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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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카: 화산군 문단공 [[김주 (조선의 문신)|김주]] (金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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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김공석]] (金公奭) (1477~1553)
**** 형: [[김공석]] (金公奭) (1477~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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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482년 태어남]]
[[분류:1482년 태어남]]

2016년 12월 3일 (토) 13:46 판

김공망(金公望, 1482년 ~ 152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위수(渭), 본관은 (구)안동이다. 오위부장(五衛副將) 김성(城)의 아들로,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인이다.

생애

이심원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06년(중종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임용되었다. 사간원,사헌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12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어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심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5년 동안 선정을 베푼 뒤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문장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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