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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일 (월) 00:46 판

김억(金億, 일본식 이름: 岸曙生, 1896년 11월 30일 ~ ?)은 한국의 시인이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며, 호를 따라 김안서(金岸曙)로도 종종 불린다.

생애

평안북도 곽산 출신이다. 1907년 인근 정주군오산학교에 입학해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의 제자로, 김억의 지도를 받았다. 1922년 김소월을 처음 문단에 소개한 사람도 스승 김억이다.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평양숭실학교 교사를 지냈고,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김억은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있다.[1]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민족문제연구소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고, 북조선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2]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시집으로 번역 시집인 《오뇌의 무도》(1921)와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봄의 노래》(1925), 《먼동 틀 제》(1947), 《민요시집》(1948)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오뇌의 무도》는 최초의 번역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기록되어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같이 보기

참고자료

  • 백운복. 《우리 현대시의 이해》. 서울: 국학자료원. 65쪽쪽. ISBN 8982064311. 
  • 권영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49쪽쪽. ISBN 8952104617. 

주석

  1. 김재용. “친일문학 작품목록”. 《실천문학》 (67호): 123~148쪽. 
  2. 625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 납북인사 명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