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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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의 역년 및 치세 ====
==== 기자조선의 역년 및 치세 ====
조선 중기까지의 기자조선의 기록은 중국 사서의 기자의 기록과 마지막 왕인 준왕의 기록이 대부분을 이루다가 조선 말기에는 41대의 왕의 명칭과 치세기간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태원선우씨세보에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듯이 기후(箕詡), 즉 가덕왕 이전 왕은 모두 실제왕(實際王)이 아니고 추존왕(追尊王)이다.<ref>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 한순근</ref>
기자조선을 긍정하는 학자들에 의하여 태원선우씨세보에 나타난 왕들을 기자조선의 왕들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자료인 태원선우씨세보에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듯이 기후(箕詡), 즉 가덕왕 이전 왕은 모두 실제왕(實際王)이 아니고 추존왕(追尊王)이다.<ref>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 한순근</ref>


《기자지》, 《태원선우씨세보》에는 기자조선의 각 왕의 명칭과 치세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사강》과 그 역년이 같다. 명칭은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대동사강의 위덕왕(威德王)과 창덕왕(昌德王)이 《태원선우씨세보》에는 성덕왕(盛德王)과 덕창왕(德昌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기자지》, 《태원선우씨세보》에는 기자조선의 각 왕의 명칭과 치세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사강》과 그 역년이 같다. 명칭은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대동사강의 위덕왕(威德王)과 창덕왕(昌德王)이 《태원선우씨세보》에는 성덕왕(盛德王)과 덕창왕(德昌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2008년 3월 21일 (금) 02:5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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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箕子朝鮮)은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가 세웠다는 나라로, 그 존재 여부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대한민국과 북한의 사학계는 일반적으로 사서에 기록된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기자조선을 보는 관점은 대체로 다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대부분의 사학자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의견으로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는 관점
  • 기자조선은 있었으나 주변에의 영향은 미약했다는 관점[1]
  • 단군조선에 이어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약 1천 년 간 기자(箕子)와 그 후손이 만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는 관점
  • 기자조선이 기원전 323년 경에 기자의 후손인 기후가 번한(番韓)의 임금이 된 후에 자칭 왕이라 칭한 불조선이라는 관점(신채호 주장)


고려, 조선시대에는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의 여러 나라들이 대체로 기자조선을 인정하였으나 기자의 동래와 관련된 기록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 이후로 논란이 있었고,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그 존재 자체도 의심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대한민국 교과서한씨조선(韓氏朝鮮)과 관련하여 간단히 언급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삭제되었고, 최근에는 그 위치와 영역, 존재여부, 성격 등 여러 사항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기자조선에 대한 종합적 이해

고조선의 발전과 관련하여 기자 조선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서에는 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나와 있다. 그 연대는 기원전 12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중국 선진 시대 문헌에는 기자와 조선이 별개로 취급되었다가 진,한대 이후에 양쪽이 관련되어 동래설로 등장하는 만금, 그 사실성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견해가 많다. 남한 학계에서는 일찍이 기자 조선의 허구성을 논증하고 이를 부정해 왔으며, 북한 학계에서도 "대국주의 사상에 입각한 중국인들에 의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고 있다.

현재, 기자 자체가 본래 왕을 뜻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칭호였다고 해석하는 견해, 기자 조선을 고조선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사회 내부에서 새로이 등장한 지배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예맥조선), 또는 동이족의 이동 과정에서 기자로 상징되는 어떤 부족이 중국의 은ㆍ주 교체기에 중국 화북에서 대릉하, 남만주를 거쳐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으로 이동해 와 정치 세력을 잡은 것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기존 문헌의 기록

기자조선은 중국의 《상서대전(尙書大傳)》「은전(殷傳)」,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지리지(地理志)〉, 《위략》《삼국지》『위서』「동이열전」, 《삼국지》『위서』「동이전」 등의 사서에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문헌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 내용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 기자조선을 세운 이는 성은 자(子), 이름은 서여로, 상나라 왕의 후손이다. 일반적으로 원래의 이름 대신 '기자(箕子)'로 불린다.
  • 기자는 상나라 걸왕의 태사(太史)로, 왕의 정치에 대해 간하다가 옥에 갇히었다.
  •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옥에서 풀어주었다.
  • 기자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여 5천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의 영토로 망명하였다.
  • 그 후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기자는 끝내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았다.
  • 기자는 후일 주 무왕을 찾아 홍범구주를 설명하였다.

