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기자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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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기자가한신 기록
* 삼국사기 기자가한신 기록
: 이 역시도 기자조선에 대한 근거로 부족합니다. 출처을 말하세요. 일신, 기자가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어떻게 기자조선 건국과 관련을 지을 수 있는지요. 이 역시 출처가 필요합니다. 기자가한신이 기자인지 신의 이름인지 분명하지가 않기 때문이지요.
: 이 역시도 기자조선에 대한 근거로 부족합니다. 출처을 말하세요. 일신, 기자가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어떻게 기자조선 건국과 관련을 지을 수 있는지요. 이 역시 출처가 필요합니다. 기자가한신이 기자인지 신의 이름인지 분명하지가 않기 때문이지요.
* 조서와 사신의 기록
: 정확히 어떤조서를 말하는지 언급을 하셔야지 이렇게 애매하게 하시면 안됩니다.

2008년 3월 22일 (토) 07:18 판

기자조선 역대 왕 관련

1929년 김광이 저술한 《대동사강》과 비교해 보니 차이가 있어서 《대동사강》의 내용으로 바꿔놓습니다. 변경 이전의 내용이 옳은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6년 10월 3일 (수) 19:56 (KST)[답변]

주장의 근거

본문에 덧붙여진 내용 중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어 이 곳에 옮겼습니다.

우리나라에 왕이라는 칭호를 쓰게된 때는 적어도 기원후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역년표를 보면 기원전 1000년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것으로보아 후대의 위작이라고 볼수있으며 왕의 이름들도 600년 이후에나 볼수있는 한자식 이름이 많이 있으며 얼핏보기에 조선왕들의 이름처럼 보인다.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자면 기자는 은의 제후입니다. 은나라에서 왕의 칭호를 썼으니 기자조선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초기에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후대에 고쳐불렀을 수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의 경우도, 왕이 아니었어도 선대에는 모두 '종, 조'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24일 (일) 12:05 (KST)[답변]

왕의 명칭도 중세조선왕이나 고려의 명칭으로 보여지며 이는 후대의 위작입니다. 문성, 경순, 창덕 등등 모두 조선이나 고려시대의 한자식 이름입니다.
죽서기년에 의하면 기자는 조선에 오지 않았습니다. — 이 의견은 66.72.160.235님이 2006년 12월 25일 (월) (KST)에 작성하였으나, 서명을 하지 않아 2024년 4월 19일 (목) 08:41 (KST)에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의견을 남길 때에는 항상 의견 끝에 띄어쓰기를 하고 --~~~~를 입력해 주세요. 저장할 때 자동으로 서명이 됩니다.[답변]

(문장의 끝에 글쓴이를 나타내는 '~'x4를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체 왕의 명칭이 조선이나 고려의 명칭으로 보여진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 고려시대 부터는 '왕' 대신 '종.조'가 쓰였습니다. 왕의 명칭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고, 최소한 전국시대 중기의 나라들은 유사한 왕의 명칭(양애왕, 혜문왕, 경민왕, 경양왕, 고열왕 등)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죽서기년에 '기자는 조선에 가지 않았다'라 설명한 내용이 정말 있다면 부정론 쪽에 제시하면 됩니다. jtm71 2006년 12월 25일 (화) 20:58 (KST)[답변]

기자조선의 역대왕이 나오게 된 경위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사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족보에서 출발한 것으로 태우선우씨세보에서도 가덕왕 이전의 왕들은 실제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족보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것이며 태우선우씨세보도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왕의 명칭이 삼국시대 이전에도 있었다는 근거를 말하시기 바랍니다. 중국 사서에 나타난 칭왕이라는 것은 통치자를 왕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라를 독립된 국가로 자기 자신들이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즉, 싸움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뜻입니다. 전국시대가 어느시기인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는 전국시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양애왕은 어느나라 왕인지 모르겠군요.

왕의 명칭은 기자가 칭왕할 때에 고쳐질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제시한 내용입니다. 후대의 통치자가 왕이 되면 그 선대도 왕으로 부르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제후의 명칭을 후대에 왕으로 고쳤다고 해서 기자나 역대 통치자들이 없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기자조선은 은에 기원했고, 국경 지역에 위치했으니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29일 (토) 23:22 (KST)[답변]

선대로 해서 1대나 2대정도 왕이로 부르기는 합니다. 그러나 태원선우씨세보에 나오는것처럼 선대로 해서 40대를 왕으로 부르지는 않죠. 조선때에 사대사상으로 인하여 기자조선의 존재를 꾸미기 위해 40대나되는 조상들을 왕이라고 추존한것이지요. 그리고 추존된 왕들은 통치자가 아닙니다. 그냥 기후의 조상들을 말하는겁니다. 태원서우씨세보에도 추존왕이라고 말하고 있는것을 대동사강에서 그 추존된 왕들을 기본으로 기씨조선기를 만든것입니다. 추존왕을 만들어낸 위작에다 역사적 사실인 살을 붙인것이라 할수있죠. 그 사실도 무엇을 근거로 만들었는지는 알수없지만요. --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12 (KST)[답변]

그렇다면, 전국시대의 기자의 신하들이 따라야 할 '전례'라는 것이 있기나 했던 건가요 ... 이는 개인적인 억측입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3:30 (KST)[답변]

주장의 근거2

한편 가한(可汗)이란 명칭은 기자가 중국의 혈통이 아니라 북방 민족의 혈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대체 이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 가한이라는 것은 고구려의 풍습을 설명하는 글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석탈해 이사금을 탈해왕으로 칭하는 것은 거짓입니까 ... jtm71 2006년 12월 25일 (화) 20:55 (KST)[답변]

말그대로 가한이란 북방민족의 왕 호칭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사금과 탈해왕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가한이란 전통적인 북방민족의 통치자에 대한 명칭입니다. 고조선에서는 진한(辰韓)이라 불렀고, 고구려는 개 또는 해(諧)라고 불렀습니다. 백제는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고 했습니다. 신라는 이사금, 거서간, 마립간 이라 했죠. 공통적인 말이 뭐냐면 한, 해, 하 모두 비슷한 발음입니다. 금 간 개 모두 비슷한 발음입니다. 참고로 거란족이 가한이라했습니다. 도수희 교수님 책을 읽어보시면 될겁니다.

