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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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가치===
===3가지 가치===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 (오직 은총으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 (오직 은총으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ref> 레나트 피노마 저, 엄진섭 역, <<승리의 믿음>>, 컨콜디아사, 2009 </ref>



여기에 Sola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만으로)를 추가하기도 한다.
여기에 Sola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만으로)를 추가하기도 한다.

2016년 1월 15일 (금) 03:40 판

루터교회 (영어: Lutheranism 또는 Lutheran Church) 또는 루터교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따르는 개신교 교파이다. 루터교회는 스스로 개신교의 장자 또는 효시임을 자임하고 있다[1].


역사

루터교회라는 호칭의 유래

마르틴 루터는 본래 새로운 교파를 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오히려 그동안 교회 안에 들어온, 성경적 근거가 없는 풍습들을 정화하고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을 고찰하고 이를 고치려 했다. ‘루터란’이라는 명칭은 루터를 비판하는 이들이 루터파를 경멸하는 말로 사용하였는데, 나중에는 이 말이 루터교회 스스로도 자신들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루터교회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로 퍼지게 된다. 루터교회는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루터 자신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 '루터'를 붙여서 부르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더 이상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우리들을 루터교인이라 부르지 말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러 달라고 하였다. 루터가 무엇인가? 내 교리는 확실히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았다. 사도 바울고린도전서 3장에서 자기들을 바울파 혹은 베드로파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도대체 이 약하고 추한 시체 같은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자녀들에게 나의 쓸모없는 이름에서 유래한 이름을 붙이겠는가? 아니, 안 된다. 나의 친구들이여, 모든 파당의 이름을 제해 버리고 우리들을 그리스도교리를 가지고 있는 그 분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 불러 주시오.

”루터교는 온 세상의 그리스도교회는 하나임을 믿는다.“교회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나의 거룩한 교회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이 교회는 복음이 순수하게 설교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의 회중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참 일치를 위해서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대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인간의 전통, 곧 인간이 만든 의식이나 예식이 어디서나 같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에베소서 4:5,6)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2]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제7조

신학논쟁과 일치

루터의 사후 독일에서의 루터 신학은 비텐베르크에 중심을 둔 멜란히톤인문주의를 대표하는 ‘필립파’와 에나를 중심으로 한 ‘정통 루터파’ 간의 갈등으로 갈라졌다. 이들 간에 있었던 여러 논쟁들의 중재안과 칼뱅주의와의 논쟁에서 주장된 것을 채택한 것이 ‘일치 신조문’(1577년)이다. ‘일치 신조문’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50주년 기념으로 출판된 ‘일치서’(1580)에 다른 루터교 신조들과 함께 게재되었다.[3]

루터교회의 확산

독일과 북유럽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회는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지역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또한 1530년 공식적으로 독일에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루터교회는 독일과 한자 동맹 시절부터 해양 교역이 활발하던 유틀란트 반도(덴마크), 스칸디나비아 지역으로 점점 퍼져나갔다.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의 수하에서 공부했던 스웨덴 신학자 울라우스 패트리는 스웨덴으로 돌아가 스칸디나비아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1527년 이후 북구 제국 스웨덴핀란드, 1537년 이후 덴마크노르웨이, 1539년 이후 아이슬란드와 그리고 발트 해의 여러 국가들 (1523 - 39)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수용하고 로마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로마가톨릭 교회의 교세가 가장 약한 곳이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이다. 이후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일부 동부 유럽 지역으로도 전파되었다. 독일에서는 ‘일치서’ 이후로부터 17세기 말까지는 루터교 정통주의의 시대이다. 이후 정통주의는 경건주의로 대체되었고, 경건주의 다음으로는 계몽주의가 뒤따랐다. 19세기 이후로 루터주의는 여러 다양한 신학 조류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곤 했다. 북유럽(스칸디나비아와 아이슬란드)의 루터교회는 고교회파의 전통을 따르며 모든 면에서 사실상 성공회와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 북유럽의 루터교는 대체로 주교제 교회로서 유지되며 주교, 사제, 부제삼성직을 유지하며 성직자에 대해 저교회파 루터교와는 달리 신부(사제)라는 호칭을 쓴다.

