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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민당은 [[코민테른]]을 등에 업은 파업노동자들의 시위를 무장 해산시키고 공산당원과 좌파당원을 당내에서 강제로 축출한 후 중국에 대한 북벌을 완수한 뒤 중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고 장제스 또한 당내 권력을 장악하고 다시 권력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국내외 위급한 정세로 인해 중앙집권식 통치를 표방하면서 마찬가지로 민주정치를 시행할 수 없었던 국민당은 북벌 후로 국가 혼란을 나름 수습해나가는 한편 [[소비에트 연방]]과 외교적으로 단교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중화민국]] 북양정부를 지원했던 서방의 시장경제 세력과 화해 노력을 하면서 자본경제를 표방하였다. 그럼에도 소련, 서방, 일본 등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이권을 얻고자 하였으므로, 중국은 안정 속의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중국 국민당은 [[코민테른]]을 등에 업은 파업노동자들의 시위를 무장 해산시키고 공산당원과 좌파당원을 당내에서 강제로 축출한 후 중국에 대한 북벌을 완수한 뒤 중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고 장제스 또한 당내 권력을 장악하고 다시 권력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국내외 위급한 정세로 인해 중앙집권식 통치를 표방하면서 마찬가지로 민주정치를 시행할 수 없었던 국민당은 북벌 후로 국가 혼란을 나름 수습해나가는 한편 [[소비에트 연방]]과 외교적으로 단교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중화민국]] 북양정부를 지원했던 서방의 시장경제 세력과 화해 노력을 하면서 자본경제를 표방하였다. 그럼에도 소련, 서방, 일본 등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이권을 얻고자 하였으므로, 중국은 안정 속의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1927년]] [[7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대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제1차 국공 합작의 종료를 선언하고, 이후 같은 해 [[8월 1일]] [[난창 봉기]]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키면서 정권에 대한 무력도전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도시지역에서 무장혁명 입지가 줄어든 후는 지하로 숨어들어 혁명을 계속 벌여나갔다. [[마오쩌둥]] 등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체 무장혁명을 통해 정권을 노리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홍군]]을 조직, 농촌지역과 산간오지로 잠입하여 소비에트를 설치하며 세력을 도모해갔으며 사회 각계의 친공수행원들은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지하활동을 펴면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끄는 작업을 펴게 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 간 모두 정권을 쥐고자 하였으므로 제1차 [[국공 내전]]이 계속되었으며, 혼란을 틈 탄 [[일본]]의 침략이 뒤이어졌다.
[[1927년]] [[7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대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제1차 국공 합작의 종료를 선언하고, 이후 같은 해 [[8월 1일]] [[난창 봉기]]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키면서 정권에 대한 무력도전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도시지역에서 무장혁명 입지가 줄어든 후는 지하로 숨어들어 혁명을 계속 벌여나갔다. [[마오쩌둥]] 등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체 무장혁명을 통해 정권을 노리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홍군]]을 조직, 농촌지역과 산간오지로 잠입하여 소비에트를 설치하며 세력을 도모해갔으며 사회 각계의 친공수행원들은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지하활동을 펴면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끄는 작업을 펴게 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 간 모두 정권을 쥐고자 하였으므로 제1차 [[국공 내전]]이 계속되었으며, 혼란을 틈 탄 [[일본]]의 침략이 뒤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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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중국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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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친위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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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5일 (화) 12:58 판

4•12 사건
국공내전의 일부
날짜1927년 4월 12일
장소
결과 국민당 내 공산당 분파 전원 숙청
교전국
국민당 기중국 국민당, 청방 및 삼합회 등 중국 공산당 기 중국 공산당코민테른, 상하이 파업 노동자들
지휘관
국민당 기 바이충시 중국 공산당 기 천두슈
병력
국민당군 약 5천명, 상하이 조직단원 약 천명 공산당원, 상하이 노동자들 약 수천명
피해 규모
미상 300-400명 사망, 5,000여 명 실종

틀:전역상자 중국 내전 4•12 사건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발생한 중국 국민당의 중공 초기 혁명 진영에 대한 무력을 동원한 진압과 공격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소련에 의해 진행된 제1차 국공 합작이 종료됨을 상징하였으며, 제1차 국공 내전이 이어지게 되었다.