시대에 따른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

각 시대에 따른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이 변화하였다. [2]

고려시대

기자에 대한 내용이 《삼국유사》에 소개되었다. 주나라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승의식이 체계화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기자를 은나라와 주나라의 태사로서, 기자조선은 두 나라의 스승의 나라로서 인식하였다. 단군과 더불어 기자에 매년 제를 지냈으며, 행적을 칭송하는 가묘를 세우기도 했다. 여러 학자들은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저술하였고, 만주 중심의 사관을 가졌던 안정복, 김광은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 인식의 변천
    • 초기 -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국호 사용을 제시하였다. 이후 출간된 《동국사략》, 《삼국사절요》에도 동일한 체계를 사용하였다.
    • 중기 - 16세기 이후로 등장한 사림파의 영향으로 17세기에는 중국의 하.은.주 3대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이와 연관된 기자조선-마한-신라의 계승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단군-부여.고구려.백제의 북방계와 기자-마한-신라의 남방계의 두 주류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 후기 - 안정복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으로 정리하여, 초기의 체계를 따랐다. 대한제국 이후의 계몽기 사서들은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의 계승을 수록하였다.
  • 기자의 행적에 대한 논란

조선시대의 논란은 주로 사서 내용의 불일치에 대한 것이었다. 주의 무왕을 피해 조선에 자리잡은 기자는 주나라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장유, 홍직필 등)[3]

일제 강점기

중국의 사서인 상서대전, 사기, 한서 등의 내용을 근거로 기자가 이끄는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이 부정되었다. 기자조선의 존재 부정 또는 한민족과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려는 시도는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시라토리, 이마니시 등)에 의해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로 시작되었다. 일본의 학자들은 기자동래설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며 실제로 존재했더라도 중국에서 기원했으므로 중국인이 세운 나라로 조선과는 관계없음을 주장하였다.[4]

광복 이후

광복 이후로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한 때 기자조선의 가능성을 인정하여 교과서에 언급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추세이다. 최근에는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상나라의 후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발해 근방에 정착했고, 고조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날조된 역사로 여겨 인정하지 않는다.[5]

기자조선에 대한 현재의 관점

현재 제시되어 있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관점들은 다음과 같다.

부정론

기자조선은 만들어낸 전설이며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주장 및 근거는 다음과 같다.

유적의 부재

  • 1102년(숙종 7년)에 고려의 왕이 평양에서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고 기자묘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1950년대 북조선 학자들이 발굴한 결과 '벽돌조각, 사기조각' 밖에 나온것이 없었다[6].
  •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익산에 있는 기자조선의 후손 무강왕의 무덤은 백제 무왕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 무문토기, 석관묘, 지석묘 등의 유물에서 중국 문화의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 (김정배 주장)
  • 황하 문명의 청동기와 요서 동쪽의 청동기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청동검과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검은 큰 차이가 있다. 중국식동검은 손잡이와 칼날이 일체형으로 제작되어있지만 고조선의 비파형동검은 칼날과 손잡이 그리고 장식부분 등 3가지로 구성된다. 특히 주석함유량이 중국식동검에 비하여 월등히 높다.
  •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고조선에 예의와 문화를 전했다고 하는데, 기자조선의 영토로 추정되는 요서 이동의 영역에서 은나라에서 출토된 갑골문자가 발견되지 않는다.

