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독관계연방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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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20일]] [[동독 월요 시위|라이프치히 월요 데모]]에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치면서, 통일을 요구했다. 1989년 10월 9일 7만명이 참가해 동독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였으며 10월 16일 12만명, 10월 30일 30만명, 11월 6일 50만명으로 규모가 늘어만 갔다.<ref>[양창석의 통일이야기] (4) 동독의 시민혁명 ‘월요데모’, 파이낸셜뉴스, 2014.07.13</ref>
1989년 [[11월 20일]] [[동독 월요 시위|라이프치히 월요 데모]]에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치면서, 통일을 요구했다. 1989년 10월 9일 7만명이 참가해 동독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였으며 10월 16일 12만명, 10월 30일 30만명, 11월 6일 50만명으로 규모가 늘어만 갔다.<ref>[양창석의 통일이야기] (4) 동독의 시민혁명 ‘월요데모’, 파이낸셜뉴스, 2014.07.13</ref>

1989년 12월 19일 동서독 정상회담을 위해 [[드레스덴]]에 도착한 [[헬무트 콜]] 총리에게 수만명의 드레스덴 시민이 '독일' '헬무트' '우리는 한 민족이다'를 연호하면서 조기통일을 요구했다.<ref>[양창석의 통일이야기] (8) 서독 콜 총리의 통일 결단, 파이낸셜뉴스, 2014-08-10</ref>


==주석==
==주석==

2016년 7월 3일 (일) 21:27 판

내독부(內獨部,Minister of Intra-German Relations) 또는 독일내 교류부, 연방내독관계부, 내독관계부서독의 옛 연방 정부 부처였다. 독일어 약자로 BMB라고 한다. 서독이 초기에는 동독까지 자기 영토로 주장했기 때문에 (독점적 통치권) 외무부와는 별개의 부서가 되었다.

전독부

1949년 서독 정부 수립과 동시에 전독부(全獨部, Bundesministeriums für gesamtdeutsche Fragen)가 설립되었다. 서독만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동독을 소련의 괴뢰정부로 규정한 할슈타인 독트린(유일합법정부론)에 기초한 동독 담당 부서였다.

서독의 김대중인, 서독 좌파 최초의 총리인 빌리 브란트가 집권한 후, 할슈타인 독트린에 반대하는 동방정책을 실시하였으며, 1969년 10월 동독을 괴뢰정부로 규정하는 전독부를 폐지하고, 동독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내독부(內獨部, Bundesminister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를 설치했다.

1991년 독일이 통일되고 연방내독부(BMB)의 대부분은 연방내무부(BMI)로 편입되었으며, 1991년 1월 18일 내독부가 해체되었다.

동독 내란

서독 내독부가 동독의 내란을 일으켰다는 보도는 없지만, 동독 주민들은 처음에는 여행자유화 시위를 하였고, 그 다음에는 민주화 시위로 시민들의 시위 방향이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통일을 원하는 시위를 전국적으로 일으키면서, 동독이 붕괴되며 서독에 통일되었다.

1989년 11월 20일 라이프치히 월요 데모에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치면서, 통일을 요구했다. 1989년 10월 9일 7만명이 참가해 동독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였으며 10월 16일 12만명, 10월 30일 30만명, 11월 6일 50만명으로 규모가 늘어만 갔다.[1]

1989년 12월 19일 동서독 정상회담을 위해 드레스덴에 도착한 헬무트 콜 총리에게 수만명의 드레스덴 시민이 '독일' '헬무트' '우리는 한 민족이다'를 연호하면서 조기통일을 요구했다.[2]

주석

  1. [양창석의 통일이야기] (4) 동독의 시민혁명 ‘월요데모’, 파이낸셜뉴스, 2014.07.13
  2. [양창석의 통일이야기] (8) 서독 콜 총리의 통일 결단, 파이낸셜뉴스, 2014-08-10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