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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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ref>[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92702.html ‘이승만 고종 밀사설’ 깨졌다] [[한겨레신문]] 2011년 8월 21일.</ref>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ref>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179p., (주)금성출판사, 2007년 3월 1일 발행</ref>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ref>[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92702.html ‘이승만 고종 밀사설’ 깨졌다] [[한겨레신문]] 2011년 8월 21일.</ref>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ref>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179p., (주)금성출판사, 2007년 3월 1일 발행</ref>

2015년 12월 19일 (토) 17:31 판

이승만
대한민국제1·2·3대 대통령
임기 1948년 7월 24일~1960년 4월 26일
부통령 이시영 (1948 ~ 1951)
김성수 (1951 ~ 1952)
함태영 (1952 ~ 1956)
장면 (1956 ~ 1960)
이기붕 (1960)
총리 이범석 (1948 ~ 1950)
장면 (1950 ~ 1952)
장택상 (1952)
백두진 (1952 ~ 1954)
변영태 (1954)
후임: 윤보선(제4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대 대통령
임기 1919년 9월 11일~1925년 3월 21일(탄핵 후 면직)
국무총리 이승만
이동녕
이동휘
이동녕(대리)
신규식
노백린
김구(대리)
이동녕
박은식
후임: 박은식(제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1, 22대 주석
임기 1947년 3월 3일~1948년 7월 22일
전임: 김구(제20대)

대한민국의 제2대 국가수반
임기 1947년 3월 3일~1948년 7월 22일
국가 부수반 김구
전임: 김구(제20대)
후임: 이승만(제1대)

신상정보
출생일 1875년 4월 18일(1875-04-18)
출생지 조선 황해도 평산군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평산군)
사망일 1965년 7월 19일(1965-07-19)(90세)
사망지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마우타네리아 요양원
매장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국적 대한민국
본관 전주(全州)
학력 배재학당
조지워싱턴 대학교 철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
정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자유당
부모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해 김씨
배우자 박승선(이혼), 프란체스카 도너
자녀 아들 이봉수
양자 이강석, 이인수
종교 감리교
별명 호는 우남(雩南), 아명은 승룡(承龍),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별칭 이박사(李博士)
서명
웹사이트 http://www.syngmanrhee.or.kr/
이승만
개정 로마자 표기: I(Ri) Seung-man
공식 로마자 표기: Syngman Rhee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정치인,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실패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당시 이승만은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일진회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2]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3]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스위스 등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발췌개헌과 1954년사사오입 개헌으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채 헌법을 두 차례 개정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58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으로 대표되는 언론탄압을 자행하였고,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통해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4·19 혁명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

유년기·청소년기

이승만은 1875년 4월 18일(음력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4] 초명은 승룡(承龍), 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경선은 이승만에 의하면 "그는 부자였으나 재산을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고 한다.[5] 이경선은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했고 이승만 위로 두 아들을 두었다가 천연두로 잃자 세상을 크게 비관했다.[6]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내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우리 집안의 긴 핏줄은 끊어지게 된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딸이 둘 있고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 데다가 어머니는 자꾸 나이를 먹으시니 모두들 퍽 근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밤 어머니는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신의 가슴에 뛰어드는꿈을 꾸고 깨어나서 가족에게 그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갖게 될 태몽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여러번 되풀이하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5]
 
— 이승만의 회고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7] 그는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후손이다. 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손이다.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장평도정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3대조인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에서 끝이 났고,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할아버지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어렵게 살아갔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의 왕실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그가 왕정복고를 꿈꿨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8]

이승만은 후일 자신의 간단한 일대기를 써서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부쳤다. 그러면서 내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5] 나의 정적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왕권을 회복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9]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그는 '아버지는 나에게 너는 6대 독자인 줄을 알라고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런 탓으로 주위에 가까운 친척이 없다. 그런데 만약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고종 치하에서 독립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친척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당장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10]'고 하였다.

로버트 T. 올리버는 이승만의 전기를 쓸 때 '이승만의 가계는 다년간 그를 울분하게 만드는 원인이었고 또 그의 핸디캡이기도 하였다'고 한다.[9] 이승만은 자신이 왕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껄끄럽게 여겼다. 아버지 이경선은 계보학자이자 당대의 양반 사대부들처럼 여러번 자신의 족보를 아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나중에 양녕대군이 태조의 아들인지 태종의 아들인지도 구별 못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의 간략한 일대기를 적어 보낼 때 양녕대군을 태조의 아들[11] 이고 정종에게 양보한 것 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에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했다가 다시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으로 이주하여 그 역시 부모를 따라 이동했다. 1877년 그의 가족은 황해도에서 한성으로 이사하여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7] 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는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공부열이 대단하였다.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7] 도동서당은 한성부 용산에 있었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아버지 이경선은 풍수지리에 몰두하여 조상의 묘자리를 새로 찾아 이장함으로써 가문의 재흥을 꾀한다는 생각에 남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방랑으로 집에서 일없이 지냈다.[6] 어려서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아들 이봉수가 요절하면서 관계는 소원해졌고 결국 해방 후 최종 이혼한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12]:244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12]:244 한편 이승만은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에 의하면 자신이 태어날 당시 사람들은 상당히 미개하고 문을 꽉 닫고 살았다고 했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중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을 무슨 뿔달린 괴상한 짐승들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기억한다.[10]'고 했다.

청년기

배재학당 재학 (1895 ~ 1897)

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젤러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7]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12]:295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세웠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7] 그 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서재필
(이승만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고,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했다.)
이상재
(이상재는 이승만의 정치적, 재정적 후견인이 되었다.)
윤치호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12]:295 그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청년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기도 하였다. 협성회에서 이후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7] 협성회는 나날이 발전했다. 동시에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지의 한사람인 이승구이완용의 아들이었다. 이승구의 아버지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13] 버렸다. 협성회는 계속 발전하였고,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면서도 이승만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14]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이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14] :91

계몽운동 (1897 ~ 1904)

언론 활동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7]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7] 11월 5일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급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학생과 대중을 동원, 이들을 이끌고 경무청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7]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할 때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7] 이후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했다.[출처 필요]

그러나 12월 23일 고종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7]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투옥과 탈옥 미수

1899년 1월 17일미국공사로 근무했던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7]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당시 재판장으로 지냈던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7]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2]:247 그는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 생활하면서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한테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옥중 생활 중 그는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저서 '독립정신'을 1904년 6월에 저술했다.[15] 한편 이승만은 옥중에서 어른 죄수와 어린이 죄수를 나뉘어서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했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LA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16]

고문과 후유증

이승만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한때 강원룡은 이승만의 고문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 대통령은 일경에게 잡힌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의 손을 보여주며 '왜놈에게 붙잡혀 고문당한 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17]'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은 그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당한 뒤 고문당한 것을 진술하였다. 허정은 자신이 황성기독교회관 청년부[18] 시절에 이승만이 안면 경련을 일으켰던 것을 진술했다. 허정은 '이 무렵의 이 박사의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에도 이박사는 얼굴을 실룩거렸다. 그를 상징하다시피하는 이 안면 경련독립협회(獨立協會)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서 그리 되었다 한다.[19]'고 한다.

옥중 계몽운동과 석방
민영환
(그는 이승만을 석방하여 미국에 밀사로 보냈다.)
한성감옥에서의 이승만.(맨 왼쪽)[주해 1]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했고,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1917년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7]

1904년 7월 8일 이승만은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 전쟁이 발생하면서 그는 8월 9일 특사로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7] 민영환한규설을 만난 뒤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이때 그는 고종 황제를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외교 활동 (1904 ~ 1905)

1905년 8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 박사.

1904년 8월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예정이 없던 특사조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20]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12]:247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12]:247 1904년 11월 4일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 해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D.C.에 도착하였다.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7]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7]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제8조)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7]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베넌트 장로교회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7]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12]:297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부 로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승만은 당시 공사인 김윤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미 일본에게 포섭되어 있어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하였다. 이승만은 김윤정의 어린 아들을 설득하여 공사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했다.[21]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 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한다.[7]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고종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22]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12]:297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미국 유학 (1906 ~ 1910)

모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
1909년의 이승만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학원생 기숙사의 탑을 그린 유화.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이 기숙사에서 묵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하였다. 1907년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23] 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회에 참석하였다. 그 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오클랜드기차역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으로 살인자들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며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24]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 통역을 거부했던 것이다.

두 명의 한국인이 루스벨트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이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사람들은 흉도이며, 최악의 악당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듬해 1909년,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하였을 때도 이승만의 반응은 미국여론을 살펴보면서 미국 여론의 악화를 걱정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정치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08년 8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沿海州) 대표로 참석하였다.[25]

독립운동기

귀국

1910년의 이승만

1910년 3월 국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12]:248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도미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오른쪽 열한번째는 이승만, 가운데 단상에 선 이는 안창호)

191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출처 필요]

1912년 4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회의에 참석하였다.[26] 1913년 그는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체류하라는 편지 서신을 받고 귀국을 단념한다.

하와이 정착

1913년 이승만은 국민회와 박용만의 초청으로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27]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어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뒤에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7]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감리교 부속의 한인중앙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 활동과 실력운동 양성에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감리교에서 설립한 한인기숙학교를 '한인중앙학원'이라 고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인 감리교 감리사가 이승만의 민족교육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반발하고 학원장직을 사임, 새로운 학원을 세웠다. 그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민족교육에 열중했다. 이승만은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고 교회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기도 했다.[28]

그리고 '태평양 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 동지회로 발전하게 된다.[28]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승만은 하와이섬의 마운틴 뷰에서 숯 사업을 시작하기도 있다.[29]

국민회와 대립

한편, 이 무렵 1914년 박용만국민군단을 창설했고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기를 들었고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중시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5년 6월 17일 스타불레틴 신문에 기고하여 자신은 어떠한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으며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르치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지역 일본인 신문들이 자신이 반일감정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30]

1913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한때 결의형제를 할 만큼 일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법론과 국민회기금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결국 정적이 되고 말았다.[주해 2]

1915년국민회에 커다란 혼란이 있었던 시기로 당시 회장이었던 김종학과 박용만 등 주요 간부들은 자금 횡령 의혹으로 남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그 뒤 홍한식 목사가 새 회장직을 맡는 등 이승만 지지자들이 국민회 주요 간부직을 접수했다.[31] 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고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테러, 폭동이 일어났다. 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 건 벌어졌다. 당시 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재미한인 교포들의 인터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반수 이상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억했으며 이승만의 조직원에 의한 암살 시도 증언도 있다.[27]

감리교 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1915년 6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독립시켰다.

한인 사회 장악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7]

1918년 7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수립된 '신립교회' 예배당 헌당에 참여하였고,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 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으로 바꾸었다.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7]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교회를 분열시켰으며 헤이즐 정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27]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민군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27]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32] 서재필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32]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한경, 여섯 번째가 서재필, 일곱 번째가 이승만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위한 파리 강화회의가 예정되고,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우 윌슨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그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 밀지를 보낸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김성수를 찾아갔다.[33] 이승만이 보냈다는 그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33]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뜻이 있었던 송진우는 일단 밀서를 반송, 되돌려보냈다.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2월 중순 일본인이 보낸 밀정의 저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국내에는 그가 일본인에게 저격당한 사실이 바로 알려졌다.[34]

3월 1일 미국 현지에서 3·1 만세 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홍보될 것으로 예상했다.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미국 워싱턴에서 통보받았다. 1919년 4월 1일 기호 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7]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4월 14일 3·1 만세 운동의 열기가 미국에 번져 한인자유대회가 미국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 최초의 의회 장소로 발길을 옮겨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사진이 남아 있다.[30]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승만은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 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연사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 (1919 ~1925)

1921년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대통령 환영식
(가운데가 대통령 이승만, 오른쪽은 안창호, 왼쪽은 이동휘)

1919년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추대되었다.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 로부터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35]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 제국 정부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6월 14일부터 6월 27일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7월 4일 국ㆍ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디시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파일:Imsi19220101.JPG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이승만

8월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한국 위원회로 개칭했다. 8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젼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 총재 추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의 '프레지던트'(President) 칭호 사용이 상하이에 알려지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논란이 발생하였고, 논쟁이 격화되자 8월 25일 임시정부내무부 총장 안창호(安昌浩)는 그에게 전보를 발송한다.

임시정부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이하 생략)...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5일 안창호의 서신 -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6일 이승만의 답신-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1919년 9월 1일에는 김규식과 함께 '독립공채표' 혹은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원래 이 애국공채는 한국의 건국시에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승만은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단체라고 하면서 상환을 거부했다고 한다. 1919년 9월 11일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줄 것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명의로 워싱턴에 발송하였다.

8월 이승만은 한국위원회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임시정부 공식대표로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구미위원부로 개편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실망을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온 김규식을 맞이하여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삼았다.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하와이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36] 이후 김규식은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37] 또한, 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 이승만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활동을 하고 다녔다. 한편 이승만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조선총독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는 묵살당하였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로부터도 조롱당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38] 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하였다.[39]

임시 정부 각료들과의 갈등

대통령에 뽑혔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워싱턴 등지에서만 거주하고 있어, 상하이에 있는 임정에서는 이승만의 정부 내도를 촉구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출처 필요]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 30만 달러라는 수배전단지를 발견,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구한 뒤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나타났다. 1921년 5월 미국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가 임시정부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나, 9월 임시정부 체제를 대통령제로 개정하면서 겨우 봉합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이동휘·여운형·한형권 등과 대립하였다.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체류하지 않았다.

임시 정부 대통령 탄핵 (1925)

1921년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말했고 임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40]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39]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전문이다.

주문

  •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안에 의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거를 열거하면 민국 6년 12월 2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동 6년 12월 22일부로 국무원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 6년 7월 3일에 발한 구미위원부 통신부 특별통신, 동 7년 1월 28일에 낸 구미위원부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 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부한 서신 등과 같다.
  •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
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

[41]

한편,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직을 맡았던 조소앙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면직 조치에 극력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듬해 1926년 말까지 하와이에 거주했던 이승만에게 임정 내부의 사정을 내보(內報)하며 이승만의 복권을 시도했었다.[42]

구미외교위원부 활동 (1925~1930)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후,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연맹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1919년 8월 김규식, 여운홍, 장택상 등의 도래와 임정 파리위원부를 구미위원부로 흡수하여 구미위원부 산하 주불대표부로 활용하였고,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임정 홍보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에 지지를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주불대표부를 통해서 이승만은 유럽의 정치정세 변동과 정보를 수시로 입수하였다.

구미외교위원부1919년 5월 이승만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설치한 집정관 총재 사무소와 서재필이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개편하여 만든 것이다. 구미 위원부는 한국의 입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를 했으나 태평양 회의(1921-22)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지 못했고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도 이루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외교상의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출범 초부터 이승만의 개인기관으로 활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임시정부에 보내는 애국금을 전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25년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묵살하였으며 계속 구미위원부를 가동하였다. 일설에는 1928년 재정난으로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43] 는 설이 있었으나 1926년 김현구라는 최측근을 기용하여 구미위원부의 살림살이를 맡기기도 했다.[44]

김현구는 1926년 이후 1929년까지 임정 구미위원부의 대소사를 총괄했는데,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간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으로서 위원부의 살림을 꾸려갔던 김현구는 1927년 1월부터 1928년 7월까지 1년 반 기간에 걸쳐 무려 131통의 간찰(편지)을 이승만에게 발송했고, 이승만으로부터 4통의 답변을 접수받았다.[44]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에 반발한 이승만은 임정으로 보내는 송금줄을 차단하고, 미국 교포들에게도 임정으로 송금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임정과의 갈등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임시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1929년 이후 이승만은 임정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임정 구미위원부를 가동하며 외교, 구국활동을 하였다. 그의 구미외교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허정·장택상 등이 나타나 업무를 보좌하였다. 1928년 4월 10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39] 1929년부터 1930년 1월 8일 시사이 이승만은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고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39]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김구는 그에게 자금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 서신을 여러번 보냈다.

1928년 박용만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

외교 홍보 활동 (1930 ~ 1933)

1931년때 이승만.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김구는 재중 한인 동포들과 교민단체의 후원금과 성금 모금에 의존하는 한편 1928년 이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도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자신도 처지가 어렵다고 거절하면서도 자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꾸준히 송금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하였다.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선동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이승만 자서전 내용中[45]

뒷날,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병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46]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임정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대표자대회 이후 임정의 반이승만 세력이 사라지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또한 한국인 교민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임정으로 송금해주었다.

