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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9일 (일) 22:14 판

리승엽
李承燁
1950년 당시의 리승엽
출생1905년 2월 8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경기도 부평군
사망1954년 7월 30일(1954-07-30)(49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중앙인민형무소 사형장
성별남성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본관인천(仁川)
학력경기도 인천고등상업학교 중퇴
직업정치가
경력조선공산당 인민검열위원장
조선로동당 정치위원장
종교무종교 및 무신론
정당조선로동당

리승엽(李承燁, 이승엽, 1905년 2월 8일[1] ~ 1954년 7월 30일)은 일제 강점기의 로동운동가 겸 친일 공산주의 운동가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치가이다.

그는 조선공산당 창설에 관여하였고 박헌영의 참모로 활동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내내 노동자 파업 쟁의 활동을 배후에서 지휘하였다. 1946년 남조선로동당 창당 등에 참여하였다. 조선로동당의 초대 정치위원장을 지냈으며, 초대 내각 사법상 겸 내각경호실 부실장, 내각 국가검열상 등을 역임했다.

박헌영(朴憲永)의 최측근이기도 하였던 그는 1953년 박헌영 미국 간첩 사건에 연관되어 이듬해 단죄되었다.

생애

생애 초기

경기도 부평군에서 가난한 뱃사공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경기도 부천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경기도 인천부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뱃사공으로 일을 하다가 나중에 여관을 운영하였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도 인천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인천고등상업학교 재학 중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에 처해졌다. 이후 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열악한 근무 환경에 분개하여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아울러 1923년에는 조선공산당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노동, 정치 활동

1924년 제1차 조선공산당 창건작업에 참여하였고 그해 9월 조선일보 에 입사해 기자가 되었다. 1925년 9월 화요회 계열의 주도로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였으며, 조선일보를 사직했다. 이후 노동운동을 하며,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26년 공산당 조직관련 혐의로 조선총독부에 피체되었다 풀려나기도 했다.

1930년 부산에서 박장송(朴長松), 안영달(安永達), 김형윤(金炯潤) 등과 함께 지하에서 <전조선 피압박․피착취 계급에 격(檄)함>이라는 전단을 제작․배포하려다 검거되어 부산반전반제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1931년 박헌영·김단야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했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좌절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간 복역하였다.

1937년 함경남도 함흥에서의 제4차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사건으로 붙잡혀 1939년까지 복역하였다. 1941년에는 대화숙에서 활동하면서 변절했다.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과 정치 활동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장안파 공산당 제2비서가 되었으나 8월 16일 박헌영이 귀환하여 통일재건 조선공산당 재창당시에는 박헌영계의 재건파와 합류하여 활동했으며 재건파 공산당으로 건너가 정치국 국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건국준비위원회에도 가담했다. 1945년 9월 재건파 조선공산당 정치국원에 선임되고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대리를 지냈다.

1945년 11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조선인민공화국이 해체되자 2월 민족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하였다. 이후 조선공산당이 조선인민당, 신민당 등과 통합하여 남조선로동당의 창당 조직에 참여했다. 남조선로동당이 창당되자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1946년 남조선노동당 경기도 책임자가 되었고, 이어 박헌영으로부터 남조선노동당 의 기관지 성격의 신문인 《해방신문》 주필자리를 넘겨받았다. 이후 〈해방신문〉 주필로 활동하였다.

월북 이후

1948년미 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였으며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년 9월 북조선 정권 수립 후 로동당 비서와 초대 사법상[2]내각호위실 부실장, 노동성 부상을 거쳐 국가 검열상을 역임했고 1949년 6월 북조선노동당남조선노동당의 통합 때에는 통합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제2비서가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에는 김일성을 따라 남하하여 6월 28일 서울특별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서울시장이 되어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으로 재직했다.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그는 당시 서울에 남아있던 미처 피하지 못한 민족진영 인사인 김규식, 안재홍, 정인보, 방응모, 김용무 등의 납치를 지도했다. 또한 조봉암을 변절자로 규정하여 처벌한다는 벽보를 붙이게도 했다. 이후 인민군 패잔병들을 규합해 경인 지구 전투에서 지연전과 유격전을 수행하여 김일성에 의해 공화국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1952년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52년 10월에 유격대 양성 기관인 금강 학원이 정부 전복을 도모했다고 하는 혐의로 체포, 다음 해 반당종파분자와 미국 간첩의 혐의를 받았다. 1953년 3월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 직에서 해임되었다.

박헌영의 후원 하에 그는 1951년 노동당 비서가 되었으나, 남로당계를 제거하려던 김일성의 견제를 받아오다가 금강정치학원 사건이 빌미가 되어 반당종파행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54년 숙청되었다.[3]

사후

그는 1940년대화숙에 가입하고 식량배급조합 이사를 지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친일 활동을 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4]

리승엽을 연기한 배우

TV 드라마

같이 보기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이승엽 - 전향과 변신의 길 (정창현)〉. 《청산하지 못한 역사 3》.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4-5. 
  •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2004)

각주

  1. 1904년생 설도 있다.
  2.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1면. 
  3. (책갈피 속의 오늘) 1956년 北 ‘남로당계 숙청’ 발표 - 동아일보
  4.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이승엽 - 전향과 변신의 길 (정창현)〉. 《청산하지 못한 역사 3》.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4-5.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법상
1948년 9월 2일 ~ 1953년 8월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호위실 부실장
1948년 9월 2일 ~ 1953년 8월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노동성 부상
1948년 9월 2일 ~ 1953년 8월
전임
김원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검열상
1952년 ~ 1953년 8월
후임
김원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