문헌상의 문제점

  • 한나라 시기 이후의 사서에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나타나지만 서기전 3세기 이전의 사서(논어, 죽서기년)에 기자는 수록되어 있으나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은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죽서기년에는 "기자가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건립된 후 주나라 무왕16년에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 조근하였다"라고 기록했을 뿐이다. 즉 최초의 중국 통일 왕조인 진(秦)나라 이전의 기록에는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이 없었는데 한(漢)나라에 이르러 사서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나타나며 이는 기자동래설의 조작가능성을 시사해준다.
  • 중국 진나라의 두여(杜預)는 《사기》「집해」에서 기자의 무덤(기자총)이 중국 량국 몽현(蒙懸; 현재 하남성 상구현)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평양의 유적은 위작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이마이시 류 주장)
  • 기자의 동래 시기나 주나라에 입조한 시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맞지 않는 모순이 있다.(이병도 주장)
  • 한순근(법무사)은 《태원선우씨세보》에 기록된 기자조선의 역대왕들은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7]
  • 정인보는 기자의 기(箕) 자는 임검의 검(儉) 자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발음이 변한 것이며, 검(儉)과 기(箕)는 모두 높다(高) 혹은 윗사람(上)의 뜻이라고 하였다. 즉, 고구려 환도성에 있던 기산(箕山)이란 일명 기구(箕丘)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검재"를 한역(漢譯)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떠돌이 중국인들이 고조선 고구려 백제 등으로 이민하여 들어오면서 그들에 의하여 날조되었고 사대사상이 강한 중세 조선에 이르러 사실인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8] 또한 그는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 곡주 협계현조를 들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협계현을 단계(檀溪, 단군골)라 고친 것은 이 곳에 기산(箕山), 즉 "검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정황상의 근거

  •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료하의 상류지역까지 거의다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다[9].
  • 중국 사학자들은 주변 나라의 시조를 중국인이라 종종 주장하였다[10].
  • 춘추좌씨전에 기국이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 기록되어 있고, 기(箕)자가 새겨진 은·주 시대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어, 기국은 중국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11].

긍정론

기자가 이끄는 은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실제에 바탕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기자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는지의 여부에는 이견이 있으며,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변방에 위치하였거나 그 세력이 크지 않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 주장 및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고려시대 이전에 고조선의 역사를 설명한 사서인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요임금과 같은 시기(기원전 2333년경)에 세워져 약 1500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주나라의 호왕(虎王;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돌아와 아사달에 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조선 시대에는 초기부터 《삼국지》『위지』「동이전」, 《후한서》 등에 기록된 41대 1천 년 간의 기자조선의 존재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학자들이 기자조선을 연구했으며, 세조 때에 편찬된 《동국통감》, 영조 때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등 거의 모든 사서에 기자조선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 각 시대의 사서에 기록된 조서와 사신의 글에서 중국과 만주의 나라들은 기자조선을 언급하여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 《삼국사기》에 인용된 신당서의 기록에는 '고구려에서 일신(日神), 기자.가한신(箕子可汗神)에게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國左有大穴 曰神隧 每十月 王皆自祭"
  • 기자가 이동한 경로에 해당되는 발해만 북쪽(대릉하)에서 해당 시대의 '기(㠱)'자 명문이 새겨진 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제사용 청동 그릇들이 30여점 발굴되었다. [출처 필요] [12]

신채호의 주장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원전 323년 경에 불조선(番韓)의 임금이 기자의 후손이 된 후에 자칭 왕이라 칭한 번조선을 기자조선이라 불렀다고 주장하였다.[13]

