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해외항공 781편 추락 사고: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53번째 줄: 53번째 줄:


승객을 재현한 더미 또한 가능한 사고 당시의 승객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동체안에 착석 상태로 배열되었다. 사고를 재현할때 조사관들은 의도적으로 공기 압력을 증가시켜 그것까지 폭발시킨 결과로 더미 모델의 파열을 유도했다. 더미의 이동 궤적은 좌석에서 들어 올려진것과 동시에 천정에 머리를 쾅 부딫쳤는데 이는 기밀실내에서의 폭발 순간 두개골 파열의 원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승객을 재현한 더미 또한 가능한 사고 당시의 승객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동체안에 착석 상태로 배열되었다. 사고를 재현할때 조사관들은 의도적으로 공기 압력을 증가시켜 그것까지 폭발시킨 결과로 더미 모델의 파열을 유도했다. 더미의 이동 궤적은 좌석에서 들어 올려진것과 동시에 천정에 머리를 쾅 부딫쳤는데 이는 기밀실내에서의 폭발 순간 두개골 파열의 원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고기의 파편은 마침내 해저에서 발견되고 그 다음에 인양되어 조사를 위해 왕립 항공 연구소로 이송되었다. 파편의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항공기가 공중 분해되었음은 명백했으며, 처음에 사고기가 폭탄에 의해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다음 의혹으로는 엔진 터빈의 폭발 가능성으로 이어졌으며, 수정된 것들은 다른 코멧의 터빈 링을 둘러싼 것과 더불어 터빈 디스크의 파손에 장갑판이 포함된 것이었다.


== 원본 조사 ==
== 원본 조사 ==

2016년 2월 26일 (금) 11:19 판

영국해외항공 781편 추락 사고

개요
발생일시 1954년 1월 10일
발생유형 공중분해
발생원인 금속 피로에 의한 기체 결함
발생장소 지중해 엘바 섬
비행 내용
기종 드 하빌랜드 DH.106 코멧 1
소속 영국해외항공
등록번호 G-ALYP
출발지 싱가포르 싱가포르
갈롱 공항
경유지 이탈리아 이탈리아 로마
참피노 공항
목적지 영국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
탑승승객 29
승무원 6
피해 내용
사망자 35
부상자 0
생존자 0

영국해외항공 781편 추락 사고(영어: BOAC Flight 781)는, 1954년 1월 10일 로마 참피노 공항(이탈리아 로마)발 히드로 공항(영국 런던)행 영국해외항공 781편의 드 하빌랜드 DH.106 코멧 항공기가 지중해에 위치한 엘바 섬 상공을 비행하던 중 폭발적 감압에 의한 공중분해로 추락하여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사고이다. 그 가운데 사고기는 세번째로 인도된 코멧 항공기였다.

승객과 승무원

비행 승무원 가운데 기장은 영국해외항공의 젋은 조종사 중 한명인 앨런 깁슨(31세)이 맡았으며, 그는 영국 공군에서 비행을 시작하여 1946년 영국해외항공에 입사하였다. 상당한 비행 경험이 있었으며 6,500시간 이상의 비행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3년 전의 1951년에 에르메스 항공기의 강제 착륙이라는 사고 이력이 있었으며 사고 당시 그의 비행에서 제대로된 대응으로 칭찬을 받은 적 있었다.

부조종사는 윌리엄 존 버리(33세)였으며 대략 총 4,900시간의 비행 경력이 있었다. 항공 기관사는 프랜시스 찰스 맥도날드(27세), 무선 교신 기사는 루크 패트릭 맥머혼(32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720시간의 비행시간과 3,600시간의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승객 29명 중 10명은 어린이였다. 승객 가운데 BBC에서 일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군사 역사학자인 체스터 윌모트, 원인의 손으로 유명한 바하이교의 도로시 비셔 베이커도 있었다.

사고에 이르는 순간

전직 영국해외항공 기술자였던 게리 불은 로마에서 항공기를 조사할때 "경미한 손상"을 주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처음에 781편이 제대로 비행하고 있을거라 믿었기에 어느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불과 같은 팀의 기술자들은 후에 남아프리카항공 201편의 비행전 해당 항공기의 검사를 실시했다.