1934년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47]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한 후 1933년 1월 26일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1933년 국제연맹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대한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12]:63 1933년 1월 26일 프랑스어 일간신문 《주르날 드 제네바》지와 인터뷰하였고,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47] 2월 8일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고, 2월 16일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47] 1933년 2월 21일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다.[47]

김규식과 함께 찍은 사진

2월 22일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그의 독립운동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고, 2월 23일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어 분트》도 활동 상황이 실렸다.[47] 7월 9일 스위스 제네바를 출발하여 7월 20일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소련한국의 독립에 대한 도움을 호소하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비엔나 경유) 즉시 쫓겨났다.[47] 8월 10일부터 8월 16일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미국 뉴욕 주에 도착했고, 그해 10월하와이 호놀룰루로 되돌아왔다.[47]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47]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3] 이로서 임정에서 탄핵당한지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하였다.

임정 외교위원, 국무위원 선임 (1934 ~1939)

1933년 11월 이승만은 이동녕 내각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임정 일각의 반대에도 외교 활동을 위한 그의 역할이 크다는 이동녕, 김구 등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47]

1934년 4월 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행서규정을 공포하여 외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조소앙·최동오·이승만·신익희외교위원으로 선임하였다.[48] 1934년 7월 22일 미국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와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9월 16일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 주의 뷰트를 방문하였다. 이는 《몬태나 스탠다드》지가 기사로 게재하였다.[47] 1934년 9월 20일부터 10월 8일 사이 뉴욕 주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35 1월 24일 프란체스카 도너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으며,「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47] 9월 20일 뉴욕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고, 10월 8일까지 신혼기간을 보냈다.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신혼 초기부터 프란체스카 도너는 한인 지도자의 외국인 신부를 탐탁치 않게 여긴 한인 교포들에 의해 '호주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주댁[주해 3] 이 뭐냐는 질문에 이승만은 좋은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1935년 1월 24일 배우자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 도착, 《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37년 임시정부 외교위원에 선출되었다.

1938년 4월 24일 하와이 주 호놀룰루 시 릴리하 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을 낙성하였고[47], 1939년 3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D.C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8월 30일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편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김구에게 발송하였다. 이어 12월 10일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고[47], 이는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로 보도되었다. 1939년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부 YMCA 강당에서 강연을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경찰을 파견하여 이승만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비호를 받았고, 선교사들에 의해 빼돌려져 체포를 면하고 부산항을 거쳐 다시 하와이로 되돌아왔다.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선임

김구, 주석 취임 직후 그를 구미위원장으로 복직시킨다.
1941년 6월에 이승만이 출판한 《일본을 벗기다》(원제 -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이 책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실상을 낱낱히 비난하는 내용으로 향후 미국은 일본과 장차 전쟁을 하게 될 것임을 예견했다. 이 책 발간 6개월 후인 1941년 12월, 실제로 진주만 공격을 받은 미국에서는 커다란 관심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40년 3월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한 후, 6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다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승인받았다. 6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태평양 제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 미국 침략을 경고한 '일본을 벗기다'(원제 -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일본 내막사'라고도 함)를 출간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인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전 경고한 이승만의 '일본을 벗기다'는 이후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책은 대지의 저자 펄벅에게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49]

그해 9월 광복군 창설 소식을 통보받고 축전을 보낸다. 그러나 김원봉 등의 입각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그는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며 김구,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한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미국일본이 전쟁상태로 들어간 직후 이승만은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하므로 미국은 중경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2]:299 12월 9일 미국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은 뒤, 동 12월 9일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 등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하였다.

소련의 한국 점령을 우려하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미국 국무부와 빈번히 접촉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2]:99 1942년 1월 2일 미국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와 면담하였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혼벡히스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없지만 소련의 관심 또는 이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요청을 거절하였다.[12]:299 1월 16일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들과 함께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창설,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의회 상원 원목인 프레데릭 해리스(이사장),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회장),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 등을 중심인물로 선출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승인 운동 (1942 ~ 1944)

태평양 전쟁

1942년 2월 27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자신의 신임장과 임시정부의 공한을 제출하였다.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 D.C의 라파옛 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의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하였다. 행사 참석 후, 3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을 찾아가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그 뒤에도 계속 미국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12]:299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조약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사람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12]:299

3월 30일 미국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5월 15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극동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정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하였으며, 8월 23일 캐나다에서 열린 제1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그해 8월 이승만은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종교적 후원단체인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한국 의료선교사 애비슨, 아메리칸대학 총장 폴 더글러스 등을 중심인물로 내세웠으며, 이후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43년초 이승만은 미국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요구하였다.[50]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해 12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12월 19일부터 12월 22일 가이 질레트 미국 상원의원으로부터 임정 승인이 불가능하다는 서한을 받자, 몇몇 동지들과 함께 항의 방문하였다.

1944년 7월,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이 태극마크가 들어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4년 10월 18일 미국 체류 중인 이승만은 중국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발송, 1944년 11월에 미국정부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한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11월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우표를 발행하자 이승만은 한국독립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태극마크를 도안하여 우표를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알렸고, 발행된 태극우표 3점을 동봉하여 충칭 임시정부로 발송해주었다.

항일단파방송 선전활동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되었는데,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첫 방송을 시작했었다. 당시 미국의 소리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일제 강점기, 1942년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듣곤했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 워싱턴 D.C로부터 '일제는 전쟁에 패하고 있다. 우리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얻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우리가 독립을 위해 건국을 준비하여야 하며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에 영원할 것이다.'는 주 내용으로 한반도에 소식을 전하였던 사건이었다.[51]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극히 소수였는데, 이는 밀청했던 사람들로부터 입으로 전래되고 알려지게 되어 훗날 국내에서 이승만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전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로 지냈던 문제안의 증언에 의하면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은 힘은 많지 않지만,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에 있는 구름 같이 먼 데 아주 알 수 없는 곳인데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 우리를 지켜려는 누군가가 있다. 이런것을 아주 가냘픈 희망이 있지만 그런 마음이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52][주해 4]

이때 워싱턴에서 항일단파방송을 하였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다.

이 항일단파방송을 몰래 밀청하다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이들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전략사무국(OSS) 지원 요청

임정한국광복군의 특수훈련을 계획하고 미국국무성의 협조를 기대한다. 임정의 연락을 받은 이승만은 미국국무성국방성과 교류하며 임정광복군미국 OSS의 합동훈련을 중개하게 된다.

1942년 5월 5일 이승만의 미국 내 후원조직인 '한미협의회' 회장 제임스 크롬웰이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하였고, 42년 9월 30일 이승만은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의 로센봄 중위,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 등을 만나 중국내 한국인 게릴라 부대 조직의 후원 문제를 협의하였다. 10월 10일 다시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를 찾아 프레스톤 굳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10월 미국육군전략사무처의 협조를 얻어낸 뒤, 임정에 이를 통보하고 임정으로부터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하였다. 1942년 12월 4일 12명의 한인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12월 7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12월 31일부터 1943년 2월 16일까지 이승만은 계속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이 만나 주지 않자, 편지로 만약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련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1943년 2월 17일 미국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를 보내,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하였다.

귀국

1945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에 파견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앞줄 가운데가 대표단장 이승만,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병구·정한경·유경상·임병직, 앞줄 왼쪽부터 이살음·대표단장 이승만·송헌주 순)

1944년 8월 21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9월 11일 이승만은 제2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영국 총리 처칠 경 에게 다시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승만의 독립승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무부 내의 반대파와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1943년에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하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를 합의하였다.

1945년 2월 5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 차관 조셉 그루에게 전보를 발송,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을 즉시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3월 8일 미국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임정 대표를 초청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3월 9일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 여사를 면담하였다.

1945년 5월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쑹쯔원)이 좌우합작을 주장한 데 대해 맹렬히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12]:99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는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12]:99 김성숙(金星淑)은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유엔대표였던 둥비우로부터 소식을 전달받고 임정 국무위원회 석상에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직에서 해임하고 임정소련에 해명과 사과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2]:99 5월 14일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하여(얄타밀약설) 미국 국무부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소련은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진주하면서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지목, 그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정치과정에서 이승만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하기로 계획하였다.[50]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은 스탈린과 외무부의 비신스키차관에게 보낸 보고에서 이승만을 "한국의 망명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반동적이고 반소적인 인물"이라 보고하기도 했다.[50] 소련군은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로, "이승만이 4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근거로 했다.[50]

1945년 10월 16일 중앙청에서 귀국인사를 하는 이승만과 그를 수행중인 윤치영

일본 천황이 방송을 통해 항복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 정오는 워싱턴 시간으로 14일 밤 11시였다. 이 뉴스를 들은 이승만은 그 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 그는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되도록 빨리 자신이 먼저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프란체스카는 이미 각오하고 있는 터였다. 이승만은 15일 아침 워싱턴에 사는 한국 교포 30여명을 구미위원부로 불러 축하파티를 열었다.[53] 8·15 광복 직후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쉽게 여권을 내주기 어려워 2개월간 발이 묶여 있었다. 이승만은 1945년 9월 5일 국무성 여권과장 루드 쉬플레어 여사를 통해 여권발급허가를 받았고 국방성 스위니 대령의 주선으로 미군작전 지역인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도 일단 얻었다. 그러나 국무성은 곧 주미한국외교대표라는 이승만의 호칭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권발급허가를 취소해버렸다. 이승만은 즉각 호칭을 포기하겠다는 태도를 밝혔지만 국무성은 뚜렷한 이유를 대지 않은 채 계속 여권발급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더 이상 그의 일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나왔다.[54]

1945년 8월 하순 이승만은 미군 인사들과 연락, 굿펠로 대령의 도움으로 미 여권국으로부터 여행증서를 받고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한국에 입국하려고 맥아더의 극동사령부(GHQ)로부터 입경 허가서를 받아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의 허가서에 '고급 집정관(High Commissioner)'이라는 표현이 있음을 문제삼아 정정을 요구했다. 이 문제가 생긴 것은 9월 23일이었다. 이 표현을 삭제한 뒤에야 여행문서를 재발급받았다.[12]:312~314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임되었다.[55] (조선인민공화국 참조) 그러나 취임을 거절하였다.

광복 직후

1945년 10월, 귀국 환영회에서의 이승만.

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56]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이승만은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이승만이 귀국후에 벌인 첫 번째 대미교섭은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문제였다. 이승만은 존 하지에게 임정을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령관 하지는 답변을 회피한다.

이승만은 측근들에게 "존 하지가 임정을 불한당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여러번했다.[57] 그러나 이승만 역시 속으로는 임시정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가 "정부" 자격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출처 필요]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우겠다는 뜻을 품은 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가 대내외적으로 법통을 인정받는 형식으로 귀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58]

귀국 당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이에 이승만은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59]

그가 귀국하자 국내의 후견인이자 독립협회 때부터의 동지였던 윤치호가 만나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윤치호를 만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귀국 환영회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환영회를 할 때 조병옥은 이승만을 맨 앞의 좌석에 앉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은 사실상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는데 어떻게 앞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하지 장군이 항의를 하자 조병옥은 대답하기를 "이승만 박사는 비록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원훈이므로 당연히 앞자리에 앉아 여러분을 환영해야 한다."고 이틀 동안이나 주장하여 관철시켰다.[60]

하지 장군은 결국 조병옥의 말에 수긍하고 자기 스스로가 이승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지 장군이 답사를 마치고하단하자 이승만 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하지 장군과 정답게 악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60] 이어 조병옥은 직접 이승만 환영사를 낭독했다.

이제 우리 한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용전분투한 역전용사 미군을 환영하는 이 마당에 우리는 40년간 우리 한민족을 착취하고 압박하던 이 백아전당(白亞殿堂) 앞에 우리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백발이 성성한 이승만 박사가 바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하고 이승만을 소개하였더니 덜어선 회장의 수만은 청중들에게서 우레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감격의 울음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퍼져나왔다.

박수소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조병옥은 연설을 계속하였다. "이 백아전당은 희고 깨끗이 단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일보던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우리 한민족을 어떻게 해야만 많이 착취하고 일본에 예속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계획하고 집행한 저주받은 아성입니다. 그러나 이 백아전당의 흰 것과는 달리 우리민족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이승만 박사의 백발은 40여년 간의 해외의 모진 풍상을 다 겪어가면서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되도록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위하여 투쟁한 인생의 산 역사를 말하는 백발의 기록이며 상징일 것입니다.[61]

조병옥이 말을 맺었을 때 다시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 장군은 직접 답사와 함께 이승만의 약력을 직접 소개하였다. 조병옥에 의하면 '하지 장군도 이 우레같은 박수 소리에 압도되어 자기가 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이승만의 소개를 하였다고 생각한다.'고 평하기도 했다.[61]

한민당 영수직 거절

이승만은 미국 국무성의 편의 제공으로 귀국한 만큼, 미 군정에 대해서나 미국 행정부에 대해서나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62] 10월 16일 오후 허정은 미 군정 당국의 연락을 받고 이승만이 여장을 푼 조선호텔로 찾아갔다.[63] 허정은 이승만과 대좌, 국내 정세를 설명했다. 허정은 '무엇보다도 이 박사가 겨레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좌익의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62]

그 자리에서 허정한민당의 창당을 알리고 그에게 영수 추대를 수락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수락을 거절했다.

한국민주당이 조직되었다는 것은 참으로축하할 일이지만, 나로서는 영수직을 맡을 수가 없소. 한민당이 싫어서는 아니오. 나도 미국에 있으면서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지만, 지금 내가 할 일은 한 정당의 지도자가 되는 일을 아닐 것이오.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소. 지금 내가 할 일은 온 민족을 단합시켜 한뜻을 갖고 일하게 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한 정당에 소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전민족의 단합이라는 더 큰 일을 버리는 것이 될 것이오.[64]

허정은 여러번 설득했지만 이승만은 한 정당 정파의 리더가 되기는 싫다고 답했다. 이승만의 성품을 알고 있던 허정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64]

독립촉성회 결성

비서실장 윤치영, 이후 56년 이기붕 세력에게 밀리기 전까지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한다.

1945년 10월 중순 윤치영 등의 독지가들의 주선으로 돈암장에 입주한다. 그가 미국에 체류했을 때 이미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허정, 장덕수가 돈암장에 출입했고, 윤치영, 이기붕 등은 그의 비서역을 자처했다.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여기에는 박헌영조선공산당 등 공산 정당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65](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이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0월 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였고,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다.[66] 그러나 회담에서 논의된 선친일파 숙청을 주장하는 박헌영과 건국후 처벌을 주장하는 이승만 사이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11월 3일 이승만의 통일안에 대해 조선공산당이 반대성명을 발표했고, 11월 21일 이승만도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의 본질에 관해 설파했다. 이후, 돈암장에 머물렀다가 거처를 이화장으로 이동했다.

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다. 이승만은 친히 김포비행장으로 나가 김구, 김규식 등 환국 요인들을 영접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이승만은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성명을 발표하였다.[67] "조선일보가 왜적(倭敵)의 압박 밑에서도 민족의 개명(開明)과 국권(國權)의 회복(恢復)을 위하야 분투항전(奮鬪抗戰)한지 다년(多年)이었는데 왜적의 시기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간하게 이름을 우리가 피가 끓게 통념(痛念)히 여겨온 바"라며 "금일 우리의 위급한 이 시기에 조선일보가 다시 부활하여 출세(出世)됨을 우리는 한없이 기뻐하며 환영한다"고 축하했다.[67] 11월 26일 이승만은 '전체 국민은 총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자'며 국민에게 호소하였다.[68] 11월 30일 노기남 대주교의 초대로 주교관 만찬에 참석하였다.

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

1945년 11월말과 12월돈암장으로 재력가 20여 명을 불러모아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려는 모든 국가지도자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민들의 지원을 받는다. 조선에서는 이렇나 지원이 매우 부족하다”면서 경제보국회 결성을 독려하였다.[69]:223 [70]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열고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71] :145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은 김구김규식을 초대하였다. 김구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71]:146

1945년 12월 16일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행동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공격을 하였다.[72]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71] :221

신탁통치 반대 운동

김구를 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1945년 11월)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탁치반대)를 결의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김구, 김규식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공산당을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공산당과의 일체 타협을 거부하였다. 허정은 이를 두고 소련의 찬탁하라는 지시를 받고 바로 찬탁으로 돌아선 '좌익의 사대주의 때문'이라 하였다.[73] 그해 1월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국무성 담당자들과 접촉을 시도했고, 이승만의 미국 도미를 불허하는 미군정의 반대로 이승만의 도미는 난관에 부딪혔으나, 출국을 감행했다. 이때 국내외 우파 단체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이승만의 도미 여비가 마련되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장덕수가 이승만을 방문하여 이승만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이승만도 이를 거절하였다.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74] 2월 8일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설립되자 이승만은 총재로 추대되었다.