개요

북벌 기간 중 1927년, 장제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 공격으로 공산당원의 공산혁명이 타격을 입었고 소련에 의한 제1차 국공합작의 종결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진압에 찬성한 쪽에서는 ‘공산당원의 숙청, 정화(이른바 중국어 정체자: 淸黨, 병음: qīng dǎng 청당[*])’로 청당이라 불렀고, 반대파 쪽에서는 ‘공산 혁명의 기도를 막았다’는 뜻에서 ‘4•12 반혁명정변(중국어 간체자: 四一二反革命政变)’ 또는 ‘4•12 참안(중국어: 四一二慘案)’으로 불렀다.

이 사건 이후 몇 달 동안 중국 전역에 공산당의 무장혁명에 대한 대대적인 경계와 숙청이 이뤄져 공산주의자, 좌파 당원들이 당에서 축출되었고 수배령이 내려져 많은 인사들이 체포, 투옥, 처형되었으며 당원들이 국민당으로 전향하거나 탈당하였다. 국민당의 진압에 항의했던 이들은 공산당으로 비밀 입당하거나 공산혁명을 지지하는 쪽에서 시위를 펼쳐나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두슈와 더불어 대표적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리다자오가 베이징에서 처형되는 등 코민테른에 의한 혁명운동의 세력이 몇 년간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배경과 원인

북벌 단행을 위해 소련과 연대했던 쑨원은 1923년부터 소련 및 공산당원에 대한 전략적 포용책을 마련하고 소련의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광저우에 손일선대학과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북벌을 위한 무관과 혁명지도자를 육성하였으며 베이징을 포함한 북부 지방에 대해 북벌을 준비하였다. 1925년 쑨원의 사후, 중국 국민당은 왕징웨이가 임시 당수에 오르고 장제스가 군권을 쥐는 체제로 조직이 짜여지는 중에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기류가 당내부로 흘러들었고 당내 갈등이 빚어졌다. 동시에 소련은 레닌 사후로, 스탈린트로츠키가 중국에 친공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혁명 전략을 짜고 경쟁하였는데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국공합작을 발판으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에 기반한 토지혁명과 민족혁명을 계속 이행하고자 하였고 국민당은 무산계급독재가 아닌 국가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결과

중국 국민당은 코민테른을 등에 업은 파업노동자들의 시위를 무장 해산시키고 공산당원과 좌파당원을 당내에서 강제로 축출한 후 중국에 대한 북벌을 완수한 뒤 중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고 장제스 또한 당내 권력을 장악하고 다시 권력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국내외 위급한 정세로 인해 중앙집권식 통치를 표방하면서 마찬가지로 민주정치를 시행할 수 없었던 국민당은 북벌 후로 국가 혼란을 나름 수습해나가는 한편 소비에트 연방과 외교적으로 단교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중화민국 북양정부를 지원했던 서방의 시장경제 세력과 화해 노력을 하면서 자본경제를 표방하였다. 그럼에도 소련, 서방, 일본 등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이권을 얻고자 하였으므로, 중국은 안정 속의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1927년 7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대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제1차 국공 합작의 종료를 선언하고, 이후 같은 해 8월 1일 난창 봉기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키면서 정권에 대한 무력도전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도시지역에서 무장혁명 입지가 줄어든 후는 지하로 숨어들어 혁명을 계속 벌여나갔다. 마오쩌둥 등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체 무장혁명을 통해 정권을 노리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홍군을 조직, 농촌지역과 산간오지로 잠입하여 소비에트를 설치하며 세력을 도모해갔으며 사회 각계의 친공수행원들은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지하활동을 펴면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끄는 작업을 펴게 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 간 모두 정권을 쥐고자 하였으므로 제1차 국공 내전이 계속되었으며, 혼란을 틈 탄 일본의 침략이 뒤이어졌다.

국민당 좌파에서 쑹칭링을 비롯한 친공파 세력은 장제스에 반기를 공식적으로 들고 공산당의 혁명노선에 합쳐지는 방향으로 틀며 세력을 규합해나갔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1933년 발표한 장편소설 《인간의 조건》은 바로 상하이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