻고 서둘러 선출되어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되었다.[2] 그는 호노리오 2세의 선종 후 다음날인 2월 14일에 교황으로 정식 등극하였고 젊은 추기경들이 환호로써 맞이하였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많은데다가 변혁을 두려워하던 노년층은 이에 불응하여, 아이메릭의 반대자였던 가문인 프란지파니 출신의 피에트로 피에르레오니 추기경을 선출하였다. 피에르레오니는 스스로 아나클레토 2세라고 자처하였다. 이리하여 극심한 분열이 일어났다. 쌍방이 추기경단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해졌다. 아나클레토의 지지자들은 로마를 장악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세력이 뭉쳐 강대했기 때문에 인노첸시오 2세는 하는 수 없이 북쪽으로 피신하는 수 밖에 없었다.

교황

아나클레토가 로마를 손아귀에 넣자 인노첸시오 2세는 피사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 후 제노바를 거쳐 프랑스로 항해하였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프랑스 여론을 움직여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으로 받들도록 종용하였다. 같은 해 10월 그는 뷔르츠부르크 시노드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주교들로부터 교황으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1131년 1월 인노첸시오 2세는 잉글랜드의 헨리 1세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1132년 8월 로타르 3세는 아나클레토를 몰아내고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황제 대관식을 받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이탈리아 원정 계획에 착수하였다.

아나클레토와 그의 지지자들이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결사적으로 농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로타르 3세의 황제 대관식은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치를 수 밖에 없었다(1133년 6월 4일). 그 이외에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황제는 교황좌의 봉신이라는 교황청파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황제로 등극한 로타르는 교황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대가로 토스카나의 마틸데의 영토를 얻었다.[3] 로타르 3세가 독일로 떠나자 인노첸시오 2세도 로마를 재차 떠나야만 하였다.

1136년 로타르 3세가 2차 원정을 감행했으나 이번에도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인노첸시오와 아나클레토 간의 오랜 분쟁은 1138년 1월 25일 아나클레토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1140-1143년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개축된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의 모자이크화. 교황이 성당의 모형을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왼쪽에는 성 라우렌시오와 성 갈리스토가 있다.


인노첸시오 2세는 자신의 조카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와 동생 피에트로 파파레스키를 각각 1134년과 1142년에 추기경에 서임하였다.[4] 또 다른 조카 킨조 파파레스키 역시 인노첸시오 사후 1158년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5]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

1139년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를 지지했던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파문되면서 마침내 교회는 평화를 되찾았다. 인노첸시오 2세의 남은 재위기간은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을 완전개 개축한 것 외에는 특별히 업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생애

로마 태생으로 1116년에 추기경이 되어 프랑스에 두 차례 사절로 파견되어 보름스의 정교 협정을 성사시키는 데 협력하였다. 그는 세속 국가들이 교회의 독립을 허용할 경우 그들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를 포함한 젊은 추기경들은 그 평화가 교회의 영적 쇄신의 수단이 된다고 보았다. 연만한 추기경들은 교회의 쇄신을 법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고 세속 군주들과의 타협을 반대하고 로마인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대립 교황 아나클레토)를 지도자로 생각하였다. 피에트로는 파리 시에서 교육을 받고 클뤼니 수도원수사가 되어 교황 파스칼 2세에 의해 추기경이 된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호노리오 2세의 임종 순간부터 추기경단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분열을 막기 위하여 8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이 구성되었다. 노년층이 추기경단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젊은 층은 위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투표장이 피에를레오니 가문을 반대하는 가문의 요새 근처로 선정되자 피에트로는 위원회를 떠나버렸고 호노리오 2세가 선종하였다는 거짓 보도가 나돌자 피에를레오니 가문은 폭동을 일으켰다. 호노리오 2세가 1130년 2월 13일 선종하자 교황청 상서국장이던 아이메리크 추기경은 피에를레오니 가문의 반란을 두려워하며 호노리오 2세의 장례식을 급히 치르고 콘클라베를 서둘렀다. 2월 14일 추기경 위원 다섯 명이 그레고리오를 선출하여 인노첸시오 2세라고 명명하자 젊은 추기경들이 환호로써 맞이하였다. 숫자적으로 많은 노년층은 피에트로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리하여 극심한 분열이 일어났다. 두 후보자는 모두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고 있었고 쌍방이 추기경단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해졌다. 인노첸시오 2세는 강제로 로마를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의 대다수의 반응은 교회의 영적인 쇄신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1130년 9월 에탕프 공의회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프랑스를 움직여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으로 받들도록 종용하였다. 크산텐의 노르베르토는 신성 로마 제국을 설득하였고 베르나르도는 잉글랜드 왕국을 설득하여 1131년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으로 공표하게 하였다.

한편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의 지지자들은 노쇠한 추기경들과 주로 그의 도움으로 이 된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였다. 인노첸시오 2세는 독일의 군주 로타르 3세에게 이탈리아로 원정하여 이들을 대항하도록 청했으나 보름스의 정교 협정과 연관 짓고 싶지 않아 원정을 거절하였다. 1133년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에서 로타르 3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로타르 3세가 이탈리아를 떠나자 인노첸시오 2세도 로마를 재차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자 로타르 3세가 1136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인노첸시오 2세와 관할권을 놓고 분쟁을 해 오던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하였다. 이런 와중에 피에트로가 1138년 1월 25일 죽자 루지에로 2세는 다른 대립 교황을 세워 그가 포기할 때까지 그를 지원하였으나 1139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가 열려 그 분열은 종식되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피신 중에 루지에로 2세에게 사로잡혔으나 쌍방은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였다.

주석

  1.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vol. 5, s.v. "Onnocent II" (on-line text).
  2. The Historia Compostelana, composed in Galicia (Spain) for the bishop of Santiago de Compostela, provides information on the details of the disputed election of 1130.
  3. Schaff-Herzog, ibid.
  4. Miranda, Salvator. 1998. "12th Century (1099–1198)."
  5. Miranda, Salvator. 1998. "12th Century (1099–1198)."
전임
호노리오 2세
제164대 교황
1130년 2월 14일 ~ 1143년 9월 24일
후임
첼레스티노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