귀국 직후 촬영한 영정사진 (1945년 10월)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74]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69]:206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74]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이승만과 김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69]:225

46년 2월 이승만은 김구를 위원장으로, 김성수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선출되었다.[75]

1946년 3월 1일 김구와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76]:235 표면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사실은 미 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76]:235 미군정은 의장 대리에 김규식을 앉혔다.[76]:235[77][78] 미군정은 이승만을 이화장에 반(半) 연금상태로 묶어두었다. 정문에는 미군 헌병을 세워두고 출입자들을 하나하나씩 체크했으며, 미군정청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미군용 전화도 이화장에서 떼어갔다.[76]:235 [78][79] 당시 한국 민간인 중 미군 군용 전화가 가설된 집은 이승만과 김규식의 집뿐이었으며, 3월 20일 이승만 집의 전화를 끊었다.[76]:235

46년 3월 22일 우파정당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국민당과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이때 김구는 이승만에게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초당적인 국민운동'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다.[76]:235 [80]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81]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82] 이승만은 서명에 동의하지 않다가 미군정의 압력으로 서명에 동의하게 되었다.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83]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84]

1946년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85]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85]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어가자,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정부 수립을 할 것을 주장했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1천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69]:223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 총재에 선출됐다.[76]:257 1946년 8월 3일 여운홍사회민주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86]

미·소 공동위원회에 대한 저항 운동

1946년 7월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형태로든지, 선출된 실행위원회에서 임명된 형태로든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촉구하면서 미소공위에 도전했다.[87] 그러한 정부의 지위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단순한 과도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이승만은 밝혔다. 그리고 여러 정치써글에서 논의된 정부구성에 관한 의견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손으로 신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소공위의 결과가 우리의 기대와 일치한다면 그때는 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87]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완강하게 거부함과 동시에 미소공위 역시 깨져야 된다고 주장했다. 허정에 의하면 당시 '한민당 안에서는 신탁통치를 전제로 하는 미소 공위 참석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민당이 참석하지 않은 채로 그 협정에서 정해진 임시정부 수립이 결정된다면 그 후 한민당은 물론이고 우익 진영도 발언권을 상실하므로 일단 참석하여 반대 의사를 관철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73] 이승만이 강력 반대를 하므로 한민당은 어쩌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태도는 완강하여, 한민당에 대해서도 미소 공위 참석을 거부하라고 종용했다.[73]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설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승만은 끝까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이승만의 미소공위 반대에 하지 사령관은 골칫거리를 만났다며 골치아파했다. 이승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미소공위는 어느 정도 진척을 이루었다.[87] 허정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 한민당이 미소 공위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73]

선생님이 반대하시는 뜻은 이해가 갑니다. 또한 저 자신도 (미소공위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려면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소 공위의 개최는 미국의 정책입니다. 미국의 군정하에 있는 지금, 그들의 정책을 극단적으로 반대한다면, 결국 그들은 우리를 제외하고 그들의 정책을 밀고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관여하지 못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은 더 좋아할 것이고 그 결과는 엉뚱한 것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선생님은 반대하시더라도 가만히 계십시오.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시되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서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88]

허정의 장기간 설득은 통하여 이승만은 미소공위를 반대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서 미소공위 반대 시위를 주도하지는 않았다. 허정은 이를 두고 '이 박사는 고집이 센 반면에 옳은 말은 깨끗이 받아들이는 담백한 일면이 있었다.[88]'고 했다. 허정은 또 만일 이박사가 끝까지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고집했다면 한민당 등 이 박사 지지 세력은 딜레마에 빠졌을 것이다. 일단 이 박사의 묵인 끝에 한민당은 미소 공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88]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88]

그러나 이승만의 미소공위 반대에 미군정은 골치아파했다. 미군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거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3일 이래 좌익 우익 합작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역량이 박헌영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또 이승만은 완강한 정치인이라고 해서 한국 정치계에서 제가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89] 김구 주석은 극렬한 반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신망을 얻지 못하였다.[89] 이승만과 김구는 정국의 반전을 꾀한다.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에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대부분 일회성이었다.[90]

단독 정부 수립론

1946년 6월 3일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서울신문 1면 기사.

1946년 5월 20일, 전남 목포에서 이승만은 반공주의적인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자신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의 일원이라도 거부하라.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이므로 전부 체포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워 3.8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내어 쫓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91][92]

이러한 그의 과감한 발언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로부터 '늙은 보수꼴통'이라고 비난받기도 하였다.

1946년 6월 11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76]:257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땅에 발못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고나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였다.[76]:257[93][94] 그러자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화답하였다.[76]:257[95][96]

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97] 1946년 9월 10일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하였다.[72] 9월 12일 돈화문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권총저격 미수를 당하였다.[72]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이승만은 김구·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98]

도미 외교

1947년 1월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하였다. 1946년 1월 이승만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76]:13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76]:13

그가 미국에 있을 때 김구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은 3.1절을 전후하여 독자적으로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김구와 임정의 행위를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하였다.[76]:15 1월~2월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회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을 결의하였다.[99]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보선할 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100][101] 김규식, 장건상, 김붕준(金朋濬) 등 중도우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101] 그리고 1947년 9월 5일의 국무위원 보선에서 재선되었다.[102] 3월 12일 미국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리 S.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또한 '미국 지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 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76]:24~25

1947년 4월 5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1947년 4월 21일 비행기편으로 경기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김구는 김포공항에 나와 그를 친히 마중하였다. 이승만이 귀국하던 날, 김구김포에 마중을 나가 단정론 연설만은 그만두도록 충고하였다.[103]

4월 23일 귀국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열렬한 환영 속에 열린 귀국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입법위원이 총선거 법안을 만들어 남한 과도정부,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76]:28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투쟁을 전개했다.[82] 5월 21일 예정된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격적으로 외치는 이승만은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하지의 지시에 의해 연금상태에 들어갔다.[76]:29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제단체 간 이론이 있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76]:31~32[104]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김구와 함께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전보를 보내 반탁 시위대를 격려하였다.[76]:32~33[105] 6.23 반탁데모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가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학생시위대 시위가 끝난후 시위대는 이승만을 찾아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그들을 격려하며 이철승에게 '자네는 건국공신이야 큰일을 해냈어'라 하며 칭찬하였다.[76]:32~33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격려에도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 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76]:35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1947년 7월 10일~7월 12일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 200여 명을 모아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자신의 단정 노선을 역설하였다.[76]:36

1947년 8월, 미 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지만 이승만은 김구,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76]:60~619월 21일 이청천(李靑天)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10월 18일 윤치영 등 측근들과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 사저에 입주하였다.

김구와의 결별

장덕수. 한민당내 이승만의 지지자였던 그의 암살을 계기로, 김구와의 감정이 악화, 결별하게 된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한 뒤 번복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김구의 방문을 받고 한시간여 요담을 한 후,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구의 성명 발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서북청년단 1주년 기념식에 참석회 훈화를 하였다.[106] 그러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12월 2일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1947년 12월 2일 김구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미군정에 소환당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107]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배신감에 크게 분노하였다.[107]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108]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이승만의 민족대표단은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 결별하게 되었다.[108]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였다.[109]

"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구가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71] :331

이승만은 장덕수의 암살범을 김구라고 확신했고,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단독 총선거 직전

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유엔한위를 마중나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그러나 UN위원단 단장인 인도인 메논이 북한과의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연설중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하였다.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10] 1948년 3월 17일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한 암살단이 이승만의 사저로 침투했으나 암살에는 실패했다.[111] 한편 사건 직후 이승만 측에서는 김구도 암살단의 공모자로 지목했다.[111]

3월에는 총선거 연기설이 확산되었는데, 선거 연기설이 나돌자 이승만은 3월 30일 성명을 발표, 선거 연기설을 비난하였다. 4월 1일에는 김구김규식남북협상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 성명을 발표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시기

5·10 단독 총선거 직후

김구와의 우정에 금이 간 후 이화장을 찾아온 비서 박용만과 대화하던 중

김구 주석이 나하고 같이 한 길을 못가게 된 것은 정말 슬픈 일이며, 내 가슴이 쓰라리다. 원통한 일이다. 김주석은 내 아우야!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던 내 아우야! 정말 원통한 일이야.내 가슴이 쓰라리고 아파![112]

라며 말끝을 흐리고 눈물을 흘렸다.[112] 박용만에 의하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박사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머뭇거렸으나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바람에 아무 말도 더 못했다고 했다. 이날 흘린 이승만의 눈물은 김구선생과 갈라선 이승만 한 사람의 눈물이 아니라 한국의 앞날을 걱정한 온국민의 눈물이기도 하다고 평가하였다.[112]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1910~)의 회고에 의하면 김구가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113]'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113]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113]'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113]'라며 조롱하였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또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을 비난했다. 김선에 의하면 '이박사는 밤낮으로 하지 중장을 욕한다.[113]'고 회고했다. 그에 의하면 '자기(하지 중장을 지칭) 집에 가면 행랑살이 밖에 못할 것이 총선 하는거 자꾸 연기하자 그런다고[113]' 하는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114]

제헌 국회의장과 헌법 선포

1948년 5월 31일 임시 의장으로 개회사를 낭독하는 이승만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나 한민당에 의해 내각 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

7월 12일 이날 기념사를 통해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또한 건국의 대장전이 되는 제헌헌법은 다음과 같이 그 전문을 선포했다.[115]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 제도를 수립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해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116]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115]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이후 헌법 제정과 함께 대통령 선거가 준비된다.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

7월 24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8월 15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중앙청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상 생략)...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며...(이하 중략)...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직전인 8월 11일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장면 등을 대표로 지목,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에 능한 몇 안되는 인사임과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5·10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尹潽善)을 특별히 채용하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삼기도 했다.

대통령직 수행시

이승만은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 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철저히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북한의 도발을 우려한 이승만은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미 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117]

취임 1기 (1948 ~ 1952)

1951년의 이승만 대통령
취임 선서 장면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나서 2위 김구, 3위 안재홍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24일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중앙청 광장 앞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부통령도 함께 취임식을 치렀다.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선언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정하고, 공식 문서에서 쓰는 달력은 단군기원(4281년)을 사용하도록 했다. 1948년 8월 15일은 단기로 4281년 8월 15일이었다. 8월 26일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승만은 우방과 어떤 형태든 외교관계를 맺어 새로 수립된 정부가 국제적 고립을 면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이러한 정부승인 외교를 위해 조병옥 · 장면 두 특사를 세계 각국에 파견(1948년 8월)하였다.[118] 9월 30일 대통령 시정방침을 발표하였고, 10월 8일 미국 국무성에 미군철수 연기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9년의 이승만과 장개석.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영부인 및 4명의 수행원(정한경 · 김양천 비서 · 김동성 공보처장 · 이정순 공보국장)이 수행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주일 미국대사관저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와 1차 회담을 가진 이승만은 이날 밤 더글러스 맥아더의 저택으로 초대되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방한에 대한 답방형식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119][120] 11월 6일 여수·순천 사건에 따른 국가위기를 맞아 수습책을 국회에서 발표하였다.

제3차 국제 연합 총회(파리, 1948년 12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한국대표단의 노력으로 간신히 대한민국 승인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12월 12일) 이승만은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둘렀다. 우선, 대미외교에 있어서 이승만은 국제 연합 총회를 마치고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귀국을 준비 중이던 장면을 대한민국 정부의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 특사)로 임명(12월 27일)하였다.[121]

대통령 취임 초기 (1949년 무렵)
장면, 초대 주미대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정부 승인과 6.25 전쟁 당시 주한미군, UN군의 파병을 이끌어냈다. 이승만은 장면의 실적을 높이 평가해 제2대 총리로 발탁했지만, 그는 원내 자유당 인사들에 의해 내각제 총리와 대통령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1949년 1월 2일 이승만은 장면을 주미대사로 인정해달라는 붓글씨를 친필로 작성해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냈다.[122]

1949년 1월 6일 민족청년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는 족청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범석은 족청을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일부 보존하였다. 1월 7일 일본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며, 1월 8일 일본대마도의 반환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1월 9일 반민특위의 친일파 처벌에 신중해야 한다고 담화문을 발표했고, 2월 18일 유엔이 북한과 협상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엔기구가 북한과 협상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3월 23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을 지지하였고, 5월 20일 일본에 대한 대일배상요구 관철을 주장하였다. 6월 9일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고, 7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7월 20일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초청하였다. 8월 8일 장제스와 진해에서 회담하고 돌아왔다. 10월 18일 대통령관저 담벼락 근처에 폭발물 장치를 매설한 것을 터지기 전에 경관이 발견하였고, 이승만도 이를 확인하였다. 10월 28일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11월 26일 남북통일방안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해체후의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11월 29일 귀속재산인 일본인 주택을 매매할 것을 발표하였다. 12월 16일에는 군사원조에 비행기 등의 포함을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49년, 미국측에서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모병제를 권고하고 이에 대한 기반을 다지는 데 전력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권유했으나, 물자원조를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는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C레이션 박스 한상자라도 더 원조받기 위해 징병제를 고집하였다.[출처 필요] 이후 한국군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되었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 이승만은 1949년 12월 중순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가쓰라-태프트 밀약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를 표했다.[123] 자신의 전기인 우남이승만전에 아버지 이경선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판매금지조치 시켰다. 그해 6월 부활된 대한적십자사 개소식에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1949년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무력을 통한 북진통일을 피력하였다.

한국은 한 몸뚱이가 양단된 셈이다. 한국은 앞으로 장기간 남북 분열을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전쟁으로서 이 사태를 해결하여야 할 때는 필요한 모든 전투는 우리가 행할 것이다.……이 대사상 냉정 전쟁(大思想冷靜戰爭)에서 우리는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일을 할 것이다.


-1949년 10월 기자 회견

[124]

한편 1949년 서울지방법원의 '처의 관계부존재확인 판결'을 제기하여 양자 이은수를 파양하였다. 한편 그때까지도 일정부분 생활비를 지급하던 전 부인 박씨와는 6.25 전쟁 이후 연락이 끊어지게 된다.

친일파 청산 반대 의혹

이승만은 오랜 망명생활로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하였고, 해방 직후 가졌던 좌익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우익,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귀국 초기 대동단결론을 주장하며 "선통일, 후친일파 청산"을 주장하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대한민국 수립 후 친일관리를 대거 등용하였다.[125]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제정된 법률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별담화를 발표하거나 특위 위원들에게 직접 압력을 가하는 등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126]

정부와 국회의 위신을 보존하여 반민 법안을 단속한 시일 내에 끝마치도록 할 것이다. (중략)....지금 반란 분자와 파괴 분자와 각처에서 살인, 방화를 하며 인명이 위태하고 지하공작이 긴밀한 이때 경관의 기술과 성격이 아니면 사태가 어려울 것인데 기왕에 범죄가 있는 것을 들춰내서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 확보상 온당치 못한 일이다.


-1949년 2월 2일 특별 담화문 「반민법 실시에 대하여」

반민족행위 처벌법안이 발의되자 친일파들은 국회와 서울 시내에 협박장을 뿌렸다. 내용은 "민족 처벌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라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여 "친일파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 것은 공산당이다."라고 말했다.[127]

결국 반민특위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6.6 특경대 습격사건 등이 결정타가 되어 해산하고 만다. 각 사건은 당시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특경대 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128]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 (중략)... 특별 경찰대는 국립 경찰의 노련한 경찰관이자 반공투사 최운하 등을 체포하였는데....(중략)..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의 위협은 국립 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49년 6월 8일 AP통신사와의 회견中.

이때문에 반민특위 특경대는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129] 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125]

내각 인선 작업

초대 내각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출신자로 기용되었다.[130] 제1공화국 연인원 96명의 각료 가운데 30자리 이상을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에게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131]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는 대신 그는 한민당에게 총리직과 내각 각료직의 일부를 약속했다. 그러나 한민당의 세력이 강해지자 경계한 이승만은 총리직을 한민당에 안배하지 않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는 인사로는 김성수, 조소앙, 이윤영, 이범석 등이 있었다.

1948년 7월 22일 초대 총리를 한민당이 아닌 조선민주당의 당수 이윤영(李允榮)을 천거하자 한민당은 집단으로 반대하여 총리서리 인준을 부결시켰다. 7월 29일 이범석을 서리로 천거하자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한민당은 이범석을 인준하였다.[132] 이윤영의 총리인준이 실패하자 그는 이윤영을 지청천과 함께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하여 입각시킨다.

내각 인선시 그는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출신 전향자였던 조봉암의 발탁은 파격인사였으며,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 등을 통해 농지개혁을 추진하기도 한다. 토지개혁을 통해 그는 한민당과 토착 지주세력의 기반인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분배하여 한민당과 지주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상공부 장관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임영신이 발탁되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정부수립 직전, 한민당에게는 내각 장관직의 절반 또는 총리직을 주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재무부 장관 1석만을 부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였음에도 이승만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한민당은 이번 내각은 실패한 내각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야당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국회 내의 한민당의 영향력, 4.3 사건, 여순 반란 사건 등의 후유증이 나타나자 이승만도 한발 물러서, 2대 내각에는 한민당이 당명을 바꿔 만든 민국당계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킨다.

