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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시기 ='''인민사원'''(人民寺院, {{lang|en|Peoples Temple}})은 [[1978년]] [[11월 18일]]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일어난 [[집단 자살]]로 널리 알려진 준종교 집단이다. [[1953년]] [[짐 존스]] 교주가 [[미국]]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에 세운 예배당(사원)이 그 시초이다. 존스 목사의 기괴한 행위와 신도들의 집단자살로 인하여 사이비종교의 반(反)사회성을 보여주는 대표사례로 언급된다.<ref name=autogenerated1>《설득의 심리학》({{lang|en|''Influence:Scinence and Practice,4th Edition''}})-불확실성과 유사성이 빚어낸 인민사원의 집단자살/로버트 치알디니 저/이현우 옮김/21세기 북스, 218~224쪽.</ref>

있고, 그의 기적 치유는 조작이며, 신도들을 폭행하고, [[남성]] 신도와 변태 성행위를 하고, 이젠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폭로가 이어지자, [[신문]]기자, 관계당국, [[정치]]가들이 존스 교주의 예배당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짐 존스는 연설을 통해 탈퇴자들이 거짓 증언을 일삼고 있으며 바깥 세상이 자신들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라고 주장했지만, 점점 더 많은 탈퇴신도들에 의해 인민사원에서 일어나는 폭행과 학대 사례가 폭로되었으며, 신도의 일가친척들은 존스 목사가 신도들의 탈퇴를 신도의 의지에 반하여 [[폭력]]으로 봉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가이아나의 존스타운 ===
====강제노동====
미국내의 언론과 정치권에서 이상기류를 감지한 존스는 일천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가이아나]]의 정글 속으로 거점을 옮겼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이아나]]에 100만 달러에 사놓은 땅이었기에 [[1974년]] 소규모로 이동했고, [[1977년]] 가이아나 정부의 허락 하에 대규모 이주(어린아이 포함)가 시작되었다. 신도들에게는 바깥 세상의 사악함이 존재하지 않는 열대의 낙원이라고 했지만 가이아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존스의 명령 하에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인권]]침해를 당했고, 모두 함께 존스타운을 건설해야 했다. 또한 신도들에게 탈출하면 [[독사]]와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며 광기에 가득한 목소리로 협박하여 누구도 인민사원을 탈출할 수 없었다.
====살인====
[[1978년]] 미국 [[하원의원]] [[리오 라이언]]이 신도학대 사건 신고를 받고 조사<ref>사고당일 인터뷰에서 그는 방문 목적을, "이곳에 있는 미국인의 보건과 복지를 조사할 것입니다" 라고 밝혔다.</ref>차 가이아나의 존스타운을 방문했는데, 당시 신도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이들이 짓는 웃음은 너무 어색했다. 처음엔 라이언 의원도 그들이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 속아 넘어갔지만, 현지 생활에 불만을 가진 버논 고스니라는 신도가 조사단 중 한명에게 쪽지를 전하면서 정착촌의 실상을 깨닫는다. 실제로 조사 중에 많은 신도들이 리오 의원과 함께 떠나기를 원하였다. 존스는 라이언 의원이 귀국 뒤 미국 정부에 실상이 보고됨은 불 보듯 뻔하다고 생각하여, 인민사원 신도인 경비들을 보내어 떠나려는 의원 30여명의 일행(귀국 희망 정착민 포함)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이 결과로 리오 의원, 세 명의 [[NBC]]방송국 기자, 한 명의 신도가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일행중 한 사람은 수로와 정글로 몸을 숨겨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전해진다.

====집단자살====
곧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짐 존스 교주는 신도들에게 억지로 집단[[자살]]을 명했고, 무장경비원들에게 둘러싸인 신도들은 [[청산가리]]를 탄 [[주스]]를 마셨다. 심지어는 [[어린이]]들에게 강제로 독극물을 먹이기까지 했으며, 일부 신도들은 [[총]]을 맞거나 [[목]]이 졸리기도 했다. 존스 자신은 [[머리]]에 [[총]]을 맞은 채 발견되었는데, 살해당했는지 자살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 집단자살로 총 914명이 죽었고 그중 276명은 어린이였다. 이전에도 존스 목사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집단 자살 연습을 시켰다. 다만 [[1978년]] [[11월 18일]]은 연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죽은 사람들은 최소 2세부터 최고 84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었다.

=== 인민사원 집단자살 원인에 대한 분석 ===
====현재 주장된 분석들====
인민사원 신도들의 집단자살은 [[교주]]의 명령하에 [[자살]]행위까지도 기도할 수 있는 [[사이비 종교]]의 극단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수많은 연구결과가 등장하였다. 현재 인민사원 집단자살을 연구한 이론들을 보면, 교주 짐 존스의 카리스마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는 이론(비슷한 사례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사이비종교]]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도 카리스마로 신도들을 지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민사원 신도들이 대부분 [[빈민]]층 출신이라 삶에 미련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론, 교주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사이비종교]]의 특징때문에 일어난 일로 보는 이론이 있다. 또한 인민사원 신도들은 젊은 여성이 [[어린이]]와 함께 음독자살한 일과 [[정글]]이라는 낯선 환경이 다른 신도들에게도 일종의 신드롬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가이아나 정글이라는 낯선 환경,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하는 유사한 환경에서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는게 최선의 행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 신자들이 집단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졌을 것이란 설명이다.<ref name=autogenerated1 />