1954년 1월 10일 9시 34분에 781편은 런던으로의 비행을 위한 최종 절차를 마치고 이륙했다. 9시 50분에는 같은 비행 경로의 낮은 고도로 비행하고 있는 영국해외항공의 아르고넛으로 명명된 G-ALHJ 항공기의 존슨 기장이 781편의 깁슨 기장과 교신했다. 기상 상태에 대한 대화가 무선 교신으로 실시되는 동안 교신은 돌연 끊어졌다. 마지막 교신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깁슨 기장의 "조지 움직임은 어때, 너는 나의.."라는 메세지였다. 후에 어부들은 파편들이 바다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히드로공항에서는 도착 안내에서 781편이 늦어지고 있다고 표시했으나 오후 1시 30분에 도착 안내에서 781편이 사라졌다.

수색과 회수

1954년 1월 11일의 뉴욕 타임즈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올라왔다.

오늘 아침 영국의 코멧 항공기가 이탈리아 서해안에 위치한 엘바섬과 몬테크리스토섬 사이에 추락하여 35명이 사망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실낱같은 희망에도 29명의 승객과 6명의 영국해외항공 승무원 가운데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으며 자정이 지난 한 시간 후에 15구의 시신이 회수된 것이 전부다.

하지만 낮은 시계와 높은 파도에도 불구하고 수색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비공식 승객 명단이 작성되어 로마에 거주하는 해당 승객의 가까운 친인척에게 통보되었다. 비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승객 가운데 미국인은 탑승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승객 가운데 남성 17명, 여성 8명과 어린이 3명 그리고 아기 한명이 포함되었다. 승무원 가운데는 객실 승무원도 있다.

사고 조사의 첫번째 단계는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1954년만 해도 사고기에는 블랙박스가 없었던데다 조종실 음성 기록장치 또는 비행 기록 장치도 없었기에 평가조차 어려웠다. 항공 사고 조사를 위한 설정된 계획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고기의 수색이 광범위해지면서 영국 해군 함정인 바힐과 감비아함 뿐만 아니라 몰타에서 민간 구조선인 씨 살보르가 포함되어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색은 최초로 수중 TV 카메라의 사용이 실시되었으며, 수중 깊은 곳의 파편 위치와 인양을 돕기 위한 영국 해군성 연구소의 조지 맥 니스가 이끄는 팀이 참여하는 것에 의해 확대되었다.

목격자들은 이탈리아 어부들이었으며 지상에서 사고 지점을 추적하기 위해 준비했다. 사고기가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목격하지마자 어부들은 시신 회수와 더불어 혹시나 있을 생존자를 구조하기 위해 현장으로 이동했지만 거기에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고의 원인과 관련된 증거를 더 찾기 위해 시신의 부검을 위한 검시관이 파견되었다. 부검이 진행되는 동안 부검의인 안토니오 포나리가 팔이 부러지는 등 팔의 손상을 발견했으며 그것은 사망 이후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포나리는 부상의 패턴이 뚜렸함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망자들의 사인을 확인하고 밝혔다. 이 부상은 두개골 골절과 파열이고 그 밖에 폐 손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포나리는 폭발의 증거를 발견하지는 못한데다 부상 패턴으로 혼란을 느꼈다.

그 파열된 폐는 폐가 부풀어 오르고 파열된 원인이 기압차가 나는 곳에서의 갑작스러운 감압으로 인한 항공기 객실의 감압 현상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사고를 판버러에 위치한 왕립 항공 연구소(RAE)의 실제 비행기를 같은 조건으로 모의 실험한 것은 그 이론을 뒷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두개골 골절의 원인도 확인되었다. 이 실험을 위해 모델 동체는 코멧과 유사하게 제작되었다.

승객을 재현한 더미 또한 가능한 사고 당시의 승객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동체안에 착석 상태로 배열되었다. 사고를 재현할때 조사관들은 의도적으로 공기 압력을 증가시켜 그것까지 폭발시킨 결과로 더미 모델의 파열을 유도했다. 더미의 이동 궤적은 좌석에서 들어 올려진것과 동시에 천정에 머리를 쾅 부딫쳤는데 이는 기밀실내에서의 폭발 순간 두개골 파열의 원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고기의 파편은 마침내 해저에서 발견되고 그 다음에 인양되어 조사를 위해 왕립 항공 연구소로 이송되었다. 파편의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항공기가 공중 분해되었음은 명백했으며, 처음에 사고기가 폭탄에 의해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다음 의혹으로는 엔진 터빈의 폭발 가능성으로 이어졌으며, 수정된 것들은 다른 코멧의 터빈 링을 둘러싼 것과 더불어 터빈 디스크의 파손에 장갑판이 포함된 것이었다.

원본 조사

틀:20세기의 항공 사고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