대일외교 문제와 이승만 라인

이승만의 독도 라인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항의하는 일본인들의 집회

1951년 미국의 권고로 한·일관계 정상화 교섭은 남북 휴전 회담이 개시된 직후인 1951년 10월미국의 주선 으로 예비 회담 이 있었다 . 그러나, 옛날 일본으로부터 고문 받은 경험이 있는 이승만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명확한 사죄로 70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133] 일본측은 제의를 거절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취임 이후 그는 독도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2년 무효화되면서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 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이해말에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134],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134] 그는 이를 묵살하였다.

1952년 2월 4일에는 일본 어선이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 이를 나포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선박의 선장이 사망했다. 이후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135]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135]

중국측의 영해침략에 대해서도 강경대응을 하였다. 1955년 12월 25일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135] 한국 경찰관 네 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가서 12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1960년 1월10일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 중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135]

한국 전쟁 (1950 ~ 1953)

1951년의 이승만 대통령
한국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익산(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그러나 전황을 전혀 모르던 국민들은 북한군이 서울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피난을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철교를 예고없이 폭파해 무고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철교 폭파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36]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을 믿었던 상당수의 서울시민들은 한강 철교의 폭파로 발이 묶였고 조선인민군은 곧 서울을 넘어 대구, 부산, 포항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안심하라는 라디오 방송 당시 이승만은 대전에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피난가지 못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에 의해 유무형의 피해를 입게되었다. [모호한 표현][출처 필요]

이 무렵에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김창룡의 CIC 특무 헌병대에 지시하여 '인민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이를 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자들 가운데 실제 공산주의자 외에도 공무원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 수령을 위해 가입한 양민들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의 유해나 유적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 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조봉암이 끝까지 이승만의 사과를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1·4 후퇴와 휴전
한국 전쟁 참전군인 위문 순찰 중 정일권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 참전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200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38선 이북의 수복지역에서 부득이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유엔군은 원산 등의 지역에 폭격을 가하였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38선은 공산군 남침으로 이미 없어졌으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북진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 진격 전에 정전은 안 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중인 장면국무총리로 내정하였다. 당초 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내무에는 이순용, 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장면은 받아들이고 말았다.[137] 한국 전쟁 중 2년 동만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을 서둘렀다. 미국소련중공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138] 1953년 7월 27일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 지어졌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였으나 전시 작전권을 UN군에 이양하여 휴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휴전 협정 이후 이승만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한국전쟁 휴전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재충돌을 우려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한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였다. 중공의 개입으로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한 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6.25 전쟁의 후유증

국민 방위군 사건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를 국민방위군 사건이라 한다.[139]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명을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켰다.

취임 2기 (1952 ~ 1956)

부산 정치 파동

전시 중에도 부분적 지방 자치를 실시하는 등[140] 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고, 거창양민 학살 사건국민 방위군 아사 사건 등으로 정권의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이승만과 신성모는 용공분자의 음해라는 국민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의 주장을 그대로 믿었으나, 국민 방위군 아사자를 목격한 윤보선 등의 진언을 거절함으로써 윤보선 등은 그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승만은 결국 국민 방위군 총책임자 김윤근을 사형시킨다. 민주국민당 의원이던 서민호가 기생집에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하자 이승만은 사형을 선고한 뒤 자비를 베풀어 사형을 면제시키는 것처럼 하려 하였으나 육군중장 최경록을 비롯한 군관과 법관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이들에 대한 인사보복으로 대응하였다.

1951년 11월 19일 독립촉성중앙회를 기초로 자유당이 창당하고 자유당 총재직을 수락하였다. 이승만은 수도경찰청 인사참모 겸 경기도경찰청 보안과장 최연(崔燕)에게 자유당의 청년조직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141] 최연이원국에게 청도관 관원 5천명을 자유당에 입당시키게 하였으나[141]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를 주도하게 되고, 한민당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대통령 재선이 어렵게 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 이승만은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 데모를 획책하고, 부산정치파동에서 발췌 개헌을 시도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한편, 부통령 김성수는 부산정치파동 사건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며 장문의 항의서한을 남기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으로써 일본의 오래된 야심이 다시 재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인들은 한국이 또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 있는 한인 친일분자들은 일본인들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며 비판했다.[123] 실제로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123]

북한의 남침 직후 폭파됐다가 1952년 7월 22일, 2년여만에 복구된 한강철교를 이승만 대통령이 각료 등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지나며 손을 흔들고 있다.

1952년 10월 초 이승만은 주미대사 양유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일본 등과는 안보조약을 맺으면서 왜 유독 대한민국과는 그러한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며, 미국 행정부 내 친일인사들은[123] 일본이 군사적으로 충분히 재무장되면 "한국은 일본에게 또다시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노골적으로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142]

1952년 이승만은 "여성은 이르니 가당치 않다"라며,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사 임용 후보 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143]

1954년 3월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직후 양유찬 대사에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도 여전히 미국이 언젠가는 일본을 위해 한국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42] 4월11월 한표욱에게도 편지를 보내 "덜레스는 일본을 증강시키기로 작심한 인물", "덜레스는 일본 때문에 한국군대를 증강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42] 4월 7일 미군 제315공수사단을 방문하여 직접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일본의 전통적 팽창주의 야욕에 대한 경계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일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심각한 우려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닉슨 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전달되었다.[142] 1953년 11월 중순 닉슨이 방한하자 이승만은 아시아인들은 소련과 일본의 결탁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너무 강하게 증강시키지 말 것을 주문했다.[142] 1954년 2월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재건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민의 마음을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국정부는 일본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한국의 우정어린 경고를 무시하면서, 한국의 입장은 옹호하지 않고 일본의 편만 들어왔다고 주장했다.[142] 같은해 12월 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144]

불출마 선언과 번복

1954년 3월 5일 그는 국제사회에 국제반공십자군 창설을 제의하였고, 3월 27일에는 일본제 상품의 몰수를 지시했다. 3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의 증강을 미국이 보장하면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미국에 통고하는 한편 4월 28일 일본의 반공연맹 가입을 반대하였다. 5월 6일 제네바 정치회의에 참석한 6.25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를 해체하고 국제연합 감시하의 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미국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통해 이승만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5월 12일 이승만이 맹렬히 반대하자 대한민국 재선거안을 철회했다.

그 후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여 1956년의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장면이 당선되었고, 대선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 조봉암이 선전하였다. 이 저항에 이승만 정부는 1958년 진보당 사건을 터트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대한민국 최초의 사법살인을 자행했다.[145] 1954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을 방문했고 모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콜롬비아대학교에서도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3월에는 자유수호에 힘쓴 공로로 미국 금영자유훈장을 받았다.

한편 미국일본을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1954년 8월 3일 이승만은 유엔총회에서 한국 통일에 대한 지원을 역설하고 8월 9일에는 한일회담 재개용의를 표명하는 한편,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8월 30일 일본에 대한 미국의 편파적 정책을 경고하고, 11월 4일 일본의 한국 재침략 망상을 비난했다. 11월 14일 미 국무부가 제안한 일본의 반공동맹 참가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12월 15일 적성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을 언명하다.

구황실재산법과 대한제국 황실 재산의 몰수

1954년에 제정 되었으며, 영친왕 등 구 황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여 국유화한 사건이다.

이승만은 당시 자신을 황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영친왕등의 실제 황실의 후손에게는 '황족' 칭호를 쓰지 말 것이라는 경고까지 날릴 정도로 냉대했었다. 1950년에 이승만은 맥아더와 면담 때, 최초로 영친왕 부부를 만났고, 이때부터 이승만은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인 눈엣가시로 여기게 되었다.

법 제정 후 황실 후예들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만든 "구황실재산법"으로 모든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순종황제의 계비인 윤황후는 6·25 때 피란을 다녀온 뒤 원래 살던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릉의 한 집에서 귀양살이처럼 살기도 했다.

사사 오입 개헌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상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되어있던 조항을 1952년 직선제로 개정하여(발췌개헌) 이승만이 중임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3선을 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제이며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改憲)을 준비했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서, 3선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을 후보로 추천하여 다수 당선시켰고, 무소속 의원들도 다수 유인하여 개헌 정지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UN에서 한국 통일을 위한 선거안이 제기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하여 국가 안위에 관한 사안은 국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민투표제를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민투표제를 대표 안건으로 내세우고, 이와 더불어 3선금지조항 폐지·국무원의 연대 책임제 폐지·개별 국무원 불신임 인정·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 부여 등을 골자로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김두한(金斗漢)을 제외한 전 의원과 다수의 무소속 의원이 서명에 참여하여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국회에서 비밀투표를 한 결과(1954. 11. 27),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나타났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이었으므로 이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다(재적의원 2/3는 135.33…명이므로, 자연인은 136명이어야 함). 따라서 당시 사회자였던 부의장 최순주(崔淳周)는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수학의 4사5입론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半)도 안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상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의원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하여 국회에서 재론하기로 하였고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의사당에서 퇴장하였다. 자유당 의원들만 남은 자리에서, 자유당 의원 125명 중 123명이 찬성하여(김두한, 민관식 의원만 반대), 개헌안을 통과된 것으로 결정하고(11월 29일) 이를 정부로 이송하여 결국 개헌안을 공표·발효하였다.

이미 부결선언된 개헌안을 번복하여 가결시킨 행위(위헌), 야당이나 국회의장, 사회자의 의견을 무시한 행위(국회법 위반), 이론적으로도 필요충분한 가결선은 136명이어야 함에도 이치에도 맞지 않은 이론을 적용한 행위(비법리, 비논리 강제 적용) 등은 의회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국민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자유당 정부의 독재적 행태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의 뜻을 이루었고, 이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독재가 연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유당 내 양심적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점차 당의 정당성과 위력이 붕괴되어 갔다. 상대적으로 야당세력은 호헌동지회를 설립하면서 한데 뭉쳐 강력한 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도차이나 파병 검토

1954년 2월부터 이승만은 인도차이나 파병을 계획하고 프랑스와 접촉하였다. 베트남에서 베트콩의 활동이 맹렬하게 진행되는 것을 접한 이승만은 프랑스와 교섭, 한국군의 파병을 제의하였다.

그는 1954년 2월초 국군 1개사단을 공산군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인도차이나 지역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하였다.[146] 미국정부는 물론 프랑스 정부도 이러한 제안에 대해 애초부터 실현성이 없다고 보고 거절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다시 1954년 5월21일 외신과의 회견에서 한국군의 인도차이나 파병을 제안하였다.(「I.N.S. 통신사에 제공한 성명서」,1954년 5월21일,『담화집』2, 33-36쪽)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이러한 제안은 곧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베트남의 휴전이 합의됨에 따라 백지화되었다.

한편 1955년 3월 15일 이승만을 암살하려 한 대통령 암살음모자 이성재 외 6명을 검거했고, 10월 7일 대통령 암살기도사건 관계자 김동훈 등 8명을 체포했다.

우의마의 사태와 3대 대선 재출마

1956년 2월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자, 2월 5일 직접 헌병 총사령부내에 김창용 중장 피살사건 전담 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하였다. 2월 13일 일본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타협정책에 경고를 보냈고, 2월 21일 국회 연설에서 판사의 월권행위에 유감을 표명했다.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이승만은 불출마 서한을 전달했다. 56년 3월 5일 자유당이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하자 이승만은 "출마 않기로 작정했다."는 유시를 내렸다.[147]

그러나 3월 6일 국민회·노총·부인회 등이 궐기대회를 갖고 민의를 전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서울로 상경했다.[147]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강권하는 집회가 열리자 서울 시내 집회현장을 다니면서 이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3월 9일 전국 각지에서 측근들과 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 친위단체들 주최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가 열리고 3월 13일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노총이던 대한노총의 정치파업이 있자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3월 10일 이승만은 외신 기자들에게 "(국민이) 자살을 원한다면 자살이라도 하겠다"고 말해 민의 수용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3월 11일부터 어용 민의가 전국 각지에서 발동되었다. 영화인, 무대예술인, 댄서도 가만 있지 않았다. 우마차 조합에서 우마차 8백대를 동원하여 소와 말까지 출마를 원하는 우의마의를 이승만한테 알렸다.[147] 우의마의 소동으로 서울 거리는 똥바다가 되었다. 3월 12일 이승만은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고 타일렀다. 3월 17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 그를 만나 통일방안 협의하였고 일주일쯤 지난 3월 25일 공보실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를 발표했다.

3월 20일 이승만은 공보실을 통해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는 말을 다시 전달했다. 3월 23일 이승만은 3백만 명 이상이 날인한 탄원서와 혈서가 들어와 할 수 없이 민의에 양보하기로 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이 담화에서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선거 비용으로 백만 환 이상 쓰지 못하도록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148] 3월 28일 이승만은 이기붕부통령 후보로 적격이라고 말했다. 3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정부 및 서울시 주최로 열렸다.(이승만의 생일은 3월 26일이었다.)[147]

자유당은 3월 6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자유당 총재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그런데 선거운동기간 중인 5월 5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선거운동의 양상은 급변하였다. 그에 따라 대통령은 당선은 ‘이승만’이 당연시되었으나, 선거결과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무효표가 무려 20.5%에 이르렀고, 특히 서울은 투표자수 608,741명 중에 284,359명이 무효표를 던져 유효투표율은 53.8%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다 서울의 유권자들은 부통령선거에서는 96.4%의 유효투표율에 야당의 장면 후보에게 76.9%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또 조봉암이 30% 가까이 확보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에게는 부담스런 장애물이었다.

취임 3기(1956 ~ 1960)

대통령 당선과 행적

1956년의 이승만

이승만은 후보로서 단 한번도 공식적인 정견 발표를 하지 않았다.[149] 이에 대해 서중석은 이를 유권자를 바보 취급하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한 망자존대 의식의 소치였다고 보았다.[149] 이승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익희조봉암을 비판했다.[149] 5월 3일 신익희는 한강 백사장에서 장시간의 선거 유세를 했다. 신익희는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염을 토하자, 이승만은 그날로 바로 역전 유세 보다 훨씬 강도를 높여 두 후보를 공격했다.[150] 5월 3일 이승만은 유세를 하지 않겠다고 밝히고는 논산훈련소와 논산, 대선 등 7개 역 플랫폼에서 유세를 벌였다. 그는 역 구내에 가득 모인 군중 앞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고, 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류의 언동이다."라고 역설했다.[149][150]

"이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것은 반역분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뿐만 아니라 민중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말했다.[151]

그러나 5월 5일 신익희는 호남 유세를 다녀오던 중 열차 호남선 열차 안에서 사망하고, 이승만은 무난히 3선에 성공한다.

5월 22일 선거 결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는 당선공고를 접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6월 25일 6.25동란은 미국의 오판에서 일어났고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행조건임을 강조하였고, 7월 8일에는 환율 고수 및 공무원 인력 감원을 단행하였으며, 7월 26일 휴전협정은 이미 사문화되었음을 강조했다.

8월 15일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는데, 취임식에서는 부통령 자리를 내주지도 않는 등 부통령인 장면은 홀대하였다 한다. 8월 16일 취임 3기 첫 국무회의에서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강조하였고, 9월 1일 미국의 극동정책은 패배주의와 유화주의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으며 9월 13일 유엔가입을 적극 추진하도록 임병직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으나 한국의 UN가입은 무산되었다. 9월 17일 기자회견에서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를 비난했고, 9월 22일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 대선 전부터 일본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요구해왔으므로 9월 30일 한일관계 개선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재산권 청구 철회를 일본에게 요구하는 한편 11월 4일 동해안을 시찰하였다. 동해안 시찰 도중 이북동포 구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월 7일에는 소련에 항거한 헝가리 국민들을 예찬하며, 헝가리 국민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57년 1월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고,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8월 31일 방한한 UP통신의 극동 총국장인 호브라이트씨 부자를 면담하였으며 미국 오클라호마 주지사가 증정한 명예 시민증을 전달받았다.

1957년 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경무대를 찾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필요성을 설명하였으나, 이승만은 스탈린식의 사고방식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했다.[152][153] 1959년에 가서야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의 초안을 짰다. 그러나 4.19로 3개년 계획은 전면 중단되고, 제2공화국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

측근들에 의한 고립

1958년 1월 1일 이북동포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1월 21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였다.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월 8일에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난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했다.

앞선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독재체제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자신의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였다. 조봉암은 간첩혐의로 사형 당했다.[154] 그런데 이때 이승만의 최측근인 장택상윤치영이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벌이는 이변이 발생한다.

한편 그의 3선, 4선을 출마하기를 원한다며 자유당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3선, 4선 출마를 원하는 관제 시위를 주도했다. 이승만은 이것이 진심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측근들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국민은 그의 지도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고 믿었다. 국민과 우남을 격리시킨 일부 측근들에 의해 그는 현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155]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지지 위에서 민의를 대표하고 있다고 망상하고 있었다.[155] 소와 말까지 동원한 3선, 4선 출마 권고를 그는 진심으로 이해하였다.