후에 그 땅을 차지한 이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적은 것 아닌가요 ... 우두머리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당시에도 그렇게 불리웠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jtm71 2006년 12월 29일 (토) 23:23 (KST)[답변]

그렇지 않습니다. 좀더 통치자들의 명칭과 옛 우리말의 이두식 표현에 대해서 알아보시면 좋겠군요.--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02 (KST)[답변]
삼국사기의 원문을 봤더니 "기자가한"에게 제사를 지낸것이 아니라 일신 기자신 가한신들에게 제사를 지낸것이군요. 가한에 대한 북방민족기원사항을 삭제했습니다. --Breathejustice 2006년 12월 31일 (일) 06:24 (KST)[답변]

여기서 따질 일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를 설명해 보시지요. 대체 뭐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까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3:27 (KST)[답변]

문제의 해결

어쨌거나, 양측의 의견이 맞서고 있다면 동등하게 제시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듯합니다. 하지만, 근거가 있더라도 학설이 아닌 개인의 추측에 근거한 내용을 그대로 적는 것은 자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인용하신 책('고기 ...')도 전공이 아닌 분이 쓴 책이라 해당 내용의 출처를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가된 내용은 해당 내용에 맞추었고, 기존 항목에 해당되지 않는 내용은 별도로 분류했습니다. 내용의 공정성은 스스로 평가하여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6년 12월 30일 (토) 00:50 (KST)[답변]

기자조선

사용자토론:Allen R Francis에서 옮김

기자조선을 기록한 책을 보여주시지요. --Breathejustice 2006년 12월 29일 (금) 14:26 (KST)[답변]

그쪽은 기자조선이란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요? 어디서 들었나요? 어디서 보았나요? -- Allen 2006년 12월 29일 (금) 14:28 (KST)[답변]
중간에 끼어들게 되어 두 분 모두에게 죄송합니다만, 위키백과는 "기록"하는 곳이지 사실 여부를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기자조선의 부존에 대해 증빙하고 싶으시면 위키백과가 아닌 한국 사학계에 연락해 주세요. - χε 아이리디 (토론) 2006년 12월 29일 (금) 14:29 (KST)[답변]
제 말이 그 말입니다. : ) -- Allen 2006년 12월 29일 (금) 14:30 (KST)[답변]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뉜다는 것이 정사라고 기록한 책을 보여달라는 것이지 기자조선의 실존 여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조선은 전조선 후조선 위만 조선으로 나누는 것이 중립적인 사학입니다.
Dubious tangram? 참고문헌 제시를 하지 않은 것은 그 쪽입니다. -- Allen 2006년 12월 29일 (금) 14:34 (KST)[답변]
고조선을 전조선 후조선 위만 조선으로 나누는 것이 Original Research인 이유는 1) 그렇게 사용하는 공신력 있는 단체나 저술이 거의 없습니다. 2) 무엇보다 현재 한국 사학계는 이러한 분류방법을 적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3) 무엇보다 그렇게 변경하신 근거를 권위있는 학자나 또는 저술에 근거하지 않고 Breathejustice님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 χε 아이리디 (토론) 2006년 12월 29일 (금) 14:36 (KST)[답변]

좀 생뚱맞지만, 이 토론 끝나면 지우지 마시고 토론:기자조선으로 옮겨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면 지금 토론:기자조선에서 논의를 하셔도 좋고요. --Puzzlet Chung 2006년 12월 29일 (금) 14:38 (KST)[답변]

몇몇의 대학교 사학과에서 주장하는, 그리고 그들이 식민사학자라고 질책를 당하는 이론이 위키의 문서를 대표해야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위키는 백과사전입니다. 모든 주장에 대하여 모두 설명해야 합니다.--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09 (KST)[답변]

교수 중에 그분들을 식민사학자라고 하는 이가 있던가요 ... 말투에서 편견이 느껴집니다. 기자동래설이 앞에 놓인 것은 그것이 가장 주목받았던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래설 내에서도 찬.반 이론이 모두 서술되어 공정성에 있어서의 문제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문서를 대표'한다는 것은 무엇을 지칭하는지요 ...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3:53 (KST)[답변]

님의 편집은 우선 BC12세기 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나서 그 이외의 설을 설명하고 있으니 NPOV위반입니다. 모든 설을 동등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신채호의 의견은 소수의견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의견은 충분히 공정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오히려, 첫번째, 두번째 ... 로 순서를 매기는 것이 더욱 공정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16 (KST)[답변]

기자조선2

사용자토론:Airridi에서 옮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 조선으로 보는 근거가 무엇인지 말해보시지요. 위키는 한국사학회의 대변인이 아닙니다. 모른 사학계의 의견을 대표해야지 백과사전이지요.--Breathejustice 2006년 12월 29일 (금) 14:36 (KST)[답변]

다른 사학계의 의견을 대표하시고 싶으시다면, 그 사학계가 어느 사학계이며 그 사학계의 어떤 저술에서 그러한 내용이 있는지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 χε 아이리디 (토론) 2006년 12월 29일 (금) 14:37 (KST)[답변]
제가 먼저 요구 했으니 먼저 말해보시지요.
우습군요. 아이리디님이나 나나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저와 그는 단지 중립적 시각 위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위키백과는 한국사학회의 대변인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그럼 그 쪽의 생각은 어느 나라 사학계의 정설입니까? -- Allen 2006년 12월 29일 (금) 14:41 (KST)[답변]
기자조선에 대해서 모르면 편집에 참여하지 마시지요. 알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중립적인 시각이 무엇인지 알수있나요? 자기모순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알지도 모르니깐 제가 편집한것을 다시 돌려놓으시는군요. 저의 편집은 지우거나 더하거나 하지 않고 예전의 편집한 문서를 목록별로 분류하여 정리한 것이어서 더 읽기 편하고 쉬운데도 다시 예전의 어려운 편집으로 돌려놓으시는군요.
기자조선에 대해서 모르시면 편집에 참여하시 마세요 제발!--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37 (KST)[답변]

기자조선은 몰라도 위키백과는 압니다. 결국 질문에는 답을 안하는군요. -- Allen 2006년 12월 31일 (일) 00:39 (KST)[답변]

무엇을 답하라는것인지 모르겠군요. 본문을 우선 읽어보세요 거기 참고문헌이 다 나와 있으니 누가주장하는것인지 쉽게 알수있습니다. 기자조선에 대해서 모르니 본문에 누구 주장이라고 써있는데도 이렇게 황당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제발 다시 말하는데 기자조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 편집에 참여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43 (KST)[답변]
Allen님께서 분명히 님이 추가한 POV를 rv하셨는데도 님은 또 그 행동을 임의로 해석하면서 자신의 편집으로 rv를 하시는군요.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_- 그런 중립적이지 않은 걸 추가하는 건 위키백과의 질을 오히려 떨어뜨릴 뿐입니다. 제발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 -- Alpha for knowledge (토론 / 기여) 2006년 12월 31일 (일) 03:31 (KST)[수정: 2006년 12월 31일 (일) 03:34 (KST)][답변]
자세히 읽어보고 말씀하십시오. 저는 기자조선에 대한 3가지 관점인 부정론, 긍정론, 제후국론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다시 정리하였을뿐입니다. 그런데 Allen께서 저의 편집을 다시 예전의 편집으로 돌려놓은거죠. 예전의 편집은 알기 어렵게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제발 편집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제대로 보고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무작정 편집이 바뀌었다고 예전편집으로 다시 돌리는 것이야말로 위키 문서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편집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님의 행동도 위키의 문서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Breathejustice 2006년 12월 31일 (일) 03:40 (KST)[답변]

