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망: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전언겸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태그: 삭제 신청
전언겸 (토론 | 기여)
새 문서: '''김공망'''(金公望, 1482년 ~ 1528년 7월 14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위수(渭叟), 본관은 안동(...
1번째 줄: 1번째 줄:
'''김공망'''(金公望, [[1482년]] ~ [[1528년]] [[음력 7월 14일|7월 14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위수(渭), 본관은 [[안동 김씨|안동]](安東)이다. [[김영후 (고려)|김영후]](金永煦)의 8대손이다.
{{삭제 신청|참고 자료가 각주로 표시되지 않음. 재작성을 위해 삭제 신청함.}}

'''김공망'''(金公望, [[1482년]] ~ [[152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위수(渭), 본관은 [[안동 김씨|(구)안동]]이다. 오위부장(五衛副將) [[김성]](城)의 아들로,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인이다.


== 생애 ==
== 생애 ==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일찍 아버지 상을 당한 후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심원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06년(중종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임용되었다.

사간원,사헌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12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1506년]](연산군 12)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주서(注書), 전적(典籍), 교검(校檢), 공조좌랑(工曹佐郞), 형조좌랑(刑曹佐郞), 호조좌랑(戶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차례로 거쳤다.<ref name=a>『김공망 묘갈명』</ref>
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어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심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5년 동안 선정을 베푼 뒤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문장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1511년]](중종 6)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다가<ref name=b>『중종실록』</ref>, 이후 강원도사(江原都事), 공조정랑(工曹正郞),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쳤다.<ref name=a/>

[[1515년]](중종 10) 채세걸(蔡世傑)과 함께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자, [[강릉]](江陵)의 품관(品官)들이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금하도록 아뢰었다.

[[1518년]](중종 13) 장령(掌令)으로 임명되었으나, 다른 [[사헌부]](司憲府) 관원들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이후,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쳤다가 [[1521년]](중종 16)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옮겼으나, 사헌부의 청으로 잉임(仍任)되었다.<ref name=b/>

같은 해 자신의 청원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으나, 어머니 상을 당했으므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상(執喪)했다.

[[1523년]](중종 18) 삼년상을 마치고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거쳤으며, 이후 사도시정(司導寺正)으로서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는데, 이 때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5년째 되던 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1528년]](중종 23) 47세로 졸했다.<ref name=a/>

== 가족 관계 ==
'''※'''본인의 묘갈명에 근거했다.
* 증조 - 김환(金丸) :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김영후 (고려)|김영후]](金永煦, [[1292년]] ~ [[1361년]])의 5대손
** 조부 - 김종손(金宗孫) : 감찰(監察),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 아버지 - 김성(金城) : 충무위중부장(忠武衛中部將), 증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 어머니 - 별좌(別坐) 임치(任治)의 딸
**** 형 - 김공량(金公亮, [[1472년]] ~ [[1544년]]) : 증 이조판서(吏曹判書)·안원군(安原君), [[김주]](金澍, [[1512년]] ~ [[1563년]])의 아버지
**** 형 - [[김공석]](金公奭, [[1477년]] ~ [[1553년]]) : 청홍도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
**** 부인 -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이복형(李復亨)의 딸
***** 장남 - 김순(金淳) :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
***** 차남 - 김이(金洢, [[1515년]] ~ [[1580년]]) : 당진현감(唐津縣監)
***** 3남 - 김운(金沄)
***** 4남 - 김준(金浚)
***** 사위 - 조섬(趙銛)


== 가족관계 ==
== 각주 ==
<references/>
* 선조: [[김방경]]
* 5대조: [[김사렴]](金士廉)
* 고조부: 김약
* 증조부: 김우주(金遇周) (?~1444)
** 조부: [[김종손]] (金宗孫)
*** 부친: [[김성]] (金城)
**** 형: 안원군 [[김공량]] (金公亮)
***** 조카: 화산군 문단공 [[김주 (조선의 문신)|김주]] (金澍)
**** 형: [[김공석]] (金公奭) (1477~1553)


[[분류:1482년 태어남]]
[[분류:1482년 태어남]]

2017년 2월 13일 (월) 20:58 판

김공망(金公望, 1482년 ~ 1528년 7월 14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위수(渭叟),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김영후(金永煦)의 8대손이다.

생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일찍 아버지 상을 당한 후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06년(연산군 12)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주서(注書), 전적(典籍), 교검(校檢), 공조좌랑(工曹佐郞), 형조좌랑(刑曹佐郞), 호조좌랑(戶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차례로 거쳤다.[1]

1511년(중종 6)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다가[2], 이후 강원도사(江原都事), 공조정랑(工曹正郞),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쳤다.[1]

1515년(중종 10) 채세걸(蔡世傑)과 함께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자, 강릉(江陵)의 품관(品官)들이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금하도록 아뢰었다.

1518년(중종 13) 장령(掌令)으로 임명되었으나, 다른 사헌부(司憲府) 관원들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이후,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쳤다가 1521년(중종 16)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옮겼으나, 사헌부의 청으로 잉임(仍任)되었다.[2]

같은 해 자신의 청원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으나, 어머니 상을 당했으므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상(執喪)했다.

1523년(중종 18) 삼년상을 마치고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거쳤으며, 이후 사도시정(司導寺正)으로서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는데, 이 때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5년째 되던 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1528년(중종 23) 47세로 졸했다.[1]

가족 관계

본인의 묘갈명에 근거했다.

  • 증조 - 김환(金丸) :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김영후(金永煦, 1292년 ~ 1361년)의 5대손
    • 조부 - 김종손(金宗孫) : 감찰(監察),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 아버지 - 김성(金城) : 충무위중부장(忠武衛中部將), 증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 어머니 - 별좌(別坐) 임치(任治)의 딸
        • 형 - 김공량(金公亮, 1472년 ~ 1544년) : 증 이조판서(吏曹判書)·안원군(安原君), 김주(金澍, 1512년 ~ 1563년)의 아버지
        • 형 - 김공석(金公奭, 1477년 ~ 1553년) : 청홍도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
        • 부인 -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이복형(李復亨)의 딸
          • 장남 - 김순(金淳) :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
          • 차남 - 김이(金洢, 1515년 ~ 1580년) : 당진현감(唐津縣監)
          • 3남 - 김운(金沄)
          • 4남 - 김준(金浚)
          • 사위 - 조섬(趙銛)

각주

  1. 『김공망 묘갈명』
  2. 『중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