허정은 '그는 주권재민을 앞세우면서도 카리스마적으로 군림하려는 태도가 있었다.[155]'며 그에게는 모순되고 상반되는 두 면이 있었다. 그를 보필하는 사람들이 어느 면에 중점을 두고 그를 돕느냐에 따라 우남의 행동은 달라질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이념적으로 앞세우고 있던 민주주의의 신념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그를 성심껏 그를 돕는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더라면 우남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도 될 수 있었을 것[155] 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유당 일파의 속임수를 얄밉게 생각한 이승만의 최측근 윤치영은 일부러 4대 부통령 선거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기붕의 표를 갉아먹는다. 윤치영에 의하면 '내가 자유당 사람들의 미움을 산 것은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하여 이기붕과 맞서서 결국 장면으로 하여금 당선이 되도록 한 사실이며[156]'라고 밝히기도 했다. 윤치영은 부통령 후보로 나서되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 하고, 이기붕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호언하였다.

이기붕 일파의 행동을 미워한 이승만의 또다른 측근인 이윤영 역시 부통령에 출마한다. '이기붕을 떨구기 위해서[157]'였다. 1959년 이윤영은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에게 진언을 하러 경무대로 찾아갔다.[157] 그러나 4대 부통령에 출마했던 이윤영을 밉게 본 이기붕 일파가 못만나게 해 놓아서 결국 이윤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승만과의 면회를 거절당하자 이윤영은 부통령 후보에 다시 입후보하였다. 주위에서 부통령 입후보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말리기도 하였다.[157] 그러나 이윤영은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하였다.

씨름판에 나가는 사람이 꼭 이기려고 나가느냐? 씨름에 져도 잠뱅이나 찢으려 나가는 거지! 이기붕이를 떨구기 위해서다.[157]

이기붕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에게 돈 1억원을 보내드릴 터이니 사퇴하고 자기를 밀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라고 해서 되돌려보냈다.[157]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그는 낙선하였다. 이후 이기붕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동안 경무대에 출입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승만이 윤치영이윤영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3.15 부정 선거가 터진 직후였다.

라오스 파병 계획

미국이 한국군의 감군을 직접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1958년에 가서 이승만은 다시 한번 인도네시아 파병을 제안하고, 비밀리에 우익 반군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158]

한편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에게 요청했지만 CIA를 불신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었다. 1958년 국방부 장관 김정렬로부터 미국 CIA의 요구에 따라 정보기관을 설치할 것을 건의받자 그는 당초 거절했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 산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

1959년 이승만은 라오스우익 노사반 장군이 이끄는 반군이 공산군에게 밀리자, 라오스 파병을 계획한다. 이승만은 1959라오스 내전에 개입할 의사를 피력하고, 비밀리에 국방부 내의 정보기관인 ‘79호실’ 책임자 이후락을 라오스에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였다.[158][159][159] 이후락은 당시 베트남 대사 최덕신의 도움을 받아 노사반을 만난 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보고에 따라 한국군라오스 파병이 깊이 있게 검토되다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59]

집권 후반

1958년 8월 11일 이승만은 갑자기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야당은 야당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법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12월 24일 무술 경관을 국회에 투입하여 야당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의 정문을 폐쇄시킨 채 여당인 자유당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비롯해 1959년 예산안 등 10개 법안 27개 의안이 통과시켰다.

베트남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승만(1958년 11월)

한편 계속 미국의 한일회담 압력이 들어오자 이승만은 3월 28일 일본 총리 기시(岸信介)의 한일회담 재개 요망 친서에 동의를 표한다. 3월 31일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인도차이나에 한국군 파견용의를 표명했고, 4월 26일 멘델레스 터키 총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을 수여했다. 58년 5월 19일에는 일본 총리가 보낸 특사를 면담하였으나 협의점은 찾지 못하였다. 58년 6월 29일 AP기자의 서면질문에서 유엔 감시 하의 북한 선거를 주장했고, 8월 5일 외신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국군 감축에 반대하고 장비 현대화를 강조, 8월 29일 아시아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강조하고 중화민국유재흥 국군 연합참모총장을 특사로 파견했다. 9월 13일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충돌 사태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자, 이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월 28일 원자력 연구를 지시하여,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11월 월남대통령의 초청으로 월남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12월 12일 CBS 방송국과의 기자회견에서 기자에게 UN군 철수 불가,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언명하였다. 1959년 1월 국가재산의 효율적인 운영을 지시하였고, 1월 26일 일본에게 약탈문화재에 대한 반환을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요구하였다. 2월 일본이 재일동포를 북송하자 추방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1959년 2월 4일자 경향신문 조간에는 무기명 컬럼 여적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에 대한 단평이 게재되었다. 이를 계기로 장면을 지지하였던 경향신문이 이에 따라 폐간되었다.[154] 그해 4월 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1959년 3월 1일에는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일본을 규탄, 일본에 대항한 국내 안전보장이 필요하다 주장했으며 3월 25일에는 미국에 서한을 보내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의 결단 요구했다. 59년 3월 29일에는 미국 언론에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 미국의 강경정책이 필요하다고 미국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1959년 4월 초부터 미국소련이 정상회담을 계획하자 4월 15일 이승만은 미국소련의 정상회담이 쓸모없음을 강조했고, 6월 8일에는 대한민국 국내에서 열리는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환영과 반공 메시지를 전달했다. 6월 24일 UPI 기자를 면담하고, 기자의 서면질문에 북진통일을 강조했으며 59년 6월 25일 미국 적십자사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1959년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학원(학교)에 잡다한 부과금 등을 근절할 것을 지시하였다. 9월 10일 국제 적십자 부위원장에게 북송은 적십자정신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1959년 12월 북한 송환 저지 공작원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1960년 3월 17일동아일보. 3.15 부정선거 개표결과 이승만 대통령 4선 당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보도한 기사.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부통령 당선을 위한 개표조작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진행된 가운데 경남 마산에서는 조직적 저항으로 발전한 마산 3·15 의거가 발생했다. 그러나 관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태는 확대되었다.

3월 15일 부정선거 반대시위에 참가했다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은 1960년 4월 11일 한 낚시꾼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서 숨진채로 발견되었다. 시체의 왼쪽 눈에서 박힌 최루탄이 확인되었고, 이는 부정선거 비판여론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언론을 통해 마산 3·15 의거를 남한에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가 된 폭동이라고 간주하면서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시위는 4월 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하고 수많은 중고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한 시위와 이에 대한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사태는 동료들의 희생에 분노한 학생들이 집회를 여는 지경에 이르렀고, 계엄령은 서울과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군부는 무력진압을 사실상 거부하고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내가 젊었을때에는 우리국민들을 잘 알고 이해해 왔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승만의 대답

한편 학생들을 탄압하자는 측근자들의 제의를 받자 그는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민중이 내가 그만둘 것을 원한다면 물러서면 된다.'[160] 며 강경 대응론에는 반대하였다.

대통령직 사퇴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의 뜻을 밝혔다. 그는 불의를 보고 국민이 좌시한다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161] 그는 학생들의 궐기를 높이 평가하며 우리 선열들의 독립투쟁과 3.1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였다.[162]

4월 26일 새벽 6시경 허정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때 이승만은 구 비서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하야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25일 저녁에도 학생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는 보고를 듣고 어떻게 국민들을 죽일 수가 있느냐. 내가 물러 나야지 하며 하야를 결심했다[163] 이승만의 하야 권고를 하러 간 허정은 하야 성명을 구술하는 이승만을 문전에서 보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164] 고 한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할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소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한다. 4월 24일에는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였다.[165]

한편 이승만은 4·19 의거 부상자들이 수용된 병원을 찾아 부상자들을 위문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대통령직 자진 사퇴의 뜻을 표하였는데, 연설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 대국민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 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단기 4293년 4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이어서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 한편,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4월 28일 경무대에서 이기붕의 장자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에 의해서 가족들과 함께 타살되었다.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4·19 혁명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이화장에 있을 때 중화민국장제스 총통으로부터 위로 편지가 왔다. 우남은 답신에서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청년학도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166]'라고 대답하였다.

사퇴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167] 김일성4월 21일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167]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167]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167]

4월 26일 이승만 사퇴성명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위 국제부장 박용국은 평양주재 대사들에게 브리핑했다. 브리핑에서 박용국은 "시위대가 탱크병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으며, 부통령인 이기붕의 집을 박살냈고, 전 내무장관인 최인규타이완으로 도망갔고, 남조선 경찰들도 동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167] 이어 미국이 이승만을 남기고 그 정부만 교체하길 원했지만 이승만의 사퇴는 불가피하다[167] 고 발표했다.

대통령직 하야 이후

미국 망명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국하는 이승만 박사. 왼편 두 번째는 대통령권한대행 겸 내각수반 허정
1960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 발표 후 하와이 망명가는 모습을 보도했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168]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했다. 영어에 유창했던 이승만은 실어증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의 간호를 받으며 약간의 한글과 한문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죽음

1960년부터 심장병이 있던 그는 트리폴리 육군 병원에 자주 진료하였다. 한편 그는 미국 하와이 망명 이후 교민들의 성금과 후원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자신에게 오는 후원금을 거의 쓰지 않고 아꼈는데, 그는 이 돈을 모으는 이유를 귀국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인수에게 말했다. 이후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한국 시간 19시 35분에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91세였다.

바로 미국에서 데스마스크를 만든 뒤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 1965년 7월 22일 경기도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하였으며, 7월 27일 서울특별시 정동 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가족장으로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대통령 박정희,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169] 그밖에 내외 귀빈으로 윤보선, 허정, 장면,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이 김포공항에 나와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했다.

시신은 운구차량과 경찰의 호송을 받고 서울 이화장에 안치되었다가 호상기간을 마친 뒤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170]

추도사

대통령 박정희 추도사

추도사는 국무총리 정일권이 대독하였다.

(중략)

전 대통령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허정 추도사

(중략)

장례 문제

배재중,고등학교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

시신 귀국 이후 장례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 4·19 혁명 관련 단체들은 이승만의 국민장은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항의 농성을 하였다.[169] 이승만의 시신이 운구되자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169]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의 부음 소식을 듣고,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7월 22일 비행기를 통해 이승만 시신이 귀국하자, 오전 8시경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하였다.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4월 혁명동지회 등 일부 단체에선 국장, 국민장, 사회장도 안 된다며 반발하였다.[169] 동아일보1965년 7월 23일자 사설에서 국장도, 국민장도 불가하다며 정부는 즉시 이승만의 장례에서 손을 떼라[171] 고 항의하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의 국민장을 추진하였으나,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을 고수하였다. 4.19 관련 단체에서는 국장도 국민장도 안 된다며 대규모 시위, 집회를 열었다.

양자의 의견 조율이 안되자 박정희는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하였으나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169] 화가 난 박정희는 '가족장으로 하려면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두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결정되었고, 박정희국무총리 정일권을 보내 추도사를 대독하였으며, 기타 허정, 이범석, 윤치영, 장택상, 윤보선, 장면 등 이승만의 측근들 및 정관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 등이 친히 추도사를 지어 낭독하였다.

평가

해방정국에서의 이승만의 주장이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172]

일반적 평가

긍정적 평가

허정은 '흔히 선생님을 독재자라고도 하지만 미국에서 수학하신 선생은 독재자는커녕 분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면까지 없잖아 있었다'[173] 라고 말했다. 또한 허정은 그가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점을 두고 그가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었다[174] 고 평하였다.

애국자라는 시각

장면은 '그 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하였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본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승만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175]'는 것이다.

허정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176] 며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176] 고 평하였다. 허정은 또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 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177] 라고 평가하였다.

극작가 신봉승은 '오직 조국의 자주 독립만을 위해 헌신하였다.[178]'는 평을 내렸다.

이승만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사상과 미국의 감리교사상이 혼합된 인물로서 평생을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는 평가가 있다.[179] 이와 관련된 후문으로 인권운동가 박소영은 그가 하와이 망명생활 도중 임영신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후문이 있는 것뿐, 그의 뒷얘기는 깔끔했다는 예를 제시했다.[179]

재평가 시도

1970년대부터 윤치영, 박용만 등에 의해 이승만 재평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윤치영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180]'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1991년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윤치영은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180]'라고 평하였다.

2001년 이후 결성된 뉴라이트 계열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건국대통령', '국부'로 재평가, 상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가적 차원으로 이승만 정부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한바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 박사는 국민학교 의무교육 실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긋는 자취를 남겼다는 주장이 있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181] 라고 평가하였다.

2대 국무총리와 4대 부통령을 지낸 장면은 '이 박사 밑에 국무 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182]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183]' 고 평가하였다.

13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은 그를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로 평가했다.[184][185] 대한민국의 건국의 주역이되 4사 5입 개헌 시기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였다.[184][185] 한편 김영삼은 또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다.'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 고 평가하였다.[185]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

농지개혁법을 시행했다.[186]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농림부 장관이었고 이승만의 진보당 사건 조작으로 사형당한 조봉암이다. 1948년 8월 이승만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건의와 설득을 받아들여 농지개혁을 승인한다. 농지개혁으로 왕조시대 이후 대지주에게 집중된 농토를 실제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인천의 지역 유지이며 인천시 의회 제1대 의장인 이명호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반발하였으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참았다고 한다. 이명호의 다섯째 딸 이양숙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호는 토지개혁으로 그 많은 땅을 빼앗겼으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187] 워낙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는데, 그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한 조봉암이 나서서 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187] 는 것이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효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비록 일부에서는 '실패한 토지개혁'으로 폄하하는 의견도 있으나, 정설로는 '토지개혁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다.

시대적 제약

전북대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은 '이승만의 시계는 구한말에 멈춰져 있었다. (많은 부정적평가와 긍정적평가를 이루면서도)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188]'고 했다. 강준만은 또 '이 점을 무시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것은 이승만에 대한 불필요한 악의적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188]

부정적 평가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최종적 결정 승인과 지시를 내린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친일 경찰, 군인, 관료 출신들을 '반공투사'라 칭송하면서 대거 등용했다는 점과[129],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들과 책임들, 토지개혁과 귀속재산처리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로 나아갔다는점, 이후 자유당과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점, 집권욕, 고집 등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허정은 '다만 처음 환국했을 때처럼 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 선 초당적 지도자로서 아직도 미숙한 한국의 정당들을 공평한 입장에서 육성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위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점[177] 과 정권을 인계함으로써 훌륭한 민주적 전통을 확립하지 못한 점만은 그의 잘못[189]'이라고 지적했다.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비판

1919년에는 미국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올리고 후에 다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신채호, 신성모임시정부의 무장투장파와 갈등하였고, 박은식 일파의 공격을 받았다.[출처 필요] 결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임정에서 이승만의 편을 들던 인물은 내무부총장 김구, 의정원 의장 최창식(崔昌植) 등 소수였다.[출처 필요]

이때,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라고 성토를 했었다.[190][191] 거기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임하면서도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서는 활동이 거의없어 1925년에 탄핵을 당하게 된다.[192]

조소앙은 이승만에게 쿠테타를 종용하는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193]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탄핵하자 이승만은 미국내 재미 한인 교포들에게 임시정부로의 송금을 중단하게 하였다.

이승만의 반대파들이 국민대표자 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임정의 해산과 재창조 등을 주장하는 창조파, 개조파 등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의 이승만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32년 11월에는 33년에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고, 1934년 국무위원회 회의에서는 신익희·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신임되었다.

자만심이 강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는 주장

측근이었던 허정에 의하면 자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으며, 한국인 중에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봤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하였으며, 그 외의 사람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허정은 '그가 대단히 성격이 급하고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주요 정치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완고했다'고 평하였다.[12]:229

초기에 그의 신임을 받기도 했던 장면에 의하면 '그분의 성격 소치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정치 면에 나타난 그분의 개성은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정적을 용서 않고 때로는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을 주저 않고 드러냈다.[183]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비위에 안 맞으면 공포 안하기가 일쑤이며, 그의 유시나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 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헌법 기관인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 재판소 등도 필요 없다고 구성해 주지 않았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킨 사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다.[183]'라고 비판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194] 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195]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195]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195]

친일 경찰의 활용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사건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노덕술,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고 한다. 이승만도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196]

제노사이드 범죄

제주4.3사건,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양민학살과 한국전쟁 중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벌어진 제노사이드에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이 제기된다.