개인 임의대로 문서를 뒤바뀌고 있는데, 논란이 있는 내용이라면, 사학계의 공론을 먼저 제시하고 각 주장을 순차적으로 정리한 후, 개인적인 의견 없이 기타 참고자료를 덧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서적으로 출간되었다고 무조건 사실인 것처럼 인용되기도 하는데, 해당 자료의 공신력 문제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3:35 (KST)[답변]

공론이라는것이 참 정의하기 힘듭니다. 이기백으로 대표되는 사학의 이론을 공론이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은데.. 이기백의 학설이 왜 공론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이기백의 이론이 사실인것처럼 먼저 서술하고 다른 이견에 대해 서술하는 것은 NPOV위반입니다 왜냐하면 기자조선은 아직까지 그 정설이 확립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BC12세기 건국설은 공론이 아닙니다. BC4세기 설도 있고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설도 있으니 모두 대등하게 서술해야합니다.

그렇다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자조선' 문항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은 충분히 대등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시기가 문제라면 표현을 고치도록 하죠.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04 (KST)[답변]

지금 편집이 NPOV위반인 이유가 무엇인지요. 왜 고칠려고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님이 편집한 모든 내용을 다 첨가하였습니다. 단 규원사화가 BC12세기에 단군조선이 망하므로 기자조선의 건국을 뒷받침해준다는 추측에 의한 구절은 삭제했습니다.

그 내용은 추측에 의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상시의 주장이죠. 어쨌든, 문서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지 않고 되돌리게 되었습니다만, 필요 없는 충돌은 원치 않으니, 맞지 않는 부분만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번 부터는 문서를 수정할 때 수정 내용을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서의 틀을 바꾸면서 IP 로그인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26 (KST)[답변]

이상시의 주장이군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본문 내용 중에서 ...

'전형적인 춘추필법'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또한 무엇입니까 ... 출전은 어디입니까 ... 응답이 없으면 해당 항목을 삭제하겠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30 (KST)[답변]

내용을 약간 수정해야겠군요. 찾아보니 춘추필법이라고 한 것은 없군요. 문장 자체가 모순입니다.

기존 사서의 기록 ...

보기 편하게 고친다면서 더 불편해진 것 같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기자조선의 출발점이 되는 사서의 기록은 별도로 취급하는 것이 옳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43 (KST)[답변]

언급한 중국사서에 1천년간 지속됐다는 기록이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없는데... 답변 없으시면 삭제하겠습니다.

이상시의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에 의하면, '위략'에 기자조선을 언급하면서,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 포악해지니... 진에 이르러 ... 한에 이르러 준왕이 위만에세 습격당하여 패망'이라는 글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를 근거로 주나라 무왕 ~ 진.한 교체기로 1천 년을 산정한 듯합니다. 권근의 기자가 1천 년을 지냈다는 근거도 어딘가 있었을 것이고요.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2:37 (KST)[답변]

연구서의 내용 말고 1차사료의 내용을 말하는건데요. 기자가조선에 봉해졌다고 서술한 상서대전이나 사기 그리고 한서 등지에 기자가 조선에 가서 조선을 세운후 1천년 동안 다스렸다는 내용이 있냐고 물어본거에요. 제가 알기로는 아마 없을겁니다. 1천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내용은 조선시대 이르러 사대사상이 강한 유학자들이 쓴 사서에 등장하게 될겁니다. 이건 제 사견입니다만,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계보를 이었다는 것은 유학자들에 의한 역사왜곡에 해당하는거죠. 상서대전 사기 한서에 나오지 않은 내용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만든거죠. 태원선우씨세보처럼요. 그전에는 사서의 기록에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또 그 이전에 상서대전 사기 한서등은 죽서기년에도 나오지 않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것을 만들었죠.

한정된 자료를 가지고 그분들을 '사대사상'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으로는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계승하지도 않았고, 한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해도, 그들은 한국에 포용되었습니다. '1천 년 간 다스렸다'는 내용이 문제가 된다면 '있는 그대로' 적으면 되겠죠. 중요한 것은 '자기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아니라, 옳은 내용이 남는 것입니다. 기자조선에 대한 예우는 고려시대(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기간이 1천 년이라는 것도 앞서 설명한 기록으로부터 추론이 가능한 것이고요. 사대주의 의식에서 만들어낸 역년이 아닙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3:22 (KST)[답변]

제가 말을 중구난방으로 했군요^^. 상서대전, 사기, 한서 등 1차사료에 기자가 나라를 세워 1천년간 지속되었다라고 기록하였는가가 가장 주된 질문이었습니다.

궁금한 내용이 있는데 ...

  • 규원사화에서는 단군의 고조선에 이어 치우의 자손의 나라인 남국(藍國)이 고조선을 이어 해대와 회대 지역으로 불리었던 중국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까지 확장하고 한때에는 빈과 기라고 불리었던 황하강 상류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이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3:32 (KST)[답변]

규원사화에 따르면 단군조선을 이은 국가는 기자조선이 아니라 남국이라고 서술되어 있어요. 남국이 모든 제후국을 거느린다고 기록되어있죠. 만설에 기자는 열국중 하나인것처럼 기술하고 있죠. 정확히 말해 기자동래설의 부정이지 기자조선의 부정은 아닙니다.

남국후는 43세 물리임금 때에 회대에 진출하고, 엄국과 서국을 세운 후 46세 보을 때에 제후들을 거느립니다. 이후 약 50년 간 단군조선이 유지되었고, 47세 고열가의 기록에도 '이 자리를 물려주려 하나 자손들을 두루 보아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자의 설명으로도, 단지 '제후 중 남후만이 뛰어나서 군후를 거느렸다'는 내용 뿐입니다. 남국은 후에 선모국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대동사강에는 선모국이 선비국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중국측 기록에 선모국의 행방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서국은 후에 주나라를 위압하고 주변국을 아우르는데, 결국 주나라에 멸망합니다. 어쨌든, 남국의 행방은 요.금.청의 행방과 유사하여, 단군조선의 계승국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3:51 (KST)[답변]

남국을 선비족이라 보기도 하고 연나라로 보기도 하지만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기에 보면 남이를 정벌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이것은 남국의 세력이 주나라때에 이르러 지금의 하북성이나 요녕성쪽으로 밀려났나고 볼수도 있습니다. 남국이 망했다고는 볼수 없죠. 말하다보니 original research같군요. 지우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도 궁금한게 있는데....