기타 주장

  • 천관우는, 기자가 이끄는 집단이 고조선과 주나라의 접경지대인 요서 지역에 정착하여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고, 연나라의 확장에 밀려 요동을 거쳐 대동강 유역까지 이동했다고 주장하였다.
  • 서영수는, 기자 일족이 대릉하 유역에 거주하다가 춘추 말기 이전에 소멸되었으나, 고조선을 대체했다고는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 윤내현은, 기자조선이 주나라의 동북 지방인 하북성 연산, 난하의 주변에 자리잡아 고조선과 병존했다고 주장하였다.
  • 이기백은, 기자조선은 요서 지방에 있었으며, 춘추시대 말기에 소멸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송호정은, 유적이나 유물로 보아 기자의 후손이 요서 지방에 살았던 것은 맞지만, 연나라에 복속된 작은 나라였다고 주장하였다.
  • 이상시는, 기자는 한족(漢族)이 아닌 동이족(桓族)이라고 주장하였다.

기자조선의 역년 및 치세

기자조선을 긍정하는 학자들에 의하여 태원선우씨세보에 나타난 왕들을 기자조선의 왕들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자료인 태원선우씨세보에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듯이 기후(箕詡), 즉 가덕왕 이전 왕은 모두 실제왕(實際王)이 아니고 추존왕(追尊王)이다.[14]

《기자지》, 《태원선우씨세보》에는 기자조선의 각 왕의 명칭과 치세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사강》과 그 역년이 같다. 명칭은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대동사강의 위덕왕(威德王)과 창덕왕(昌德王)이 《태원선우씨세보》에는 성덕왕(盛德王)과 덕창왕(德昌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기자지(箕子志)》와 《대동사강》에 기록된 기자조선 역대 왕의 역년은 다음과 같다.

  1. 태조문성왕(太祖文聖王) 기자. 자서여. 재위 기원전 1126년 - 기원전 1082년
  2. 장혜왕(莊惠王) 송. 재위 기원전 1082년 - 기원전 1057년
  3. 경효왕(敬孝王) 순. 재위 기원전 1057년 - 기원전 1030년
  4. 공정왕(恭貞王) 백. 재위 기원전 1030년 - 기원전 1000년
  5. 문무왕(文武王) 춘. 재위 기원전 1000년 - 기원전 972년
  6. 태원왕(太原王) 공. 재위 기원전 972년 - 기원전 968년
  7. 경창왕(景昌王) 장. 재위 기원전 968년 - 기원전 957년
  8. 흥평왕(興平王) 재위 기원전 957년 - 기원전 943년
  9. 철위왕(哲威王) 조. 재위 기원전 943년 - 기원전 925년
  10. 선혜왕(宣惠王) 삭. 재위 기원전 925년 - 기원전 896년
  11. 의양왕(誼襄王) 사. 재위 기원전 896년 - 기원전 843년
  12. 문혜왕(文惠王) 염. 재위 기원전 843년 - 기원전 793년
  13. 위덕왕(威德王) 월. 재위 기원전 793년 - 기원전 778년
  14. 도회왕(悼懷王) 재위 기원전 778년 - 기원전 776년
  15. 문열왕(文烈王) 우. 재위 기원전 776년 - 기원전 761년
  16. 창국왕(昌國王) 재위 기원전 761년 - 기원전 748년
  17. 무성왕(武成王) 평. 재위 기원전 748년 - 기원전 722년
  18. 정경왕(貞敬王) 궐. 재위 기원전 722년 - 기원전 703년
  19. 낙성왕(樂成王) 회. 재위 기원전 703년 - 기원전 675년
  20. 효종왕(孝宗王) 존. 재위 기원전 675년 - 기원전 658년
  21. 천노왕(天老王) 효. 재위 기원전 658년 - 기원전 634년
  22. 수도왕(修道王) 배. 재위 기원전 634년 - 기원전 615년
  23. 휘양왕(徽襄王) 재위 기원전 615년 - 기원전 594년
  24. 봉일왕(奉日王) 삼. 재위 기원전 594년 - 기원전 578년
  25. 창덕왕(昌德王) 근. 재위 기원전 578년 - 기원전 560년
  26. 수성왕(壽聖王) 삭. 재위 기원전 560년 - 기원전 519년
  27. 영걸왕(英傑王) 재위 기원전 519년 - 기원전 503년
  28. 일민왕(逸民王) 강. 재위 기원전 503년 - 기원전 486년
  29. 제세왕(濟世王) 혼. 재위 기원전 486년 - 기원전 465년
  30. 청국왕(淸國王) 재위 기원전 465년 - 기원전 432년
  31. 도국왕(導國王) 증. 재위 기원전 432년 - 기원전 413년
  32. 혁성왕(赫聖王) 재위 기원전 413년 - 기원전 385년
  33. 화라왕(和羅王) 재위 기원전 385년 - 기원전 369년
  34. 설문왕(說文王) 하. 재위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61년
  35. 경순왕(慶順王) 재위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42년
  36. 가덕왕(嘉德王) 재위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15년
  37. 삼로왕(三老王) 재위 기원전 315년 - 기원전 290년
  38. 현문왕(顯文王) 석. 재위 기원전 290년 - 기원전 251년
  39. 장평왕(章平王) 재위 기원전 251년 - 기원전 232년
  40. 종통왕(宗統王) 자부. 재위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20년
  41. 애왕(哀王) 기준. 재위 기원전 220년 - 기원전 195년

