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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 생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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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일찍 아버지 상을 당한 후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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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원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06년(중종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임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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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사헌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12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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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연산군 12)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주서(注書), 전적(典籍), 교검(校檢), 공조좌랑(工曹佐郞), 형조좌랑(刑曹佐郞), 호조좌랑(戶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차례로 거쳤다.<ref name=a>『김공망 묘갈명』</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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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어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심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5년 동안 선정을 베푼 뒤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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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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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년]](중종 6)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다가<ref name=b>『중종실록』</ref>, 이후 강원도사(江原都事), 공조정랑(工曹正郞),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쳤다.<ref nam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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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년]](중종 10) 채세걸(蔡世傑)과 함께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자, [[강릉]](江陵)의 품관(品官)들이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금하도록 아뢰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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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년]](중종 13) 장령(掌令)으로 임명되었으나, 다른 [[사헌부]](司憲府) 관원들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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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쳤다가 [[1521년]](중종 16)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옮겼으나, 사헌부의 청으로 잉임(仍任)되었다.<ref name=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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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자신의 청원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으나, 어머니 상을 당했으므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상(執喪)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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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년]](중종 18) 삼년상을 마치고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거쳤으며, 이후 사도시정(司導寺正)으로서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는데, 이 때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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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째 되던 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1528년]](중종 23) 47세로 졸했다.<ref nam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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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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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묘갈명에 근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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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조 - 김환(金丸) :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김영후 (고려)|김영후]](金永煦, [[1292년]] ~ [[1361년]])의 5대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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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부 - 김종손(金宗孫) : 감찰(監察),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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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김성(金城) : 충무위중부장(忠武衛中部將), 증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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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별좌(別坐) 임치(任治)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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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 김공량(金公亮, [[1472년]] ~ [[1544년]]) : 증 이조판서(吏曹判書)·안원군(安原君), [[김주]](金澍, [[1512년]] ~ [[1563년]])의 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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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 [[김공석]](金公奭, [[1477년]] ~ [[1553년]]) : 청홍도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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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이복형(李復亨)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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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남 - 김순(金淳) :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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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남 - 김이(金洢, [[1515년]] ~ [[1580년]]) : 당진현감(唐津縣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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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남 - 김운(金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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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남 - 김준(金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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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위 - 조섬(趙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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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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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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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김방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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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대조: [[김사렴]](金士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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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부: 김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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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조부: 김우주(金遇周) (?~1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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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부: [[김종손]] (金宗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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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친: [[김성]] (金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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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안원군 [[김공량]] (金公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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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카: 화산군 문단공 [[김주 (조선의 문신)|김주]] (金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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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김공석]] (金公奭) (1477~1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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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482년 태어남]] |
[[분류:1482년 태어남]] |
2017년 2월 13일 (월) 20:58 판
김공망(金公望, 1482년 ~ 1528년 7월 14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위수(渭叟),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김영후(金永煦)의 8대손이다.
생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일찍 아버지 상을 당한 후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06년(연산군 12)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주서(注書), 전적(典籍), 교검(校檢), 공조좌랑(工曹佐郞), 형조좌랑(刑曹佐郞), 호조좌랑(戶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차례로 거쳤다.[1]
1511년(중종 6)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다가[2], 이후 강원도사(江原都事), 공조정랑(工曹正郞),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쳤다.[1]
1515년(중종 10) 채세걸(蔡世傑)과 함께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자, 강릉(江陵)의 품관(品官)들이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금하도록 아뢰었다.
1518년(중종 13) 장령(掌令)으로 임명되었으나, 다른 사헌부(司憲府) 관원들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이후,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쳤다가 1521년(중종 16)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옮겼으나, 사헌부의 청으로 잉임(仍任)되었다.[2]
같은 해 자신의 청원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으나, 어머니 상을 당했으므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상(執喪)했다.
1523년(중종 18) 삼년상을 마치고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거쳤으며, 이후 사도시정(司導寺正)으로서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는데, 이 때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5년째 되던 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1528년(중종 23) 47세로 졸했다.[1]
가족 관계
※본인의 묘갈명에 근거했다.
- 증조 - 김환(金丸) :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김영후(金永煦, 1292년 ~ 1361년)의 5대손
- 조부 - 김종손(金宗孫) : 감찰(監察),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 아버지 - 김성(金城) : 충무위중부장(忠武衛中部將), 증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 어머니 - 별좌(別坐) 임치(任治)의 딸
- 조부 - 김종손(金宗孫) : 감찰(監察),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