현대에 사학자중 기자조선 긍정설은 누가 주장하는건가요? 참고문헌좀 봤으면 좋겠는데요...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에 기자조선설이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이기백도 기자조선을 요서지방에 있다고 주장하니 누가 주장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학계의 중론은 일부인정에서 부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현재는 '약간의 긍정'을 표시하는 정도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소극적인 의견으로는, '과거의 고려, 조선 시대에 실재했다고 믿었던 기자조선의 영향을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이고, 유적을 중심으로 부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표적인 분은 이형구 교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미 작고하셨지만 이상시 변호사도 기록을 신뢰하는 입장입니다. 기자의 출신이 동이족이라는 것도 기록을 통해 추정한 것이고요. 결국 은나라도 동이족 계열이라는 것입니다. 천관우 교수도 결국은 기록에 기초한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8백 년 간의 기록은 공백이니 그 사이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고요.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조선시대와는 달리 그 영역을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이덕일 교수(공저인데 직접 쓴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네요.)도 최근 출간된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라는 책에서 기자조선이 요서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참조할 자료들은 참고자료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3:57 (KST)[답변]
은나라가 동이족 계열이 아니라 당나라 때 쓰인 자치통감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던가요? 아니면 제가 잘못 알았나요? --Knight2000 2007년 4월 25일 (수) 10:41 (KST)[답변]
'자치통감'에 관련 내용이 있다면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L모 교수가 자신있게 주장하는 것을 보면 어디엔가 근거는 있어 보입니다. jtm71 2007년 4월 28일 (토) 14:32 (KST)[답변]

기자조선의 역대왕과 사대사상

그저 저의 헛소리입니다. 본문과는 관련 없어요. 기자조선은 사대사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기자조선이 왜 생기게 됐는지 보면 알수 있는데...

  • 기자를 처음으로 기술한 죽서기년등에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말도 없습니다.
  • 그후 중국을 진나라가 통일 한 후, 중국땅에 살던 동이족들이 다 쫓겨납니다(쫓겨난 것은 중국사서에 나오는데 지금 정확히 생각이 안나내요). 이 후에 한나라가 세워진 후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애매한 말을 남깁니다.
  • 그러다가 고려가 이성계에 의해 쿠테타로 망한 후 국명에 대하여 이성계는 중국에 가서 묻죠. 화령과 조선중 어떤 것을 택하면 좋겠냐고... 중국의 왕은 조선으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도가 있는데요...
    • 우선 조선이란 국명은 중국이 우리나라를 얕잡아보는 국명에 해당합니다. 동이족이라는 명칭과 비슷하죠. 朝는 아침으로 동쪽을 뜻하고 鮮은 설문해자를 보면 貊족에서 나왔다고합니다. 鮮은 신선하다는 뜻으로 날고기를 먹는 맥족에서 나온거죠 즉, 조선이란 명칭은 동쪽에 있는 오랑캐로 날고기를 먹는 맥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선이란 국명의 원음과 비슷한 朝鮮을 선택한겁니다.
    • 두번째로는 기자조선과 연계하여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즉, 원래 기자는 조선을 건국했는지 안했는지 기록이 없지만 후대에 왜곡되고 명나라에 사대사상이 강했을때 중국 사서에 나온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느 내용을 더하여 그 역년을 만든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자의 역대 왕들은 조선때 만들어진 기자실기, 태원선우씨세보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규원사화 단군기에는 분명 '조선'의 명칭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라 이름은 '단국'이었죠. (단군은 단국의 임금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또 다른 고대사서인 부도지에는, 조선의 이름은 아침에 제사를 지낼 때에 신선한 고기를 사용한 것에서 유래된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이 그대로 전달된 것인지에는 현재로서는 의문이지만요. jtm71 2007년 1월 1일 (월) 00:04 (KST)[답변]
그랬군요. 규원사화 읽을때는 그냥 읽어서 몰랐는데... 어쩐지 조선이랑 국명이 수상했었습니다. 명나라가 이성계보고 조선이라 이름하란것도 수상하고... 단국이군요.... 환단고기는 "신국 혹은 진국(辰國)"이라고 말하고 있죠. 재야사학자들은 한반도에 있었던 마한 진한 변한의 원조를 진국으로 보는 것은 틀렸다고 말하죠. 고조선은 만주에 진국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말하는 교과서의 내용은 틀렸고 고조선과 진국은 같은 나라라고 말하죠. 이와 더불어 사기 조선전에 나오는 진국은(위만이 한나라와 진국의 무역을 방해했다고하는) 바로 고조선이라는 거죠.
규원사화 단군기에서 단군이 '박달임금' 또는 '백달(白達)임금'이라 하였으니, 단국은 박달국 또는 백달국이 될 것입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단국, 배달국, 환국 모두 동일한 명칭이라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jtm71 2007년 1월 1일 (월) 10:04 (KST)[답변]
언어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과 "배달"이 서로 다른 언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불"(뿌리/배달)이라는 낱말은 투르크 게열(우랄어 계열)의 낱말인데, "한"(하나/하늘)은 몽골 계열(알타이어 계열)이라네요.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환국과 배달국은 현대 한국인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리적 분석을 하더라도 환국이나 배달국의 중심지는 저 멀리 몽골 고원이나 그보다 북쪽일 가능성이 높으니, 당시로서는 현대 한국 지역은 변방입니다. ㅡㅡ; --Knight2000 2007년 4월 25일 (수) 10:38 (KST)[답변]
앞에서도 제시했듯이, 규원사화에서의 배달국은 단국으로, 단군조선을 의미합니다. '환'은 하늘이 아니라 환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니 이러한 주장이 북애자 자신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환'이 하늘이라든지, '배달'이 뿌리라든지 하는 해석은 규원사화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거대한 연방국으로서의 '환국'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桓國'이라는 명칭 조차도 1904년 발간된 동경제국대학본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것이 최초입니다. jtm71 2007년 4월 28일 (일) 17:06 (KST)[답변]

대동사강 관련 ...

1920년대에 경성에서 출간된 대동사강의 저자는 기자조선이 난하 유역의 수백리에서 시작하여 차차 세력을 키워 북호의 땅 1천 리를 빼앗고, 그 영토가 평양까지 이른다고 보았던 듯합니다. 당시로서는 요서 지역의 유적이 처음 발굴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들로 추정한 시대에 따른 세력의 변화와 그 기록이 부합되는 점은 무작정 꾸며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수백 리'라는 기록은, 기자조선이 아닌 단군조선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됩니다. 기자는 단군조선에 망명했고, 마지막 임금인 고열가는 기자에 서쪽 땅을 나누어 주고 아사달로 사라집니다. jtm71 2007년 1월 1일 (월) 10:16 (KST)[답변]

대동사강 기씨조선편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은데요. 고조선의 수도인 요동성에서 서쪽으로 2천리 떨어졌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영토는 동서가 5천여리요 남북이 칠천여리였다. 대동사강에서 기록이 다른데 두가지를 설명하는게 나을것 같은데요. 좀더 토의를 해보죠...

