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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해방 후==
[[파일:朱德海同志紀念碑.jpg|섬네일|주덕해동지기념비(연길시)]]
1949년 3월 중공연변지위서기, 4월 연변대학 교장, 5월 연변공서전원을 겸임했고 1952년 9월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주석에 취임했다. 1954년 9월에 중공길림성당위 상무위원과 성정부 부성장 역임하고 1955년에 중공연변주당위 제1서기 겸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으로 임명됐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49년 3월 중공연변지위서기, 4월 연변대학 교장, 5월 연변공서전원을 겸임했고 1952년 9월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주석에 취임했다. 1954년 9월에 중공길림성당위 상무위원과 성정부 부성장 역임하고 1955년에 중공연변주당위 제1서기 겸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으로 임명됐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었다.



2017년 2월 4일 (토) 01:00 판

주덕해(朱德海, 1911년 3월 ~ 1972년 7월 3일)의 본명은 오기섭(吳基涉)이며 중국공산당에 참여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참전하였다. 중국 연변 조선민족 자치구의 초대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박해를 받고 병사하였다.[1]

해방 후

주덕해동지기념비(연길시)

1949년 3월 중공연변지위서기, 4월 연변대학 교장, 5월 연변공서전원을 겸임했고 1952년 9월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주석에 취임했다. 1954년 9월에 중공길림성당위 상무위원과 성정부 부성장 역임하고 1955년에 중공연변주당위 제1서기 겸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으로 임명됐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었다.

죽음

문화대혁명 기간 중 지방민족주의분자로 지목되어 박해를 받고 병사하였다.[2] 1986년 7월 3일 서거 14돌을 맞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시 중심의 인민공원에는 20m 높이의 기념비 가 세워졌다. 호요방이 건립을 지시하고, 직접 비명을 썼다.

1972년 7월 3일 저녁 9시 10분 영면. 그의 유서에 "저는 연변에 돌아가겠습니다" 이 한마디가 적혀있었다고 전해짐.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