독일 개신교회(EKD)

사실상 독일에서 개신교회는 거의 루터교회를 의미한다. 독일 개신교를 대표하는 독일 개신교회(EKD)의 몸통을 이루는 교회 역시 루터교회이다. 독일 개신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함께 독일 기독민주당의 한축을 담당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배경 때문에 루터교 출신의 정치인들도 다수 배출되어 왔다. 라인강의 기적을 만든 경제장관이자 총리였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리 브란트 총리, 헬무트 슈미트 총리, 앙겔라 메르켈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요하임 가우크 대통령은 모두 루터교인이다.

오세아니아와 미국

아메리카 대륙오세아니아 지역에서의 루터교는 주로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30년 전쟁’의 전화를 피해 일부 루터교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유럽 선교협의회들로부터 온 목사들의 목양을 받았다. ‘미국 루터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뮐렌베르그는 1742년 프랑케 할레 선교회에서 파송되어 온 후, 북미의 루터교도들을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연합시키고 순수성을 보존하려고 힘썼다. 그는 루터교도들을 조직하는 데도 큰 역할을 담당하여 1748년 미국 최초의 루터교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주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 이주한 루터교인들은 기후가 비슷한 미국 북부 지역에 많이 정착하였다. 이 때문에 현재도 미네소타 노스다코다, 사우스다코다는 전체 인구에서 루터교인 비중이 가장 크며, 이외 와이오밍, 위스콘신, 미주리에서도 루터교회의 교세가 크다.[4]

미국 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LCMS)

기독교 한국 루터회와 형제교회 관계에 있는 미국의 미주리 시노드(LCMS)는 1839년 750명의 독일 작센의 거주자들이 ‘연합주의’와 종교의 합리주의를 피해 미국 미주리주로 이주한데서 시작된다. 월터 목사의 영도 아래 이들 이민자들은 바바리아의 뢰헤가 보낸 일단의 목사들과 함께 1847년에 첫 대회를 열었다. 미주리시노드는 1997년 선교 15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미국 개신교회 중 대표적인 보수 교회로 낙태 문제와 동성애 문제,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5]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미국에서 미주리시노드와 두 개의 축을 이루는 루터교회이다. 교세가 미주리시노드보다 더 크고 동성애와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 또한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연합에 미주리시노드보다 더 적극적이다. 2013년 여성 목사인 엘리자베스 이튼이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총수로 당선되기도 했다.[6]

아시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루터 교회는 주로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운 교회이다. 두 대륙 가운데서도 아프리카탄자니아 등 일부 국가와 아시아인도네시아 교회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한국 루터교회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한국에 최초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 카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는 루터교 목사였다. 중국 선교사로 파견되어 한문과 중국어에 능통했다. 1832년 황해도 몽금포(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용연군 소속)에 도착하였고 백령도를 거쳐 충청남도 고대도(현재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로 갔다. 고대도에서 25일간 체류하며 주민들에게 감자와 한문성경을 주었고 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려고 하였다. 이후에 한글을 프로이센의 선교 잡지에 소개했는데 이는 한글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귀츨라프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조선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때에 그 진리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7]

귀츨라프 선교사의 방문을 기념하여 고대도에는 고대도 교회(장로교 합신 소속)가 세워져 있다. 또 한국 루터교회에서 주도해 만든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이승규 기자, [8]

한국전쟁과 미국 루터교회 종군목사

한국전쟁은 루터교회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미국 루터교회 종군목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당시 한국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신학과) 출신 지원용은 루터교회 종군목사를 만나며 루터교 신학을 접하였다. 이후 지원용은 종군목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루터교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고 최초의 한국인 루터교 목사가 되었다.