동상 건립

4.19혁명 이후 대한민국에는 이승만의 동상이 없었다. 한국자유총연맹은 이승만의 동상 건립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2011년 8월 25일 이승만 동상이 서울특별시 장충동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자유총연맹 정문 앞 인도에서 사월혁명회·한국전쟁유족회 등 단체들은 동상 제막식 반대 집회를 열었다.[197]

임기 연장과 독재정권 수립에 대한 비판

대통령 장기집권과 독재정권 수립을 위해, 1952년부산 정치 파동과 발췌개헌, 1954년사사오입 개헌, 1960년3.15 부정선거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앞서 두 차례의 개헌은 기립투표와 궤변으로 민주적 개헌 절차를 무시한 채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이승만은 대통령에 세 번 피선되며 장기집권을 실현했고, 이후에도 4선을 위한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또 한 번의 임기연장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다수의 학자들로부터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보수 정치인 김무성 의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와 부정부패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198]

사법살인에 대한 비판

진보당 사건으로 정적 조봉암을 숙청하기 위해 사법살인을 자행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사건 당시 이승만 본인이 직접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은 아직도 공산당원이 틀림없다. 이러한 위험분자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하는 등 본 사건에 깊숙히 관여한 정황이 있다.[199] 이후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거, 간첩혐의로 사형되었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봉암에 대한 사과와 피해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국가에 권고했고, 2008년 8월 조봉암의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하였다. 이로써 진보당 사건조봉암에 대한 사형 집행은 이승만 정권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남게 되었다.[200]

언론탄압에 대한 비판

1955년 '동아일보 괴뢰 오식 사건'과 '대구매일신문 피습 사건', 1958년 '경무대 똥통 사건'과 '함석헌 필화사건',[201]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켜 언론을 탄압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역사학자 박한용, 언론인 김삼웅 등 다수의 인사가 이승만 정권의 언론탄압에 대해 비판하였다.[202][203]

외교력 평가

대미국 관계

이승만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일본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미국은 비밀리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파견한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과 일본 총리 가쓰라가 비밀 회담으로 일본이 한국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을 일본이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대에도 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고,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대일본 관계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204] 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 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대아시아 관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한 중화민국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장제스를 방문하여 면담하기도 하였고, 내한한 장제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고 딘 디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네루와는 사이가 안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동시대 인물 간 비교평가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개신교, 김구동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국(중화민국) 노선으로 갔다.[188] 훗날 중국 국민당 장제스중화민국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거의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향후 12년간 통치하게 된다.[188]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205] 한편 김구도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205]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러나 김구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서게 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206]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정치인 암살,테러등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는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207]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207]

윤경빈에 의하면 훗날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208]

이승만과 서재필과의 비교

서재필은 대를 잇는다는 개념 자체를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극도로 혐오하였다. 서재필은 문중에서 서재필이 아들이 없음을 염려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계획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쓸데없는 일들이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살아 있소. 이제 새삼스럽게 양자를 세운다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소이다."하고 거절해버렸다. 이어서 "이런 생각은 모두 고루한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사상을 길러가는 것이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할 수 있는 길이오.[209]"라며 "부지런히 일이나 하고 착실하게 살기 위한 새로운 힘을 연구하시오."라고 덧붙였다. 서재필은 후사가 끊어진다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문중에서는 서재필이 아들이 없어 후사가 끊어짐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210] 서재필의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임을 말해 주었다. 그는 이미 가족관념을 청산한 인물이었다.[211]

서재필은 서울의 친척집에도 다니지 않고 공무가 끝나면 조선호텔에서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가 귀국하자 서씨문중에서는 들끓기 시작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소란을 몹시 싫어하였다.[209]

서재필은 한국인가족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가족주의가 바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주의를 만드는 원인이며 이방인을 배척하는 근간이라 생각하고 끔찍히 여겼다. 서재필은 지나친 형식 위주의 완고한 족벌의식은 조국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209] 서재필의 이러한 풍모를 두고 그의 둘째딸인 뮤리엘이 후에 지적하여 말하기를 '파파는 심플맨이에요.'라고 하였다. 훗날 송건호는 서재필이 형식과 금전과 동양적인 가족 관념을 청산한 크나큰 인물이었다[209] 라고 칭송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재필은 탈조선화 된 인간이라 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성재 이시영의 장례식 때 신익희가 장례위원장이었다. 이시영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승만은 빈소를 찾아 분향하고 상제에게 조의를 표한 후 돌아서다가 두 손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익희에게 "그래도 성재장은 이런 고몰고몰한 손자들이 있었구려"라고 하였다.[212]

신익희나 그의 비서 신창현에 의하면 이승만은 이시영의 손자들을 보더니 '눈귀에 다시 눈물이 지적지적하였다' 했다. 나중에 신익희는 비서이자 종손인 신창현에게 "그 어른 오랜 미국 생활로 아예 우리나라의 대를 잇는다던가 하는 종법 관념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을 줄 알았는데, 자기가 아들도 없고 손자조차 없음을 마음속 깊이 한으로 품고 계신 것이 역력히 보이더라."라고 했다.[213] 신익희는 이승만이 후사가 없음을 한으로 여겼다고 술회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타인의 평가

1920년대부터 1960년 망명 전까지 가까이에 있었던 허정에 의하면 대단히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12]:229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이승만은 비난과 독설에 매우 능숙했다' 한다. 이승만의 미국인 고문 로버트 올리버가 언젠가 이승만에게 그런 문제점을 제시했더니 이승만은 "나도 알고 있소.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 왔으니까 그렇게 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오"라고 답했다.[188]}}

장택상은 이승만의 결점으로 "이승만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14]

이승만에 대한 허정의 평가

허정은 이승만이 사리에 옳은 말이라면, 누구의 말이라도 수용하는 담박한 면이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아는 우남은 유순한 호호야(好好爺)였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였고, 자신보다 20~30세 어린 연하자들에게도 반드시 공대를 하며, 사람의 방문을 받을 때엔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였다.[215]

또한 이승만은 평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 하여 인사를 받거나,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 존재를 하고 맞인사를 했다 한다. 허정은 부정이나 거짓을 보면 육친이라도 용서함이 없는 반면 옳은 일, 곧은 말이면 삼척동자의 말이라도 곧이 듣는 성미였다. 또한 부드럽고 자애롭고 유머 센스가 풍부한 사람이면서도 한번 화를 내면 호랑이처럼 무섭기도 했다.[215] 고 했다. 조크를 잘 하기로도 으뜸이었다.[215] 장관을 해임할 때는 그만 두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한다. 허정은 직접 담화를 쓰지 않고 장관을 해임할 때도 '그 동안 수고했으니 잠시 좀 나가서 쉬게'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215] 진언을 받으면 즉시 메모하고 유익한 일이면 미루지 않고 결단으로 실천하였다.[215] 반면 누가 나쁜 짓을 했다는 보고나 참소를 들으면 사실여부 불문곡직하고 목부터 베어놓고 연후에 진부를 가려내는 수가 적지 않았다.[173] 고도 했다.

유머 연발과 농담

이승만의 측근이자 중학교 재학때 기독교청년회 영어학원에서 배웠던 허정은 이승만이 농담도 잘 하고, 장난도 잘 쳤으며 성격이 유머러스했다고 한다.

허정에 의하면 '그는 근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매우 유머러스한 성품이어서 학관에서는 재치 넘치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잘 웃겼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분이 좋을 때의 일이고 화가 나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216]'며 '기분이 좋을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성격이 되어 유머를 연발했다.[216]'고 한다.

고집스러운 성격과 가부장적 태도

허정은 이승만이 독립운동하기 전부터 고집스러운 태도와 가부장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하였다. 일단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서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내면 자기 뜻을 조금이라도 굽히거나 남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가부장적 카리스마의 일면이 엿보였던 것이다.[216] 허정은 이승만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장점과 단점, 업적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고집, 이때는 확신이요 신념이었지만, 그의 고집은 우리 역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고집한 것이며, 반공포로 석방, 일본에 대한 완강한 반대 등은 그의 고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216] 그의 고집의 나쁜 일면은 그에게 말년의 불운을 안겨주었다. 그가 자유당에 카리스마적 인물로 군림하지 않고, 진정한 민주 정당으로 육성하려는 배려를 아끼지 않고, 또한 합헌적인 정권 교체를 통해 평화로운 정권 교체의 선례를 남겨놓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국부(國父)로서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217] 그러나 통일은 내손으로 라는 결코 나무랄 수 없는 그의 고집이 결국 슬픈 결말을 초래한 것이다.[217] 허정에 의하면 평소의 이승만은 농담도 잘하고, 장난도 잘 치고, 유머도 잘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집스러운 성격과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장면과 조병옥에 대한 이승만의 평가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조병옥을 꼽았다.[218] 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야유를 더 받더라도 스스로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218]

기타

어학 능력

그는 역대 정치인 중 영어를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 인물이었다.[219] 그는 영어를 제1언어처럼 사용하였다.[220]

그는 약간의 독일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부부 간에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스트리아의 언어인 독일어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한다.[220]

권위주의적인 태도

1947년 가을 당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친이승만 신문이었던 민중일보의 사장이자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인 윤보선의 요청으로 서정주가 이승만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슨 자료를 찾아오라고 프란체스카에게 시켰다는데 조그마하고 가냘프고 유순한 부인은 묵묵히 명령대로 나가 꽤 오랜 뒤에 돌아와서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일은 어느 집에서나 가끔 있는 일로 자세히 오래 찾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와서 가져가겠다 하고, 여기를 뜨려 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침대에서 허리를 반만 일으키고는 들어와 서 있는 프란체스카 부인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며 영어로 "겟 아웃!"하고 크게 소리치고는 나보고 거기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인이 마치 꾸지람 들은 어린애처럼 풀이 죽어 주춤주춤 물러나가는 것을 보았다.

— 서정주[76]:269~270

소설가 미당 서정주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의 전기를 완성했다. 그래서 1949년 10월 삼팔사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 책은 나오자마자 발매 금지 처분을 당했고, 내무부 치안국이 압수 명령을 내려 서점에 깔린 책들은 다 몰수되었다. 이승만은 대변인 김광섭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 밑에 경칭을 안 붙인 것을 문제삼았다. "서정주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하는 질문에 김광섭이 좋은 시인이라고 대답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비판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76]:270 강준만에 의하면 서정주가 어른을 모셔 보지 못해 경칭을 생략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로서 서양 물을 40년 넘게 먹은 이승만이 서양의 전기에선 경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해할 것이라고 믿은 것뿐이었다. 서정주는 이승만이 오히려 정반대로 40년 넘게 외국을 떠돌아야 했기에 조선, 그것도 구한말 조선의 전통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렬했다는 것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76]:270

개신교 보급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주영은 그를 윤치호와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221] 이주영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의 미성숙으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개인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유선거제도의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221]

핵력 공학과 개발 추진

1958년 이승만은 에너지를 발전을 위해 핵력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핵력 공학과 개발을 추진한다. 그러나 핵력 공학과 개발 시도는 2년 만에 1960년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절반도 시공되지 못했던 핵력 공학과 개발 계획은 그대로 백지화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하지만 휴전 이후 미국은 북방한계선을 그어 이승만의 북진을 막았다. 이승만은 미국의 개입없이 북진하려면 핵폭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많은 학생들을 유럽으로 유학보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이승만의 의도를 알고 독일 등에 망명하는 경우가 있었다.[출처 필요]

미국의 이승만 제거 시도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이 반휴전 태도를 고수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유엔군사령부 주도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수립했다.[222]

1952년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수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후원할 경우 전쟁 수행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미국은 이 계획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222] 마땅한 대안자를 찾지 못하던 미국은 이승만을 유지하되 그의 주변 측근들 중 강경파를 숙청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제거가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으며, 한국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미국의 정책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때마다, 미국은 이승만의 제거를 고려했다.[222] 4·19 혁명 당시 이승만의 퇴진에 대해 윤치영은 '미국 사람들이 앞장서서 한 짓이나 다름이 없다.[180]'라고 증언하였다.

1950년대 말에 있어서는 한때 장면을 대안으로 세웠으나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유당 내 온건파인 이기붕 등을 통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추진하려 하기도 했다.

정파,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

이승만은 정당 정치 자체를 파벌싸움이나 일으키는 갈등의 요인으로 해석하였다. 이승만은 정당정치를 조선시대 당파 싸움 개념의 연장선으로 이해하였다. 이승만은 한민당의 영수가 되어달라는 허정의 주장에 대해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민족을 단합시켜 한 뜻을 갖고 일하게 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한 정당에 소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전민족의 단합이라는 더 큰 일을 버리는 것이오.[64]'라고 답했다. 허정은 이러한 정책을 높이 평했다. 반면 이승만의 정당정치 혐오를 두고 신익희윤보선 등은 비판을 가하게 된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 창당 사실을 이승만에게 알리기 위해 신익희김성수경무대를 방문했다.[223] 그런데 신익희는 이승만이 창당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자 이를 불쾌히 여긴다. 면담은 오래 걸렸고 그 날 오후에 나왔다. 나온 후 김성수는 차에 오르자 마자 벌레 씹은 우거지상을 하고 말이 없었다. 신익희는 "정당은 무엇 때문에 조직하는 건데 이 어른 정당을 조직했다고 인사온 사람보고 정권에는 도전하지 말라니..... 모든 것을 혼자서 도맡아서 두고두고 하시겠다는 말씀이야. 우리들을 아간지(兒看之), 어린아이 보듯 하시는 말씀이지.[224]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익희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정당 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정당정치를 두고 민주주의 정당 정치를 부인하는 행위라며 비판한다. 윤보선은 '그이는 흉중에 무슨 생각을 품었던지 정당정치의 부당성을 주장해 오다가 6.25 사변 후 갑작스레 자유당을 만들어 정당정치를 표방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회 정치사상 본궤도를 찾은 셈이 되었다[225] 고 주장하였다. 한편 2대 대통령 때부터 이승만은 민심이 이반되어 권위가 날로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민 대다수를 점유하는 농민, 노동자, 근로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신당을 조직하겠으며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라고 하였다.[226]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한 것을 두고도 반응은 엇갈렸다. 나중에 이승만이 친위 정당인 자유당을 결성한 것을 두고 윤보선은 당연한 정치태도라는 입장을 보인 반면 신익희는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로 하면 당선이 어려우니까 재선을 위해 수를 쓴 것으로 해석하였다. 허정은 귀국 초기의 입장처럼 중립적인 시각을 보이라며 촉구하기까지 했다.

만사에 직접 개입, 결재

이원순은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관여, 간섭하면서도 일면 사소한 것은 대강 넘겼다고 했다. 그는 정사의 세부에까지만 관여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행정부의 자세한 사무에는 초연하였고, 원칙상 기본적이고, 전체적인 정책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였다.[160]

신익희 역시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증언하였다. 신익희는 취임 초 그를 찾아가 그가 시시콜콜 간섭, 개입하는 것을 염려하여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 앉습니다.[227] 라며 각 해당부서 소관 업무나 인사권한은 장관, 차관선에서 해결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내가 직접 보지 않으면 다른 짓을 할지도 모른다며 응수하였다. 이승만은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라고 하였다.[227]

허정은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 외에도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또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사명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념 또는 아집이었다.[228] 허정에 의하면 '우남은 자기 손으로, 그리고 자기만이 한국을 훌륭한 민주국가로 키울 수 있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스스로 설정한 정치적 목표였고 스스로 내세운 사명이었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될 때까지 이 사명을 수행하는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신뢰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국민의 이러한 신뢰는 그의 정치적 사명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동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228]'라고 보기도 했다. 만사에 일일이 개입하는 업무 스타일을 그의 최측근 이외의 부하직원들은 피곤하게 여겼고, 이기붕 일파와 자유당은 이승만에게 소와 말까지 동원해가며 국민이 재출마를 희망한다(우의마의)며 그를 속이기도 했다.

군 견제 정책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국군 세력을 이승만은 경계했다.

1954년 5월 정일권 참모총장이 그와 친밀한 사이에 있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의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229] 했다.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소위 경무대 유시를 근거로 하는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229]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2군의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230]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였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암살음모와 교사 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230]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것이다.[230]

군인들의 쿠데타 기도를 두려워하던 이승만은 국군 내 일본군 파벌, 만주군 파벌, 광복군 파벌 간의 헤게모니 쟁탈 갈등을 알고도 묵인했다.

1940년대의 설문조사

1957년도 1,000환에서의 이승만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驅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9%가 이승만을 지목하였다.[12]:226~228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431명이 이승만을 선택하여 1위로 집계되었다.[12]:226~228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76표를 얻어 2위였다.[12]:226~228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1961표로 전체의 29%를 확보했다 한다.[12]:226~228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에 대한 모의투표를 실시했는데, 여기서 결과는 1000표(이승만) 대 900표(여운형)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231][232]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024표로 1위를 하였다.[12]:226~228

각종 의혹

독재자가 아니라는 견해

그가 독재자라는 견해에 대해 독재자는 아니라는 설이 있다. 그에 의하면 이승만은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독재자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4.19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허정은 이승만의 성격을 알기에 그가 독재자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나 잔인하고 혹독하게 탄압했을 지 모른다고 했다. 허정은 '우남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의 길을 택했다면 얼마나 철저했을 것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228]

허정에 의하면 '우리가 독재라고 부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설프고, 불철저했던가.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이렇게 불철저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독재자는 우남과는 다른 유형임을 이제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의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았지만 그가 평소에 쌓은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228]'고 주장하였다.