보충설명을 따로 하면 좋겠지만, 여기에 대한 연구실적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키 지침이 개인적인 연구가 허용되지 않으니 있는 그대로의 자료를 제공할 수 밖에는 없겠네요.

단군조선도 그렇지만, 태조의 설명에는 왕조 전체의 설명이 포함되는 경우가 있을 듯합니다. 대동사강의 기씨조선의 경우, 단씨조선으로부터 수백 리를 할양받았다고 적혀 있고, 동서 5천리.남북 7천리의 기록은 태조왕 4년보다 앞선 시기에 적혀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실제로, 이후로도 제후와 관련된 기록은 없고, 왕이 나라를 순행하는 단위도 군.현입니다. 하지만, 조공의 기록이 있어서 이러한 내용이 김광이 여러 사서와 야승을 취합하다가 내용이 중복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앞서의 넓은 영토에 비견할 만한 세력으로서 자리잡게 된 것은 최초의 조공 기록이 등장하는 효종왕(기원전 7세기)이후의 일로 여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이는 유적으로 검증된 요서 일대의 세력들(하가점 상층문화)의 확장과 부합합니다. 기씨조선이 스스로(해당 부족들은 동의하지 않더라도) 조공(아마도 무역조공)을 받는 범위를 그 영토로 여겼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jtm71 2007년 1월 2일 (화) 11:08 (KST)[답변]

기자조선긍정론과 대동사강 관련하여

기자조선 긍정론 부분에 기자조선을 서술하고 있는 여러가지 사서를 집대성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문서는 대동사강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군요.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은 여러가지 사서에 나타나고 있으니 사서별로 정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수) 03:55 (KST)[답변]

대동사강의 진개 침략기사

진개는 연나라 소왕시대 인물로 BC 311~279에 침략해야됩니다. 그러나 본문에 진개의 침략이 연나라의 멸망연대인 BC221년 근방에 있으므로 틀린것 같군요. 아무리 대동사강에 그렇게 적혀있다 하더라도 이는 틀린것이며 위키에 기록하지 않는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무래도 대동사강이 진개의 침략기사를 환단고기 북부여기에서 베낀것 같습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는 진개가 BC221년에 북부여를 침략하여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고 나옵니다. 대동사강은 이를 연대에 맞춰 기자조선에 기록한것 같습니다. 진개침략기사는 연대가 틀렸습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27일 (일) 18:42 (KST)[답변]

환단고기는 1979년보다 앞서 존재했다는 것 조차도 증명되지 않은 책입니다. 대동사강이 환단고기에서 인용했다는 것은 추측에 불가합니다. 진개의 침략기사를 따진다면, 다른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분류도 '긍정론'으로 되어 있는데, 진.위를 따진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요 ...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견이 있다면 본래의 내용을 삭제하지 말고 본문에 별도로 그 내용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1월 28일 (일) 07:05 (KST)[답변]
추론이긴 하지만 너무 정황이 확실해요. 이유립이 환단고기만들면서 동사강목을 참고로 한것 같은데 이때 실수한것 같습니다. 보시죠.
동사강목
-왕(王) 비(否)가 진에 복속하고서 곧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조선이 왕을 칭하자, 그 뒤로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하여졌다.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전에 동호(東湖)에 볼모로 가 있을 적에 동호가 그를 매우 믿었는데, 돌아가서는 동호를 엄습하여 격파하고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1천여 리의 땅을 차지하고서 만번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어서는 비가 진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朝會)하려 하지는 않았다. 비는 기자의 40세손인데 곧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환단고기
-경진 19년(B.C.221)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연 나라는 장수 진개(秦開:제나라의 장군으로 동호 즉 조선에 인질로 잡혀있다. 나중에 돌아가 조선을 침범하여 조선이 양평에 에 성을 쌓아 국경으로 삼았다.)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비록 한글로 번역된거지만 ㅋㅋ 보세요 너무 똑같죠(제가 동사강목원본이없어요). 동사강목에서는 진개기사를 과거의 기사로 쓴것인데 환단고기에서 이유립이 실수한거죠. 이밖에도 보면요 환단고기 북부여기의 초기기록은 동사강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요...
동사강목
-연(燕)ㆍ제(齊)ㆍ조(趙)의 백성이 투탁(投托)하여 왔다.
환단고기
-임진 31년(B.C.209), 진승(진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려웠다. 이에 연나라.제나라.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명 이나 되었다.
동사강목
-한과 패수(浿水)로 경계가 되었다. 한이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고, 연이 쌓은 장새(障塞)가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요동(遼東)의 옛 장새를 수리하고서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환단고기
-기해 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이다.

보면아실겁니다. 환단고기 저자는 연왕(燕王)이 한나라 제후였다는것을 몰랐나봅니다. BC221년 진개침략기사는 동사강목을 참고하면서 계연수나 이유립이 실수한겁니다. 그것을 또 대동사강은 환단고기를 참고하면서 똑같은 실수를 범한거죠. 그리고 BC221년 진개침략기사는 삭제해야하는데 이유는 아무도 그 기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거에요. 재야사학자도 동의하지 않고, 아마추어 비전공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는 학자가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게시하는게 좋겠지만 완전히 틀린기사에요.

아래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학자의 동의와 위키백과에 실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모든 판단은 읽는 이들이 내리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내용을 임의로 삭제하는 것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1월 29일 (월) 12:06 (KST)[답변]

우리말에 대한 이해

같은 것은 같고, 다른 것은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까 ... 다른 부분이 있다면 '유사하다'라 표현되는 것이 맞습니다.

1923년에 수집된 사서와 야승을 토대로 출간된 《대동사강》에도 36세 가덕왕 이전은 추존왕인 태원선우씨세보와 유사한 왕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대동사강의 위덕왕(威德王)과 창덕왕(昌德王)이 태원선우씨세보에는 성덕왕(盛德王)과 덕창왕(德昌王)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 1923년에 수집된 사서와 야승을 토대로 출간된 《대동사강》에도 36세 가덕왕 이전은 추존왕인 태원선우씨세보와 같은 왕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단, 대동사강의 위덕왕(威德王)과 창덕왕(昌德王)이 태원선우씨세보에는 성덕왕(盛德王)과 덕창왕(德昌王)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만 다르다.).

이렇게 바꾸는 것이 맞는 것입니까 ... jtm71 2007년 1월 28일 (일) 07:25 (KST)[답변]

그렇게 바꾸죠. 좋습니다.