미국 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의 선교

1958년 1월 13일 지원용 목사와 미국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 소속 M. 도로우, P. 바트링, J. 리머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며 본격적인 루터교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됐다. 루터교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던 50년대 한국 교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자는 기치 아래 선교를 시작하였다.[9] 당시 한국 교회는 전쟁 후 교파 분열과 신흥 종교의 난립이라는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루터교회는 1959년 라디오방송 루터란아워에서 '이것이 인생이다'를 방송하며 한국 교회 방송 선교의 장을 열었다. 새생명으로 문서선교를 시작했고 컨콜디아 출판사를 통해 당시 한국에 필요하던 루터교회를 비롯한 개신교회 주요 저작들을 출간했다. 한국 루터교회는 교세 확장을 애초에 목적으로 두지 않았는데 이미 다른 교단이 일군 성과들을 더 잘 발전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10]

루터대학교 설립, 베델성서연구

한국 루터교회는 1966년 루터신학교(현 루터대학교)를 세워 루터교회 목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또 한국 교회에서 생기는 교파 분열과 신흥 종교의 발흥의 문제를 성경 연구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1974년부터 베델성서연구를 시작하였다. 베델성서연구는 미국 루터교회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성경 공부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 운동은 한국 장로교, 감리교를 비롯한 개신교회는 물론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일부 참여할만큼 영향을 끼쳤다. 현재도 베델성서연구는 한국 개신교회 내에서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고 기독교한국루터회가 계속해서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루터교세계연맹(LWF)

루터교 세계 연맹(LWF)은 1947년 세계 루터란들 사이의 공존과 협조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복음 전파와 기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 루터교회들과 그룹들을 지원하며 한편으로, 기독교의 가시적 일치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실천하려는 진보적 기독교 운동인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고양시킨다. 그 외에도 공동체로서 사회적, 경제정의인권을 증진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현재 124개 루터교회가 회원 교회로 가입하여 참여하고 있으며, 전 세계 루터란의 94% 이상이 그 회원이다. 그 본부는 세계교회협의회(WCC)본부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 있으며, 한국 루터교회는 1972년에 가입하였다.

루터교평의회(ILC, International Lutheran Council)

루터교평의회는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루터교 연합 기관이다. 34개 교단이 현재 회원 교단으로 있으며 루터교세계연맹보다 한층 보수적인 신앙을 추구한다. 한국 루터교회는 루터교세계연맹뿐 아니라 루터교평의회에도 가입돼 있다. [11]

교리

고대교회의 신조들인 니케아 신조(381), 사도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마르틴 루터필리프 멜란히톤과 자신의 신앙을 정리한 신앙고백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통해 신앙을 고백한다.[12] 루터교회의 신학을 관통하는 3가지 가치가 있는데 이는 개혁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가지 가치

  •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 (오직 은총으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13]


여기에 Sola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만으로)를 추가하기도 한다.

만인사제설

마르틴 루터는 특정한 사람만이 사제가 아니라 평민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사제이며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라틴어로 집전되던 미사를 독일어로 드리는 예배로 바꾸었다. 회중들이 성경의 메시지를 직접 읽게 됐고 예배에서 목사의 설교를 이해하며 들을 수 있게 됐다. 일부 사제가 중심으로 드리던 미사를 모든 회중이 참여하는 예배로 바꾸었다. 때문에 루터교회는 일부 사람만 부르던 중세 교회의 음악을 개혁하여 모든 회중이 다 같이 찬양을 부르는 코랄(Chorale)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14]

예배(Gottesdinest) 용어의 등장

중세 교회는 하나님께 미사, 즉 희생제의를 드린다고 생각했다.[15] 이를 통해 하나님께 인간이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이런 희생제의를 부정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예배가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Gottesdinest(하나님이 일하신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루터교회에서는 예배 시작 전에 '축제를 시작합시다'라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축제로 여기고 여기에 참여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us)의 입장

중세 교회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성인의 기도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특별히 많은 성인 가운데에서도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는 죄인이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루터교회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중재자는 오직 그리스도 하나여야하며 성인과 성모를 통하지 않고 그에게 직접 나아가는 것이 성경에 부합한다고 보았다.[16]