윤치영은 이승만이 평소 '부정과 부패를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공명선거를 믿고 있었다며[233] 이승만 몰래 자유당 측근들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보고되자 깜짝 놀라, 그렇다면 학생과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며 자진해서 하야한 이박사[233] 였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이승만은 4월 27일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었다.[162]'라며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원순은 '학생들의 의거가 한창일 때 그는 대통령 직위를 미련 없이 버렸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별로 명예욕이 강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이도 생각된다.[160] 라고 평하였다.

독립운동 할 때의 마인드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때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당시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정치를 한다고 했다. 1948년 7월 20일 초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직후 처음 방문한 신익희는 "우남께서는 을미사변, 을사늑약, 경술합방을 겪으시면서 해내, 해외에서 영토토 국민도 없이 유한한 몇몇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하시느라 어렵고 위험한 형극의 길을 50여 기나긴 성상을 걷다가 반쪽일 망정 영토, 국민, 주권의 세 요소를 갖춘완전한 독립국가의 대통령이 되셨으니 그 감개무량함이 남달리 여타유별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만 가지 모두가 청황이 부접하고요, 얼얼이 미정한 때에 깊은 근심과 짙은 걱정이 전보다 몇 배 더하실 것입니다. 하와이에서, 상해에서, 미 본토에서 독립운동하시던 그 때와는 판이하게 아주 다릅니다.[234]"라며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 앉습니다. 이렇게 하셔야지 만일 그렇지 않고 만기(萬機)를 일일이 친자(親自) 총괄하시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무리 기억력 좋고 영리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남장께서는 지금 나이가 연만하신 터수에 어려우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227] 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승만은 신익희의 건의가 끝나자 벌떡 일어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고는 훅훅 불면서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시는 말씀이야."라고 하였다.[227] 신익희는 "우남 대통령 저 어른 큰일났다. 아직도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노무자로 이민간 무식한 교포들과 비서 몇 사람 데리고 일하시던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앞으로 정형(情形)은 어려워 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227] 신익희는 그가 독립운동 할 당시의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다고 하였다.

측근들의 부패와 오도

측근들이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설도 있다. 이승만이 돈암장, 이화장에 있을 때부터 비서관이며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이기붕의 수하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이박사를 속였다고 진술했다. 윤치영은 '가슴아픈 것은 면종복배판 측근들에 대한 이박사의 심정이었다.[162]'는 것이다.

윤치영은 내무장관 최인규와 자유당 간부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선거전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내무장관 최인규가 진두지휘하는 행정부의 부정선거 음모는 자유당 수뇌들과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정관서와 경찰이 청중을 강제동원하는 전국 유세가 2월 27일 대구에 이르러 수성천변에는 역사상 초유의 군중이 자유당 집계로도 30만에 달하였다.[235]'며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에는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등교케 했다. '최인규가 각급 행정관서와 경찰, 그리고 지방선거관리위원회에 내린 비밀지령은 이기붕 후보를 필사적으로 당선시키려고 무리를 담고 있었다'며 윤치영은 '이러한 부정선거운동의 양상을 보며 더군다나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평소의 소신과 철학대로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으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이승만 박사의 처지가 가엾고 통분할 노릇이었다.[235]'고 했다. 윤치영은 노쇠한 이승만 대통령의 여생을 점치던 정상배와 협잡꾼들과 같은 기회주의자마저 끼어들어 벌써부터 논공행상에 여념이 없는 작태들을 노정시키고 있었다[236] 허정 역시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에 희생되었다[228] 고 하였다.

장면은 이승만 측근들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장기집권은 이승만의 뜻이 아니라 그 부하들의 농간이었다는 것이다. '그 분을 장기집권 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중석불 사건, 원면 사건, 연계 자금 사건, 산업 금융 채권 사건 등 추잡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237] 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을 은연중에 인식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1958년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당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철창에 갇힌 호랑이'에 비유해서 혼잣말처럼 독백하시던 일로 미루어 나로서는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235]'며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부하들의 농간에 놀아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승만 우상화 논란

49년 3월 26일 중앙청 광장에서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9시에 기념식이 열렸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었다. 54년 9월 18일 교통부 광장에서 '철도창설 55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56년 3월 31일 서울 탑골 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되었다. 56년 8월 15일 이 동상의 제막식에서 이승만에 대한 만세 삼창이 이루어지고 서울 하늘에서는 축하 불꽃 놀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동상은 4.19혁명 이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철거되었다. 59년 10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등 이승만을 소재로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 서울 뚝섬의 '우남송덕관', '우민회관', '우남정'등 이승만의 호 '우남'이 들어가는 건물이 건축되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중앙대 도서관도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승만 하야 이후 이러한 기념물,건물등은 철거되거나 명칭이 변경되었다.[238]

2010년 한기총 나라사랑운동본부은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 동상 건립 소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을 갖고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의 정체성을 세우고 미국과 손잡고 태평양 기독교문화권을 형성한 우남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을 펼치는 게 당연하다”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 정신과 정통성 회복을 위해 이 대통령 기념사업과 동상 건립, 건국기념일 제정에 정부가 앞장서 줄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한국교회에는 동상 건립 모금운동과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239]

미국의 이승만 제거 음모설

3.15 부정선거 자체를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계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윤치영은 이박사의 빛나는 독립투쟁의 업적을 이 기회에 일거에 실추시키고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모측의 계획된 공작[240] 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윤치영미국 국무성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부터 변질되어 이승만 박사를 기꺼이 하야하도록 만든 일관된 계략이 있었다[233] 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윤치영은 '미 국무성의 이승만 제거작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나 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 그 진상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233]'며 의혹을 제기했다. 윤치영은 1950년대부터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국민회 자금 유용 의혹

박용만과의 갈등 중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활동에서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온 초기부터 하와이 실력자이면서 군사양성에 열중하는 박용만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박용만 반대세력을 규합했다.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의 운영권 곧 회비관리권을 움켜쥐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으나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박용만은 다른 농장으로 군영을 옮겨가면서 군사훈련을 거듭했으나 두 사람의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241]

1910년대 중반 무렵 일제는 밀정을 통해 박용만의 군사훈련 사실을 캐냈다.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미 국무장관에게 이를 항의했고 국무장관은 하와이 총독에게 그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1918년 박용만이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241]

그는 미국 영토에 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배일활동을 하면서 일본군함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짓이다.[241]

박용만은 온갖 음모에 시달리면서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승만은 자금횡령 혐의로 대한인 국민회 간부들을 고소했고, 국민회 간부들은 법정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서로 벌인 소송사건이 열 차례나 있었다. 국민회와 이승만파(동지회)가 서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국민회 대포회의때 총격이 가해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분쟁 속에서 마침내 국민회 주도권이 이승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241]

대한인 국민회 계열 재미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두고 '협잡배'라 매도했고 돈을 너무 밝힌다고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241]

이후에도 이승만과 국민회가 독립자금 문제로 분란을 겪어 끊임없이 의혹을 받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자 국내외에 걸쳐 많은 독립자금이 들어왔는데, 1919년 미주의 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송금한 내역을 보면 공식적으로 36,000달러였다고 한다. 다음 해 이승만도 많은 돈을 가지고 상하이로 왔는데, 1920년도에는 미주에서 2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로 보면 2억 달러가 된다.[242]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발족한 뒤, 미주 동포들이 낸 독립자금은 구미위원부에서만 사용하고 임시정부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자금 모금을 두고 다시 주도권 분쟁이 야기되기도 하였다.[242]

박용만, 안창호 계열의 비판

박용만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주해 5][243]

'재미한인 50년사'를 저술한 김원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파쟁과 모함과 비난과 재판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대한인 국민회와 별도로 자기를 지지하는 '동지회'라는 단체를 따로 조직해서 국민회와 적대관계를 지속하여 한인사회를 분열시켰다.'고 비판하였다.[244]

1983년부터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은 지금 살고 있는 하와이 이민 1세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을 부정적 시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으로 보는사람들 등등 각각 서로 반반씩 존재했었다. 이승만에 부정적 시각가진 이들은 대한인 국민회 철폐한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려고 든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한다.[245]

여성 편력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그는,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임영신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거절하였다.[246]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246]"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은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으며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홀로 귀국했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 박사는 돈암장에 거주했다. 이때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등이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그를 도왔다.[247] 당시 이 박사는 71세, 임씨는 47세였는데,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이 소문은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247]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247]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이주한 후 마포장에 머무를 무렵, 김구 외에 임영신윤치영만이 마포장을 통제받지 않고 출입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임영신과 동침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도너임영신마포장에 출입금지 시켰다.

김구의 이승만 암살 미수 의혹

장덕수 사건 이후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이승만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안두희 공판기에 의하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김학규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하여 3, 4월경에 입당 절차를 밟았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내주게 했다고 하며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일은 없다고 한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났을 적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 자신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말하여 왔다며 김학규는 그 후로 홍종만을 통해 찾아주지 말기를 요구하며 김구의 암살 약 1달 전부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김학규한국독립당에서 비밀당원증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248]

그런데 진술과는 달리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경교장에 모인 한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사건 직후 경교장에서 보좌진을 부른 김학규는 자신이 소지하던 손수건 두 장 크기의 하얀 천을 한장 보였다.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249]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 라고 붇자 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하며 부르르 떨었다.[249]

이 사건 직후 김학규안두희의 혈서를 그대로 불에 태웠다.[249] 그러나 김학규안두희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는 이미 유출된 뒤였다.

친일 논란

1918년 징집서류에 이승만 본인의 국적을 'Japan'으로 자필서명한 사실이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 이 공개한 자료에 의해 드러났다.[250] 더욱이 동시대 미주한인 대부분의 징집카드 국적란에 'Korea'로 표기되어 있던 것으로 드러나 그의 기회주의적 면모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251]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비고
제1대 총선 국회의원(동대문구) 1대 무소속 - - - 동대문구 국회의원 당선 단독후보
제1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1대 대한독립
촉성국민회
91.8% 180표 1위 대한민국 제 1대 대통령 당선 간선
제2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2대 자유당 74.6% 5,238,769표 1위 대한민국 제 2대 대통령 당선 발췌개헌
제3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3대 자유당 70.0% 5,046,437표 1위 대한민국 제 3대 대통령 당선 유효투표율 53.8%
제4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4대 자유당 100% 9,633,376표 1위 대한민국 제 4대 대통령 당선 단독후보

수상 경력

학력

명예 박사 학위

가계

첫 배우자 박씨에게서 얻은 아들 이봉수를 잃은 뒤,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강석이 사망한 뒤 대원군의 5대손인 이청이 양자 후보로 낙전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왕정복고를 연상시킨다"며 양자 입적을 중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씨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뒤 고아원에서 아들 하나를 양자로 들여 은수(恩秀)라고 하였다. 그러나 1949년까지도 은수가 호적상 그의 양자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이승만의 양자는 같은 항렬의 친족인 이승용의 아들 이인수를 양자로 들이게 됐다.

  • 고조부 : 이최권(李最權, 1756년 ~ 1808년, 진사[252])
  • 증조부 : 이황(李璜, 1784년 ~ 1845년)
  • 증조모 : 남양홍씨, 현감 홍치복(洪致復)의 딸
  • 할아버지 : 이창록(李昌祿, 1811년 ~ 1862년)
  • 할머니 : 밀양박씨(1817년 ~ 1849년) - 박동욱(朴東郁)의 딸
    • 고모 : 전주이씨
    • 고모부 : 김재석(金載錫, 본관은 김해)
    • 고모 : 전주이씨
    • 고모부 : 한필수(韓必洙, 본관은 청주)
    • 고모 : 전주이씨
    • 고모부 : 오인모(吳仁模, 본관은 해주)
  • 할머니 : 고령신씨(高靈申氏), 신흥우에 의하면 고령신씨가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의 생모라 한다.
  • 할머니(계모) : 제주고씨(1833년 ~ ?) - 통정대부 고인관(高仁寬)의 딸
  • 아버지 :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3년 12월 5일)
  • 어머니 : 김해김씨(1840년 ~ 1916년)
    • 형 : 2명 요절
    • 누이 : 이태명, 황해도 해주의 우씨에게 출가
    • 매부 : 우태명(禹泰命, 본관은 단양)
    • 누이 : 전주이씨, 황해도 연백의 심씨에게 출가
    • 매부 : 심원붕(沈遠鵬, 본관은 청송)
  • 배우자 : 박씨(朴氏, 박승선(朴承善)), 1891년 결혼, 그 뒤 이혼) 1875년 ~ ?
  • 배우자 : 프란체스카 도너 (1900년 ~ 1992년 3월 19일, 한국명 이부란)
  • 외조부 : 김창은(金昌殷, 본관은 김해)
  • 진외증조부 : 박동욱(朴東郁, 본관은 밀양)
  • 장인 : 박춘겸(朴春兼), 박승선의 아버지
  • 장인 : 루돌프 도너 - 프란체스카 도너의 아버지
  • 장모 :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 프란체스카 도너의 어머니

저서

신체시 효시는 이승만의 '고목가'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승만이 1896년 《협성회보(協成會報)》에 <고목가(枯木歌)>라는 신체시를 발표하였다는 설이다.[253]

또한 이승만은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옥중기)와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한 일본 내막기 등을 썼다. 그밖에 시집도 냈는데 옥중에서 쓴 시들의 모음집인 체역집 등이 있다. 체역집이라는 시집은 그가 고종 황제의 수구정책을 비판한 혐의 등으로 1899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체포, 구금돼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때 지은 한시(漢詩)들을 모은 것이다.[254]

  • 《영한사전》
  • 《청일전기》
  • 《독립정신》[255]
  • Korean Mission to the Conference on the Limitation of Armament〉(군축 회담에서 한국의 역할), Washington, D.C., 1921-1922. (1922)
  • 《일본 내막기》(1941)
  • 《건국과 이상》
  • 《일본 그 가면의 실체》
  • 《일민주의 개설》(이승만, 일민주의보급회, 1949)

시집

  • 《이승만 한시선》
  • 《체역집》

작품

기타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인 장평도정 가문에서도 이승만은 한참 방계에 속하였다. 14대조 부림령 이순(1489 - 1540) 역시 장평도정의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고, 12대조 이충의는 셋째 아들, 11대조 전풍군 이원약이 둘째 아들이었으며, 6대조 이징하는 둘째 아들, 5대조 이환은 셋째 아들이었다.

서재필배재학당독립협회, 협성회를 통해 이승만을 지도하였으나 해방정국에서 그는 이승만의 정적으로 변신했다. 이상재는 독립협회와 YMCA에서 그의 활동을 도왔고, 옥중에 있을 때는 이승만이 준 성경을 보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상재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이승만의 미국 유학비와 생활비를 지원, 후원하였다.

가난한 한인 고학생들이 찾아오면 찾아가서 끼니와 차비와 숙박비도 지불해주었고, 학생들의 학비까지 직접 건네주기도 했다.[256]

1957년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또한 열녀상(賞)을 부활시켜서 매년 열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58년 11월 5일에는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전 참전 의사를 발표했다.[257] 파병은 1964년에 가서야 첫 파병군이 지원된다.

취향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대단한 미식가였고, 독서가였고, 재담을 즐기고 낚시, 테니스, 정원 손질, 개를 데리고 산책하기, 서도 등을 즐겼다.[160] 그는 많은 책을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시 짓기도 좋아해서 애국충정에 넘치는 한시를 많이 지었다. 또 한시들 중에는 소, 벼룩, 모기, 빈대, 쥐, 파리, 누에 등을 주제로 하여 읊은 것들도 있다.[160]

문화에 나타난 이승만

화폐 속의 이승만

1959년에 만들어진 백 동전에 이승만이 그려져 있다.