문서수정의 방향

여기는 정설만 소개하는 학계가 아닙니다. 여러 의견이 대립한다면 같이 제시하는 것이 옳습니다. 문서수정의 방향은 빼는 쪽이 아니라 더하는 쪽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 문서도 한.두 줄만 남기고 모두 삭제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기술이 될 것입니다. jtm71 2007년 1월 28일 (일) 07:25 (KST)[답변]

BC221년 진개 침략은요..... 대립된 의견이라기보다는 틀린거에요... 어느사학자도 저 기록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동사강이 환단고기를 이용하여 상고사를 편집하면서 수정없이 기록하다보니 실수가 나온거에요. 진개의 침략을 BC221년 근방으로 보는 학자가 있으면 말씀해보세요. 재야사학자나 비전공사학연구가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라도 저 기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진개기사를 저 시기에 넣으려면 적어도 한명의 학자가 동의를 해야지 Original research가 아닙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게 한 BC221일걸요. 근데 그때 연나라가 침공했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거죠. 더군다나 진개는 연나라 소왕(BC 311~279)때 사람으로 종통왕때는 살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68.254.218.167 2007년 1월 28일 (월) 22:01 (KST)[답변]

학계의 논란거리가 안된다고 쉽게 판단을 내리는 권위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 개인적인 생각이 아닌, 저 기록에 동의하는 사학자가 없다는 근거를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학자의 유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1929년에 출간된 역사서라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현상을 두고 여러 의견이 있을 때에, 가능하면 일반적인 주장에 가까운 내용을 소개하고, 나머지는 부연설명으로서 덧붙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엄연히 그러한 내용이 있는데 기재자의 임의 판단에 의해 더하고 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비록 사실과 틀리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본래의 내용은 그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니혼쇼기의 내용에 틀린 곳이 있다고 해도 역사의 연구에 참조가 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다른 주장이 있다면, 또 다른 의견으로서 제시되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기는 사학계의 게시판이 아닙니다. jtm71 2007년 1월 29일 (월) 11:59 (KST)[답변]

한번 서점에 가서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책을 보세요. 진개의 침략 BC221년이 사실로 써놓은 책이 있나... 제가 한권이라도 찾으면 진개기사를 써넣은것에 동의하겠습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화) 03:42 (KST)[답변]
그리고 사서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 중에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것을 그대로 써 넣는것은 original research에 해당됩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1차 사료에 나오는 혼동되는 기록들을 동의하는 학자, 혹은 재야학자가 쓴 책에 기록되어야죠. 진개침략 BC221년은 한단고기와 대동사강에만 나와요. 위키는 사학계의 게시판이 아니지만 original research를 그대로 적어놓는 열거식사전은 아닙니다. 백과사전에요. 원전에 나오는 내용을 현재 학자(재야사학자도포함)들이 어떻게 연구하였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백과사전이란말입니다. 원전을 열거하려면 http://www.wikisource.org 로 가세요. 다른 의견이라고 하셨는데... 진개침략 BC221 년을 누가 주장하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original research에요.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화) 03:46 (KST)[답변]

최소한 대동사강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가 출간되기 5년 전인 1974년에도 재출간되었습니다. jtm71 2007년 4월 28일 (일) 16:58 (KST)[답변]

인식의 변천

현재의 저작물을 이용하여 인식의 변천을 작성해주세요. 백과사전은 과거의 저작물을 열거하는 사전이 아니에요. 과거의 저작물을 토대로 현재에 연구한 학자들의 저술을 알기쉽게 목록화하는것이 백과사전입니다.

기자조선의 인식은 변천은 original research입니다. 그 당대에 편찬된 사서 몇개를 가지고 저렇게 표현할수 없습니다. 사서가 그 당대 모든 사람의 의견을 대표하지는 않아요. 참고로 중세조선 16-17세기 경에 쓰인 계곡만필 2권에서는 기자조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렇게 인식이 변천되어왔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만 보더라도 적어도 세종이전까지는 조선의 제후로 기자를 인식하고 있고, 세종대왕도 "기"는 나라이름이고 "자"는 작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합당한 출처를 밝히지 못한다면 삭제하겠습니다.--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화) 04:29 (KST)[답변]

계곡만필 권2 史記微子世家曰 武王封箕子於朝鮮 後人因其說而不能辨 余常疑之 方殷之將亡也 箕子與微子,比干各論其心事曰。商其淪喪。我罔爲臣僕。欲以此自靖而獻于先王。殷旣亡。箕子只爲武王一陳洪範而已。若受武王之命而享其封爵。是遂臣於周而變其初志也。微子之受封。爲存宗祀。 猶有 可諉者。若箕子受朝鮮之封。於義將何據也。況朝鮮是時。未嘗服屬中國。武王安得取其地而封拜諸侯乎。史遷此說。明是謬妄。漢書地理志曰。殷道衰。箕子去之朝鮮。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此語甚有理。蓋箕子去中國而入朝鮮。鮮民共尊以爲君。亦猶泰伯適蠻荊而遂君其地也。昔年余次姜詔使曰廣弔箕子賦。謂箕子非受武王之封。而自來朝鮮。趙丈持世頗疑其無據。不知正用班固意也。

조선왕조실록 세종 12년 山川壇巡審別監鄭陟啓 平壤箕子廟神位 書曰 朝鮮侯箕子 請削箕子二字 上曰 然箕國名子爵也 不可以爲號 然泛稱朝鮮 亦似未安 稱後朝鮮始祖箕子若何 令詳定所議啓 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贊成許稠等以爲 宜稱後朝鮮始祖箕子 摠制鄭招以爲 宜稱朝鮮始祖箕子 從喜等議

저 내용은, 후조선의 시조인 기자는 이름이 아니라 나라이름일 뿐이므로, '후조선 시조 기자'로 명시하자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후조선의 시조가 기자라면 후조선은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라는 것이죠. 이후로도 '기자조선'이라는 명칭은 종종 쓰입니다. 문장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3월 19일 (화) 17:42 (KST)[답변]
계곡만필의 '漢書地理志曰。殷道衰。箕子去之朝鮮。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此語甚有理'는, 기자의 동래에 대해 매우 긍정하고 있습니다. 인용하기 전에 내용은 읽어본 것입니까 ... jtm71 2007년 4월 28일 (일) 17:49 (KST)[답변]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을 듯 하네요. 관리자의 조정이 있다면 그에 따르겠습니다.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16:05 (KST)[답변]
대응을 할 필요가 없는것이 아니라 못하시는거겠지요. 님이 추가한 기자조선인식의 변천은 근거가 없고 단지 몇개만의 1차사료를 Jtm71님이 해석한 의견이므로 original research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기자조선의 인식의 변천"은 삭제하겠습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수) 18:31 (KST)[답변]
스스로 찾아보려는 노력은 하시는 건가요 ... 관련된 근거는 참고문헌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18:42 (KST)[답변]
정확한 책이 뭡니까. 저리 두리뭉실 달아놓으면 누가 알죠? 참고문헌 다는 방법 모르세요? 그리고 참고문헌에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 대한 내용은 없는것 같군요.
참고문헌은 박광용 교수의 글입니다.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21:34 (KST)[답변]
저런책은 뭐죠? 서점에는 없고 도서관에도 없군요. 어디서 구했습니까? ISBN 말해보세요 찾아보게. 출처가 부정확한 책입니다. 서지사항이 아주 불명확하군요. 단군기자조선의 시대적 변천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출처가 부정확한 책으로는 본분의 중요한 핵이되는 시대적변천과정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좀더 권위있는 저작물로 설명하세요. 그렇지 않을 시에는 삭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있습니다. 찾아보세요.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21:56 (KST)[답변]
ISBN을 말해보라니가요. 그런책 찾기 힘듭니다. 별로 권위있는 책이 아닌가보군요. 출판사를 보니 서울대출판부인데... 서울대교내학회지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수) 22:25 (KST)[답변]
그건 모두가 판단할 일입니다. 박광용 교수가 어떤 분인지는 알고 계시나요 ... 그리고, 도서관에도 없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료의 권위는 어느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출간한 곳이 얼마 만큼의 권위를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서울대학교는 연구기관으로서는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울대학교 학회에서 발행된 논문집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 주장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jtm71 2007년 1월 31일 (수) 05:52 (KST)[답변]