마리아와 성인에 대한 입장

오직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루터교회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변증서에서 성모 마리아와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를 강하게 비판하였다.[17]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재자이므로 성모와 성인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가치를 낮춘다고 보았다. 루터교회의 예배 의식은 성공회와 비슷한 면이 많지만 성모와 성인에게 기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단 마리아에 대한 기도, 찬양을 인정하지 않지만 마리아를 좋은 믿음의 모범으로 여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마그니피캇)을 예배 때 부르기도 한다. 루터교인이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마그니피캇을 노래로 짓기도 하였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인들에 대한 축일을 루터교회에서는 기념일로 바꾸었다. 성인들에 대한 찬양의 의미를 빼고 믿음의 모범으로서만 기념한다. 한국 루터교회 역시 교회 달력에 성인들의 기념일을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기념할 뿐이며 로마가톨릭교회처럼 축일을 따로 거행하지는 않는다.

성찬 신학

실재설 및 공재설

마르틴 루터는 중세 로마가톨릭 교회의 성찬 신학을 비판했다. 사제의 축성에 따라 떡과 포도주가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화체설을 부정하였다. 성찬에 참예하는 이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에야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루터교회의 성찬 때는 목사가 떡과 포도주에 십자성호(축도)를 그을 수도 있고 긋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행위에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18]

이종성찬

루터교는 떡만을 분배하는 천주교와 달리 떡과 포도주를 모두 평신도에게 준다. 이는 만인제사장설에 근거한 것으로 누구나 그리스도의 피를 받을 수 있다는 신학에서 비롯됐다. 필리프 멜란히톤은 예배 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사제만 먹을 수 있던 포도주의 잔을 평신도에게 내밀었다. 이는 루터교회의개혁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루터교회가 이종성찬을 과감하게 하게 된 것은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의 유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체코에 남아있던 후스파가 루터의 개혁 당시, 대거 루터교회를 지지하고 가담하면서 후스가 주장한 이종성찬 주장도 루터교회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된다.

개혁교회와의 화해

종교개혁 당시 개혁교회의 성찬론인 영적임재설은 루터교회의 실재설과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19]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는 마르부르크에서 연합을 위해 만나 대부분의 신학에서 일치를 보았으나 성찬에 대해서는 끝내 일치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개혁교회와는 같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관계에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로이엔베르크에서 루터교 신학자와 개혁교 신학자가 만나 루터교회의 실재설과 개혁교회의 영적임재설이 서로 수용할 수 있는 입장임을 확인하였다. 이후 개혁교회와의 연합이 활발히 이루어져 프랑스에서는 루터교회와 개혁교회가 통합되어 프랑스 개신교 협회로 단일화되었고, 독일의 경우 독일개신교회(EKD)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다.

다른 교단과의 관계

루터교는 개혁파 교회와 성찬론 등을 통해 충돌하면서, 네덜란드의 항변파(아르미니우스 파)를 돕는 후원자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따라서 개혁파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으나 개혁교회 등과의 교단연합이 활발하게 진행중에 있다. 또한 영국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루터교 특유의 체계를 성공회에 적용시켰으며,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잉글랜드 39개조 신앙고백의 원천자료가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과 WCC

루터교회는 전 세계 세례 교인 수가 7500만을 넘으며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신학적 입장으로 분화되어 왔다. 독일에서 루터교는 정통주의경건주의를 거치며, 루터 고유의 사상에서 벗어난 파가 생겨났다. 자유주의 신학을 만나며 자유주의 신학자도 배출됐다. 그러나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은 루터교 신학자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했다.[20] 일부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기도 하는데 독일의 독립복음주의 루터교회(Selbständige Evangelisch-Lutherische Kirche, SELK)는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주장했던 고유 사상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루터교회에는 위르겐 몰트만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등의 바르트주의 계승자들이 있어 교회일치운동(WCC)에 적극적인 편이다. 루터교세계연맹은 로마가톨릭교회, 세계감리교협의회와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문 칭의론 일치 협약'을 맺기도 했다.[21] 그러나 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 등 보수 성향의 교회는 이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루터교 중에서도 북유럽루터교성공회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으며 로마가톨릭교회와도 일치를 도모하고 있다.