같이 보기

주석

  1. 한순근,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 (기자조선편 개설)
  2. 박광용, 「단군인식의 역사적 변천 - 조선시대 -」, 《단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3.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4.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5.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6.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p.81 ~ 82
  7. 한순근,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1]
  8. 정인보의 조선사 연구, 정인보 지음, 박성수 편역, 2000
  9.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p.82
  10.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p.82
  11. 두산백과사전 EnCyber - '기자조선' 참조
  12. 1973년 중국 요녕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箕候)'와 '고죽(孤竹)'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방정(方鼎) 등 청동 예기(禮器) 6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의 제작 시기는 은나라 말기이므로 기자(箕子)의 생존 시기와 일치한다. 기자가 자신의 족속들을 데리고 피신한 곳으로 추측되는 지역은 난하(爛河)와 대릉하(大陵河) 사이의 객좌현으로,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다.
  13.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은 신한(혹은 진한)이 다스렸고 고조선의 제후(諸候)중에 불한이 있었는데 기원전 323년 경에 기자의 자손인 기후가 고조선의 제후국인 불한의 임금이 된후 고조선의 신하국이 될 것을 거부하여 기자조선이라 일컬었다고 주장하였다. 불한 조선후(朝鮮侯) 기씨(箕氏)가 신한(辰韓) 조선왕 개씨(諧氏)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서 삼조선 분립의 판국을 열었는데, 불한이 신한을 일컬은 것이 연(燕)이 왕을 일컬은 뒤요, 연이 왕을 일컬은 것은사기 에 주(周) 에 신정왕 46 년, 기원전 323 년이니 신말불 삼조선의 분립이 기원전 4 세기 경임을 확증하는 것이고, 대부례는 대개 불한의 유력한 모사(謨士)니,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이라 일컫게 하고, 연과 결탁하여 동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이가 또한 대부례이니 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 인물일 것이다.
  14.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 한순근

참고문헌 및 링크

  • 이형구, 한국학지식 - '기자조선'
  • 노태돈, 한국학지식 - '기자동래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기자조선'
  • 김부식, 《삼국사기
  • 정인지, 《고려사
  • 조선왕조실록
  • 정인기, 《기자지(箕子志)》, 1879
  • 이이, 《기자실기(箕子實記)》, 1580
  • 허목, 《기자세가(箕子世家)》, 숙종대
  • 이종휘, 《기자세가》, 1805
  • 오명제, 《조선세기》, 명나라
  • 김광, 《대동사강(大東史綱)》, 대동사강사, 1926
  • 선우덕(鮮于悳),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 태원선우씨세보소, 1932
  • 천관우, 《箕子攷》, 연세대학교 동방학지 15집, 1974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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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