흠...

춘추필법

네이버사전의 의미를 따르면, 춘추필법의 특징은, '비판적인 태도로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기록하는' 것입니다. 춘추필법으로 없던 기자조선이 지어질 수는 없습니다. jtm71 2007년 2월 1일 (금) 22:28 (KST)[답변]

춘추필법은 "지나인의, 지나인에 의한, 지나인을 위한" 서술법입니다. 한족이 이민족에게 사대를 했다면, 춘추필법에 따른다면, 당연히 공정하게 서술해야 합니다만, 실제로는 이민족을 깔아뭉개거나 비하하는 서술(적어도 이민족을 높이지는 않는 서술)을 합니다. 춘추필법은, 비판적인 태도는 맞지만,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춘추필법은 한족을 위해서는 침소봉대를 해도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흉노는 전쟁에 나가는 젊은이에게 부족 늙은이들이 두꺼운 옷을 벗어주는 관습이 있었는데(칭기스칸 시절에도 비슷한 풍습-쓰던 무구를 주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한나라 사신이 "흉노는 노인을 천대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올바른 필법입니까? 그 다음에 그 사신이 "형사수취"를 들먹이며 예의가 없다느니 합니다. 흉노 대신이 그것을 인정하면서, 한나라에서는 예의를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위아래가 서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쓸데없이 명품이니 하는 사치를 부추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예의를 잘 안다는 "조공사"가 흉노 선우 앞에서 저딴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격조로 본다면 한나라 황제보다 흉노 선우가 더 위인데 말입니다. 저런 "비례"에 대해서는 사서에 아무런 말이 없죠. 객관적 사실을 썼다면, 그것이 비례임을 밝힌 뒤, 한나라의 "자긍심"이라거나 "자존심"이라거나 하는 말을 했어야 옳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춘추필법은 이미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입니다. --Knight2000 2007년 4월 25일 (수) 10:25 (KST)[답변]

글의 요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음 중 어느 것에 해당되는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 1. '춘추필법'은 나쁘다.
  • 2. '기자조선은 춘추필법에 의해 창작되었다'
  • 3. '춘추필법'에 대한 설명이 틀렸다.

'춘추필법'이 간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조선왕조실록의 사용 예를 보면 '대의명분에 의거한 역사의 판단' 정도로 여겨집니다. (무슨 일인지 네이버에서 참조하는 국립국어원 설명이 최근에 바뀐 듯하네요.) jtm71 2007년 4월 28일 (토) 14:48 (KST)[답변]

춘추필법의 뜻은 네이버사전에 나온 대로입니다. 그런데 그 뜻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춘추필법'이 나쁘다는 뜻도 아니며, '춘추필법'에 대한 설명이 틀렸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기자조선'과 관련하여 적어도 '조공국 조선'이 있었고, '기자'가 그곳 왕으로 봉해졌다는 사실까지만 진실입니다. 문제는 '조선'이 '주나라'보다 먼저 있었을 수도 있고(주나라는 은(상)의 제후국 가운데 상당히 늦게 생긴 나라입니다), 아니면 '기자'에게 땅을 떼어주면서 그곳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이때 문제는 이미 '조선'이라는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점이겠죠.). 이미 있는 나라에 제후를 봉한 경우는 뒤에도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신라나 발해라는 나라가 있는데, 느닷없이 당나라 신하 가운데 "신라후"가 나오거나, "발해공"이 나옵니다. ㅡㅡ; 아니면 "신라왕"이나 "발해왕"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기자"에 대한 기술을 실제로 "조선국"에서 "통치행위"를 한 군주 "기자"가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주나라가 조선에 사대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흉노에 대한 기술(후한 이전에는 흉노에 사대했으면서 오히려 흉노가 예로부터 중국(주, 진, 전한)에 사대를 한 것처럼 기술함)을 보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Knight2000 2007년 4월 29일 (월) 15:17 (KST)[답변]
춘추필법에서 말하는 '비판적인 태도'는 '대의명분에 비추어본 비판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판적인 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중국의 '지나인'에게서 나온 것이고, '농경문화'와 '중국식 왕조체계'를 중심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지나인'에게 유리하게 되죠. 그리고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기록하는'이라는 부분은 오늘날에도 통용됩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어떤 사실에 대해 관찰자마다 다르다면 그들의 견해를 모두 기록하거나, 아니면 그 가운데 유력한 견해를 기록하는 것을 "객관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위키백과의 "중립적 시각"과 비슷하죠. 이러한 "춘추필법"을 가장 잘 따르는 역사서는 "조선왕조실록"입니다. --Knight2000 2007년 4월 29일 (월) 15:26 (KST)[답변]

긴 설명을 하셨음에도 주장의 요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짐작하기로는, '사마천은 단지 기자가 조선 땅으로 갔고, 주 무왕이 조선 땅으로 간 기자를 제후로 봉하였다는 것만 기술하였을 뿐이며, 이외의 부분은 창작되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

이에 대한 인식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있어왔습니다. 이미 주나라를 피해 달아난 기자가 다시 주나라로 갈 이유도 없고, 그 경로 또한 은의 도읍을 지나게 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고, 사기에 기자세가가 없는 것도 제후 책봉이 명분 뿐이었다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기자조선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본문에서는 기자조선의 존재와 관련된 양측 주장이 모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시작은, '기자조선이 춘추필법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내용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주장하시는 것과 같이 춘추필법이 중국인에 유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없는 내용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군신 사이의 예절은 공자가 아닌 단군이나 기자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조선왕조의 일반적인 견해였다는 점도 지적해 둘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jtm71 2007년 4월 29일 (월) 17:21 (KST)[답변]