루터교 예배양식

루터교회는 일정한 양식에 따른 예전적 예배를 드리는데, 다음과 같은 예배양식을 갖고 있다. 이하는 한국 루터교회의 예배의식서에 따른 예배순서이다.[22]

1부(말씀 중심의 예배)

촛불점화 및 입장

목사의 십자성호와 대중의 '아멘' 화답

죄의 고백과 죄의 용서 선언

기도송(Kyrie)

영광송(Gloria in excelsis)

시편 교독

평신도 대표의 구약말씀 봉독, 서신서봉독

찬송

복음서(본문말씀) 봉독(자리에서 일어섬)

신앙고백(사도신경)

설교

봉헌

2부(성만찬)

거룩송(Sanctus)

제정의 말씀

주기도문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

성찬 분배(떡과 포도주 이종성찬)

시므온의 노래(Nunc Dimittis)

축복기도

파송찬양 및 퇴장

십자성호, 성호경

루터교는 십자성호를 긋고 성호경(소리내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를 말하며 십자성호를 긋는 일)도 한다. 그러나 로마가톨릭 교회와 달리 그 행위 자체에 능력을 부여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를 기억하는 것으로 여긴다. 예배의 시작, 성찬 제정의 말씀 때 목사는 회중 앞에서 십자성호를 긋는다. 또한 회중들도 예배 도중 개인적으로 십자성호와 성호경을 하기도 한다.

관련 항목

각주

  1. 루터교회의 역사와 선교 2015년 1월 확인
  2. 성공회 사제박태식 신부 등의 진보적 신약성서학자들에 의해 에베소서바울의 친서가 아니라 바울의 제자들이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쓴 글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마르틴 루터가 살던 시대에는 성서의 비판적 읽기가 발전하기 전이었으므로 루터는 에베소서를 바울이 쓴 것으로 기술하였다.
  3. 지원용 역, <<신앙고백서>>, 컨콜디아사, 1988
  4. 미국 종교 지도, American Ethnic Geography, Glenmary Research Center, 2006
  5. The Luteran Church Missouri Synod news and information, October. 19. 2015.
  6. 한연희, <美 루터교 사상 첫 여성 총회장 탄생, 압도적인 표차로 선출>, 뉴스미션, 2013. 8. 19.
  7. 이승규 기자, <칼 귀츨라프 선교사의 조선사랑>, 노컷뉴스, 2015
  8. 이승규 기자, <칼 귀츨라프 선교사의 조선사랑>, 노컷뉴스, 2015
  9. 기독교한국루터회, <기독교한국루터회 소개 영상>, YouTube, 2013. 12. 7.
  10. 송현강, 이주일의 역사 <한국루터교의 시작>, 2009. 1. 9.
  11. The Luteran Church Missouri Synod news and information, October. 19. 2015.
  12. 지원용 역, <<신앙고백서>>, 컨콜디아사, 1988
  13. 레나트 피노마 저, 엄진섭 역, <<승리의 믿음>>, 컨콜디아사, 2009
  14. 앨리스터 맥그래스 저, 김선영 역, <<루터의 십자가 신학>>, 컨콜디아사, 2015. 11. 10.
  15. 심광섭, <<예술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10
  16. 지원용 역, <<신앙고백서>>, 컨콜디아사, 1988
  17. 지원용 역, <<신앙고백서>>, 컨콜디아사, 1988
  18. 심광섭, <<예술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10
  19. 지원용 역, <<신앙고백서>>, 컨콜디아사, 1988
  20. 에릭 매택시스 저, 김순현 역, <<디트리히 본회퍼(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 포이에마, 2011
  21. 장익성 기자, <감리교, 루터교, 천주교와 칭의론 합의> 에큐메니안, 2006. 7. 24.
  22. 기독교한국루터회, <<루터교 예배의식서>>,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 2014

바깥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