옛날에 사용하던 환화에 그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도[258] 처음 발행된 1953년에는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1957년에 발행된 새 환화의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에 있던 한복양복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들어서 돈에서 이승만의 초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259][260]

작품 속의 이승만

  •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1959년, 신상옥 감독)
  • 《TBC백서:이승만 특집방송》 (1967년) - TBC 방송
  • 《건국비화:특집방송》- 1968년, TBC 방송
  • 잘돼갑니다. - 동아방송

이승만을 연기한 배우들

텔레비전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

영화

연극

같이 보기

각주

내용주

  1. 이 사진은 우남관에 전시되어 있다.
  2.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을 주창한 반면, 박용만은 무장독립론을 주창했었다.
  3. 오스트리아의 착오로, 오스트리아를 하와이에서 가까운 오스트레일리아로 착각한 것에서 호주댁이라는 별명이 유래되었다.
  4. 당시 이 '항일단파방송' 활동은 매우 의의가 컸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는 모든분야에 발악했었고, 전시상황이 패망에 치닫았을 무렵에도 국내에서는 매일신보,경성일보 등 어용 신문 등을 이용해 '전시상황에서 나날이 승전하고 있다.'는 주 내용들을 기사로 대서특필했던 시기였다. 때문에 국내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측했던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던 시기였다.
  5. 실제로, 이승만은 하와이에 있는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대립하였고, 하와이 교민사회에서 교회를 이용해 분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참조주

  1. ‘이승만 고종 밀사설’ 깨졌다 한겨레신문 2011년 8월 21일.
  2.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179p., (주)금성출판사, 2007년 3월 1일 발행
  3. 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4페이지
  4. Lee Wha Rang (2000년 2월 22일). “Who Was Rhee Syngman?”. 2007년 12월 1일에 확인함. 
  5. 이승만,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63페이지
  6.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56페이지
  7. 사단법인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8. 조선왕실에 비판적이었음에도 그는 왕정복고 의혹 때문에 가계를 밝히기를 꺼렸다.
  9. 이승만,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64페이지
  10. 이승만,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66페이지
  11. 이승만,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65페이지
  12.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13.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0페이지
  14.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1페이지
  15. 한국사傳 제54회 :: <이승만-2부작>1부 이승만
  16. <풀어쓴 독립정신> 청미디어
  17. 강원용 목사, 자서전서 역대 대통령 평가
  18.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30페이지
  19.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31페이지
  20. /2006101077061.html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9)"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 주간조선, 2008년 9월 26일 읽어봄
  21. 이호,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I, 하리출판, 2012, 96
  22. 경향닷컴 | Kyunghyang.com
  23. (영어)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
  2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4867.html
  25. 네이트 한국학
  26. 김인수, 《시대정신과 대통령 리더십》 (신원문화사, 2003) 25페이지
  27. 한국사傳 <이승만-2부작>1부 KBS
  28.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이이화 저. 김영사. p33
  29. Big Island Journey, Sophia V. Schwet
  30. 한국사傳 <이승만-2부작>1부
  31. 최원형. “1915년 국민회 분열, 이승만 ‘자산 사유화’가 씨앗”. 한겨레. 기사입력 2011년 8월 16일. 최종수정 2011년 8월 17일.
  32. 정한경은 한 달 만에 쫓겨났다 - 오마이뉴스 2010.11.08
  33. 최시중(편저), 《인촌 김성수 :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사, 1985), 123쪽
  34. 윤치호일기 1919년 2월 24일자
  35.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5~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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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87b 다음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김규식']
  38.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7 : 임시정부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179페이지
  39.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40. '국부 이승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오마이뉴스 2008.10.07
  41. <히스토리아>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42. 《이승만 동문 서한집 해제》, 유영익 저. p27~p28
  43.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구미위원부' 항목 참고
  44. 유영익, 이승만 동문 서한집(상)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9) 31페이지
  45. KBS 한국사傳 -이승만 2부- 참조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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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board.php?bo_table=DB_data1&page=1&mode=&sca=1930~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48. 임시정부기념사업협회
  49. 박성현 <일본을 벗기다 해설> <<일본을 벗기다>>, 두두리, 2010
  50. /content_view.html?contid=1995020770102 소, 애초 이승만배척/45년8월 "반소인물" 낙인 조선일보 1995.02.07일자
  51. 이승만 박사 육성
  52. KBS 한국사傳 이승만 1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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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허은, 〈8·15직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 2000) 307~308쪽.
  56. 브루스 커밍스 (1986년).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247쪽쪽. 
  57. 윤석오의 증언.
  58. “秘錄 韓國外交<4> : 건국前夜③”. 경향신문. 1975년 1월 20일. 5면. 
  59. 매일신보, 1945년 10월22일자 신문.
  60.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43페이지
  61.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44페이지
  62.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14페이지
  63.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13페이지
  64.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6페이지
  65.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104344 대통령 스토리 이승만②)
  66. <매일신보> 1945년 11월 2일자 신문.
  67. /2010020801741.html [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 해방공간 지도자들, 이념 떠나 '복간 축하' 메시지 조선일보 2010.02.08일자
  68.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42페이지
  6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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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72. /board.php?bo_table=DB_data1&page=1&mode=&sca=1940~ 대한민국사랑회
  73.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2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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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인촌 김성수/김학준 정치학박사·현 동아일보회장(해방공간의 주역:9) - 동아일보
  7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77. 역사비평 제32호 (1996년 봄) (역사비평사, 1996) 266쪽
  78.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선인, 2003) 321페이지
  79. 몸으로 쓴 통일독립운동사:우사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3 (한울, 2000) 57페이지
  80. 역사비평 제32호 (1996년 봄) (역사비평사, 1996) 267쪽
  81.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8페이지
  82.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9페이지
  83. 주간조선
  84. 나영균,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황소자리, 2004) 224페이지
  85.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47
  86.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7
  87.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219페이지
  88.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29페이지
  89.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74페이지
  90.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
  91. 1946년 5월 20일, <청년해방일보> 신문에 수록.
  92. 연세대학교 석좌교수인 유영익은 '이승만의 이러한 반공노선 단독정부 수립 발언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하였다.
  93. 한태수, 《한국정당사》 (서울, 1961) 78~79쪽
  94. 김정원, 《분단한국사》 (동녘, 1985) 86쪽
  95.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492쪽
  96.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편, 《한국근현대사연구 1996년 제5집》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6) 212쪽
  97. ▒ 경인일보 창간 50주년 '도약! 2010' ▒
  98.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
  99.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사, 2006) 171페이지
  100. 한배호 (2000년 5월 10일). 《「한국현대정치론」본문 中 3. 우익의 재분열》. 오름. 113쪽. ISBN 89-7778-109-4. 
  101.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pp 360
  102.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pp 360~361
  103. 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51페이지
  104. 정해구,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역사비평〉제32호 (1996년봄) 275쪽.
  105. 정해구,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역사비평〉제32호 (1996년봄) 276쪽.
  1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5쪽.
  10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7쪽.
  10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쪽.
  109.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 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161
  110.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비평사, 2006) 172페이지
  111. 국민보 1948-03-17자
  112.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35페이지
  11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48페이지
  11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28쪽. 친일 경찰 문제로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사직한 최능진도 동대문구 갑에 출마해 이승만과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이승만의 방해공작으로 등록 무효선고를 받아 결국 이승만이 단독으로 입후보하게 되었다.
  115. ‘대한민국號’ 첫 선장 이승만과 미국의 동상이몽
  116. 이후 그는 대통령 직에서 퇴임하고 이후에도 서신에 단기를 사용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3월까지 공식 문서에 단기를 사용한다.
  117. “秘錄 韓國外交<28> : 政府樹立 직후 ⑩”. 경향신문. 1975년 3월 17일. 
  118. “秘錄 韓國外交<26> : 政府樹立 직후 ⑧ 美中國에 特使館”. 경향신문. 1975년 3월 12일. 
  119. “秘錄 韓國外交<28> : 政府樹立 직후 ⑩”. 경향신문. 1975년 3월 17일. 
  120. 大統領今日渡日〉 경향신문(1948년 10월 19일) 1쪽.
  121. “秘錄 韓國外交<26> : 政府樹立 직후 ⑧ 美中國에 特使館”. 경향신문. 1975년 3월 12일. 
  122. [대한민국 제1호] 張勉 초대 주미대사 붓글씨로 신임장 작성-조선일보
  123. 유영익 외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64페이지
  124.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269p.,(주)금성출판사, 2007년 3월 1일
  125. 다시찾는 우리역사, 한영우 저, 경세원, 579p.
  126. 해방전후사의 인식, 백기완 저, 한길사, 2004년 5월 20일
  127. (http://media.daum.net/society/view.html?cateid=1067&newsid=20100823114419523&p=sisain 시사INLive 2010.08.23 '친일'은 지금도 계속된다.)
  128.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manhistory/vod/1334585_968.html “미완의 역사, 친일처벌” - 반민특위 김상덕) 내용中..
  12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1961597 조중동, 친일인명사전이 그렇게도 두려운가)
  130.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131.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87~88쪽쪽. ISBN 89-7199-036-8. 
  132. 강준만에 의하면 이범석은 한민당에 장관직 8석을 약속했다고 한다.
  133. 하신기, 강태훈, 이광주 외, 《박정희:한국을 강국으로 이끈 대통령》 (세경사, 1997) 219페이지
  134.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51570380
  135. 李承晩, 피로써 獨島를 지켜냈다! - 조갑제 칼럼
  136. 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171~172쪽
  137.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436페이지
  138.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신동아
  139. (http://kilsp.jinbo.net/publish/2001/010618.htm 국민방위군 사건)
  140. 지방자치의 전면실시, 즉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자치의회를 완전히 국민이 선출한 때는 김영삼 정부였다.
  141. 안용규, 《태권도 탐구논리》 (대한미디어, 2009) 302페이지
  142. 유영익 외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65페이지
  143. 여성 차별의 벽, 이태영 첫 여성판사 임명, 이승만이 제동
  144. 유영익 외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66페이지
  145. 「진보당 조봉암 사건」,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146. 홍석률, 《1953-1961년 통일논의의 전개와 성격》, (서울대학교, 1997) 30쪽
  147.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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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9페이지
  150. 서중석, 《비극의 현대 지도자: 그들은 민족주의자인가 반민족주의자인가》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2), 169쪽
  151.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6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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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3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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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 이윤영, 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사초, 1984) 238페이지
  158. 홍석률, 《1953-1961년 통일논의의 전개와 성격》, (서울대학교, 1997) 30~31쪽
  159. "남산의 부장들 (38) HR의 복귀", 동아일보 1991년 05월 03일자 19면, 정치면
  160. 이원순, 《인간 이승만: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신태양사, 1988) 381페이지
  161.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327페이지
  162.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328페이지
  163.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18페이지
  164.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19페이지
  165. 대한민국사랑회
  166. [편집자에게] '건국 대통령'을 다시 역사 속으로 조선일보 사설 2010년 04월 26일자
  167.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4.19와 남북관계》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지음, 민연, 2008) 213
  168. 이승만은 1960년~: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60년편 3권) (2004년, 인물과사상사) 47쪽.
  169. 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 조갑제
  170.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동아일보 2008년 8월 22일자
  171. 동아일보 1965년 7월 23일자 사설
  172. 《이승만 : 신화에 가린 인물》, 로버트 올리버
  173.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42페이지
  174.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39페이지
  175. 장면,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 출판사, 1998) 42페이지
  176.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40페이지
  177.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36페이지
  178.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도서출판 답게, 1996) 5페이지
  179. 코나스넷
  180. 한국논단 1991년 9월호 (한국논단, 1991) pp.73
  181.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35페이지
  182.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41페이지
  183.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42페이지
  184. 주간한국 : 팔순 맞은 YS는 좌파의 숙주인가
  185. YS 단독인터뷰-"DJ가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해, 그러나 용서…" 시사온 2009년 10월 24일자 기사
  186. 농지개혁법 제정이 한국전쟁 이전에 개정되어 실시되었는데, 이 법이 개정되지 않고 실시가 안되었으면 한국전쟁때 수 많은 농민들이 인민군 세력으로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승만의 치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87. [인천인물 100人·86] 인천시의회 초대의장 이명호 - 구한국·왜정·미군정·대한민국… '파란만장인천의 산 역사' 드높은 香이여! 경인일보 2007년 08월 08일자
  18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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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 좌파와 대립 일관한 ‘숭미 대통령병’ 이승만 한겨레신문 (한겨레 칼럼 | 2004.02.16 (월))
  191. 친일청산 없인 참된광복 없어” 대전일보 사회 | 2006.02.28 (화)
  192. KBS 한국사傳 -이승만 제2부 참조-
  193. [Why-단독] 임정 대통령에서 탄핵된 이승만에게 조소앙이 '쿠데타' 건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194.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1:엑소더스》 (한길사, 2003) 26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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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 시사INLive 2010.08.23 '친일'은 지금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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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4. 대표적인 사례로 평화선과 보상 요구 문제등을 들을 수 있다.
  205. [경마 이야기] 김구-이승만 이후 정치인 발길 끊겨 조선일보 1999.06.02
  2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67쪽
  20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68쪽
  208. KBS 1TV <<한국사 傳>> -이승만(2부)편-, 김구의 비서를 지냈던 윤경빈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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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323페이지
  241.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이이화 저. 김영사. p33~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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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4.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송건호 저. p333
  245. 한국사傳 제54회 :: <이승만-2부작>1부 이승만, 9월1일 읽어봄.
  246. 1968년 월간조선의 임영신 인터뷰 참조
  247. ‘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 :: 네이버 뉴스
  248. 안두희 공판기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249. 동아일보 1992.04.15, 6면 정치면
  250. “내 국적은 일본” 이승만 美체류시절 자필 국적표기 충격
  251. ‘일본국적’ 이승만, 동시대 미주한인 90% ‘한국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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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4. 송국건,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238페이지
  255. 옥중기 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256. 서재필이나 김규식은 한국인 고학생을 거절했는데, 자기 좋아서 유학을 왔으면 그만한 고생도 감내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며 거절하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유학생들에게 용돈과 학비를 부쳐주던 인물은 안창호와 이승만이 유일했다.
  257. 시사저널
  258. 고종석, "이승만은 고종, 김일성에 이은 넘버 쓰리", 시사IN, 2011년 8월 2일
  259. 고영득, ‘최초·최단명’ 女 화폐 모델, 그는 지금..., 경향신문, 2009년 3월 6일
  260. 류정일, “국부(國父)얼굴을 욕되게 하지 마라”, 헤럴드경제, 2007년 1월 27일
  261. 이승만을 닮은 외모로 이승만 집권기간 중 오해를 받았다 한다. 이승만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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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용원, 한배호 편, 《한국 현대 정치론 II》, (오름, 1996)
  • 최종만, 《한국의 정당 정치와 민주주의》 (웅비출판사, 1991)
  • 올리버,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이승만과 한미 관계》(올리버 저, 박일영 역, 계명사, 1990)
  •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1998)
  • 이현희, 《한민족광복투쟁사》 (정음문화사, 1989)
  • 정규상, 《우남이승만박사한시선집》(정규상 편역, 동성미술출판사, 1982)
  •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년) 40, 42쪽.
  •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나라세우기 X파일》(박일영 옮김, 동서문화사, 2008)
  •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5)
  •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10)》(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 유영익, 《이승만 연구(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2)》(유영익 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 이달순, 《이승만 정치 연구》 (수원대학교출판부, 2000)
  • 이주영,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출판사 김&정 펴냄, 2008)
  • 월간조선, 《이승만, 박정희를 추억한다》(월간조선편집부, 월간조선사, 2004)
  • 이승만, 《풀어쓴독립정신》(이승만, 김충선 외 역, 청미디어, 2008)
  • 이현희,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 (동방도서, 1987)
  •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집문당, 1982)
  • 양우종, 《이대통령투쟁사》(연합신문사, 1949)
  • 이승만, 《일민주의 개설》(일민주의보급회, 1949)
  • 김인서, 《망명노인 이승만박사를 변호함 (亡命老人 李承晩博士를 辯護함)》(독학협회출판사, 1963)
  • 허정, 《위대한 한국인 제11권 이승만 편》(휘문출판사, 1976년)
  •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 리처드 알렌, 《한국과 이승만》 (알렌, 윤대균 역, 합동통신사, 1961)
  • 최태응, 《사실소설 슬픔과 고난은 가는 곳마다-청년 이승만》 (성봉각, 1960)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한국사학회, 한국현대인물론 1,2(을유문화사, 1987)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사》(대한민국공보처, 1949)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65∼1970)
  • 국가보훈처,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인물록》 (국가보훈처, 1992)
  • 이승만,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 리승만박사투쟁사간행회, 《민족의 거성》 (문성당, 1957)
  • 재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 제2과 편, 《조선민족운동연감》 (東文社書店, 1946)
  •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경세원, 2005)

바깥 고리

제1·2·3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임
초대
(정부 수립)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후임
허정
(권한 대행)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 · 윤석열
전임
초대
제1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1919년 4월 11일 - 1919년 4월 23일
후임
이동녕
전임
초대
(전임 통치자:대한제국의 황제 순종)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부 수반
1919년 4월 10일 - 1919년 9월 10일
후임
이승만
전임
이승만
제1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1919년 9월 11일 - 1925년 3월 21일
후임
박은식
(의정원 보궐선출)
전임
아베 노부유키
(사실상)
제1대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1945년 9월 - 1945년 10월
후임
(취임거부로 인한 해임)
전임
김구
제21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1947년 3월 3일 - 1947년 9월 5일
후임
이승만
전임
이승만
제2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1947년 9월 5일 - 1948년 8월 15일
후임
이승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임
초대
제헌 국회의원(동대문구 갑)
1948년 5월 31일 - 1948년 7월 24일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제헌 헌법 제53조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상실
독촉국민회
(동대문구 을)이영준
후임
홍성하(보궐선거)
전임
김구
제1대 대한민국 국회의장
1948년 5월 31일 - 1948년 7월 24일
후임
신익희(보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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