“없는 내용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은 조금 이해하기 힘듭니다. 앞서 말한 흉노의 예에서 보듯이 무례한 사람은 한나라 사신이지 흉노의 재상이나 선우가 아님에도 사마천은 사기에서 “참람”이라느니 하는 말을 써가면서 흉노가 무례하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없는 사실”을 적었죠(처음부터 춘추필법이 나쁘다거나, 기자조선이 춘추필법으로 창작되었다거나 춘추필법에 대한 설명이 틀렸다거나 하는 예시는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비판적인 태도”로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기록하는 춘추필법대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비판적인 태도는 오로지 한족에게 유리할 때에만 그렇게 했으며, 객곽적인 사실도 한족에게 유리할 때에만 그렇게 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기자조선 기사가 “한족에게 유리한 내용만 객관적으로 적는(불리한 내용은 마음대로 바꿔 적는)” 춘추필법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심증은 다분합니다. 진짜로 기자가 봉토를 받았다면(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봉토를 받은 제후는 기자와 주공뿐입니다) 적어도 그 위치만이라도 제대로 적어 주었어야 합니다. 창작이 아니라면 그 위치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할 까닭이 있을까요? --Knight2000 2007년 7월 6일 (금) 09:34 (KST)[답변]

개인적으로 사전적인 의미 외에는 '춘추필법'이라는 말의 정확한 정의를 알지는 못하지만, '춘추필법'은 '술이부작'과 비슷한 의미로, '서술은 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지키기 어렵기에 강조하는 것이고, 모든 사서들이 이 원칙을 지켰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춘추필법에 의해서 없는 사실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단어의 정의가 그러한 이상 틀린 명제입니다. '춘추필법'이 '대의명분을 세우는 서술 방법'이라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판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였기에 옳지 않을 수 있겠지만, 대의명분으로 없는 내용이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편찬된 역사서의 서술은 모두 '춘추필법'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는데, 그렇다면, '춘추필법이 없는 사실도 만들어낸다'는 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대의명분에 따라서 없는 사실도 지어 내었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7월 6일 (금) 21:33 (KST)[답변]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그치면 다행입니다. 주나라 건국 후 실제로 봉토를 받은 제후는 주공과 기자뿐인데, 사기와 춘추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에서는 대부분 봉토를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죠. 사마천의 사기도 예외는 아닙니다. 차라리 없는 사실을 만들었다면 나았을는지 모릅니다. “대의명분”(‘봉토는 천자가 내린다’라는 명분)에 따라 있는 사실을 고쳐 기록한 부분이죠. 춘추필법에 뜻이 “ 《춘추》와 같이 비판적이고 엄정한 필법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죠. “대의명분을 밝히어 세우는 역사 서술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 대의명분에 어긋나면 몰지각이든 사실에 반하든 중요하지 않게 되죠. 그래서 조공사가 흉노 선우에게 무어라 한 일은 지극히 옳은 일이고, 흉노 선우가 조공사를 꾸짖은 일은 참람한 일로 바뀌게 되죠(대의명분에 따르면 흉노는 한의 제후국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일본이나 여진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조선이나 명나라에 유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령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논조는 중립적이지 못하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게 되면 여진이나 일본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할 우려도 있습니다. 차라리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면 다행입니다.

주장하시는 내용은 '춘추필법이 없는 사실을 지어냈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어쨌든, 그러한 내용은 위키백과를 편집하는 입장에서 판단할 만한 내용은 아닌 듯하고, 개인적인 견해가 아닌 충분한 근거가 있고 문서에 포함시킬 만한 내용이라면 출처를 명시하고 덧붙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jtm71 2007년 7월 8일 (일) 12:36 (KST)[답변]

기자조선에 대한 주장의 순서 ...

상식적으로나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에, 긍정-부정-기타의견이 오는 것이 옳습니다. 사실 '제후국론'이라는 주장은 인터넷으로도 검색되지 않는 명칭으로, 긍정/부정의 긍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jtm71 2007년 3월 22일 (목) 12:14 (KST)[답변]

호왕과 무왕

호왕과 무왕이 동일인물이라는 해설도 있는데, 호왕과 무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된 문헌을 제시하기 바랍니다. 다른 출처를 요구하는 항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jtm71 2007년 4월 24일 (수) 21:16 (KST)[답변]

호왕은 혜종의 이름과 같은 '武'자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해당 내용은 검토를 거치지 않은 '개인생각'임이 분명하므로 삭제합니다. jtm71 2007년 7월 22일 (일) 09:56 (KST)[답변]

위키백과는 남·북한 학계의 의견을 대변하는 곳이 아닙니다.

삭제된 양도 적지 않은데, 토론도 거치지 않고 실행되었으므로 되돌립니다. jtm71 2007년 10월 27일 (토) 11:46 (KST)[답변]

출처 불명의 내용들 삭제

오랫 동안 출처가 제시되지 않은 내용들을 삭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자연구'가 의심되는 부분에 '출처 제시'를 요구하였습니다. jtm71 2007년 10월 27일 (토) 12:52 (KST)[답변]

본문으로부터 이동합니다.

출처가 제시되지 않아 다음 내용을 본문으로부터 이동합니다.

* 하상주 단대공정 이후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주나라 무왕의 재위 연대는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1043년으로 기자가 이시기에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것과 기자조선의 첫번째 임금인 태조왕과의 연대차이가 80년정도 난다.
*《동사보감》에 인용된 《대명일통지》에는 '량국몽현에는 기자묘가 없으며, 두여는 잘못 전해들은 듯하다'는 내용이 있다.

위 내용들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내용을 조합한 것으로 독자연구에 해당됩니다. jtm71 2007년 11월 22일 (목) 00:13 (KST)[답변]


기후방정 출처가 필요합니다

출처를 다셔야죠.


기자조선 긍정론의 출처필요

논란이 많은 기자조선에 대하여 원사료를 인용하는것은 독자연구에 해당됩니다.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 삼국유사 주 무왕의 기록
이것을 기자조선의 근거로 사용하시려면 출처를 사용하세요.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됩니다. 원문의 기록은 기자가 조선에 봉하여졌다는 말이지 기자가 기자조선을 건국하였다는 말은 압니다.
  • 삼국사기 기자가한신 기록
이 역시도 기자조선에 대한 근거로 부족합니다. 출처을 말하세요. 일신, 기자가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어떻게 기자조선 건국과 관련을 지을 수 있는지요. 이 역시 출처가 필요합니다. 기자가한신이 기자인지 신의 이름인지 분명하지가 않기 때문이지요.
  • 조서와 사신의 기록
정확히 어떤조서를 말하는지 언급을 하셔야지 이렇게 애매하게 하시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