====대학살설====
인민사원 신도였던 팀 카터(Tim Carter)의 주장에 의하면 존스 교주가 신도들을 모아놓고 집단 [[자살]]을 명령했는데, 당시 무장한 경비원들이 신도들 주위에 배치되었으며, [[어린이]]들에게는 강제로 독극물을 먹였다고 한다. 허나, 팀 카터란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제시한 근거란 것들이 빈약한 데다 정부의 학살 개입설, 은폐설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증언이다. <
인민사원에 대한 가장 방대한 자료인 [

* [[오대양 집단 피살]]

*영화 'Eaten alive by the cannibals(1980)' : '인민사원'이야기와 아주 비슷

== 각주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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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7일 (금) 19:23 판

안익태
安益泰
Eak-tai Ahn
안익태 초상화
기본 정보
출생1906년 12월 5일(1906-12-05)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사망1965년 9월 16일(1965-09-16)(58세)
스페인의 기 스페인 바르셀로나
성별남성
국적스페인의 기 스페인[1],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직업작곡가
첼로 연주가
트럼펫 연주가
바이올린 연주가
지휘자
장르서양 고전음악
배우자롤리타 탈라베라(Lolita Talavera)
종교장로교

안익태(安益泰, 스페인 이름: Eak-tai Ahn, 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한국 출신의 스페인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로,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현재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일생

안익태는 190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평양종로보통학교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1921년일본으로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고, 1930년 졸업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했다. 신시내티 음악학교커티스 음악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고 한인 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1936년에 처음 유럽을 방문했고, 이때 파울 힌데미트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만나 음악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때부터 친일 행적을 시작했다고도 알려지고 있다. 1937년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8년아일랜드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물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에르뇌 도흐나니 등에게 작곡을 배웠고, 종전 직전까지 독일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중립국스페인으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 1946년에는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지휘했고, 1955년 3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1962-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고, 런던 교향악단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교향악단 등을 객원지휘했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직후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9월 16일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안익태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안익태는 1930년대 후반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밝혔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942년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시기의 안익태 공연 프로그램에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고,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작품인 '일본 축전 음악' 을 지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성해준 추천장이 남아 있다.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음악지우사)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친일 행적

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어 상당한 파문이 예상되고 있다. 유럽 체류 시절 안익태가 관변 단체였던 '일본-독일 협회' 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가가쿠를 주제로 한 '에텐라쿠' 와 일본제국에 의해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세워진 일을 기념한 '만주국 축전곡' 등을 작곡했다는 기록도 발표되었다.

2000년에는 음악연속간행물 '객석'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 지휘에 대한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2006년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11월 19일에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이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안익태의 명단 포함에 대해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작품

  • 성악 모음곡 '한국의 생활' (이팔청춘/아리랑 고개/전원/백합화. 1934~1935)
  • 애국가(1936)
  • 교향시 '강천성악'(관현악곡, 1936)
  • 한국환상곡(합창과 관현악, 1936~1937)
  • 환상곡 '에텐라쿠' (관현악곡, 193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 교향 환상곡 제 2번 '교쿠토(극동)' (관현악곡, 193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 전원곡 (Pastorale. 관현악곡, 193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 만주국 축전곡 (합창과 관현악, 1940년대. 1944년 이후 악보 분실)
  • 논개(교향시, 1962)
  • 애국지사 추도곡(관현악곡, 1962)
  • 흰 백합화(성악과 기악, 1962?)
  • 한국무곡(관현악곡, 1963)
  • 교향시 '마요르카' (관현악곡, 1948. 2006년에 자필보 발견)
  • 교향시 '포르멘토르의 로 피' (관현악곡, 1951. 2006년에 자필보 발견)

참고 문헌

  • 김경래,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코리아 판타지》, 현암사, 1966.
  • 롤리타 탈라베라, 《나의 남편 안익태》, 신구문화사, 1974.
  • 최병현,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 뉴욕한인교회 70년사》, 깊은샘, 1992
  • 전정임, 《안익태》, 시공사, 1998.
  • 진화영, 《한국인 최초 베를린 필 지휘,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 월간 객석, 2000.5월호
  • 이규희, 《울어 버린 애국가》, 밝은미래, 2005.
  • 송병욱, 《안익태의 알려지지 않은 두 작품》, 월간 객석, 2006.3월호
  • 송병욱, 《안익태의 민족 정체성-어느 음악가의 정당한 평가를 위하여》, 월간 객석, 2006.4월호
  • 박정미, 《안익태에 대한 의혹 제기와 그 오류에 대한 단상》, 월간 객석, 2007.1월호
  •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
  • 송병욱, 《안익태 '한국환상곡' 초연 70주년 특별기고 1-더블린 초연 현장을 말한다》, 월간 객석, 2008.2월호
  • 송병욱, 《안익태 '한국환상곡' 초연 70주년 특별기고 2-헝가리 동영상과 안익태 이해의 새 키워드》, 월간 객석, 2008.3월호
  • Hoffmann, Frank (2015). 《Berlin Koreans and Pictured Koreans》 (PDF). Koreans and Central Europeans: Informal Contacts up to 1950, vol. 1. Vienna: Praesens. ISBN 978-3-7069-0873-3. 

각주

  1. 이전 국적은 대한제국이며 1946년에 귀화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