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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남:[[갈사왕]](曷思王) [[갈사부여]]의 왕
**** 육남:[[갈사왕]](曷思王) [[갈사부여]]의 왕
*** 후비 :[[유화 (부여)|유화]](柳花 ? ~24)
*** 후비 :[[유화 (부여)|유화]](柳花 ? ~24)
**** 아들 : [[주몽]]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기원전 19) 재위: 기원전 37~기원전 19)
**** 아들 : [[고주몽]]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기원전 19 재위:기원전 37~기원전 19)


== 금와왕이 등장한 작품 ==
== 금와왕이 등장한 작품 ==

2015년 10월 28일 (수) 23:01 판

금와왕
金蛙王
재위 기원전 60년경~기원전 24년
전임 해부루왕
후임 대소왕
부왕 해부루왕
이름
해금와
신상정보
사망일 기원전 24년
왕조 동부여
부친 해부루왕
자녀 대소왕

금와왕(金蛙王, ? ~기원전 24년 재위:기원전 60년경~기원전 24년경)은 부여의 왕으로 성은 해(解), 이름은 금와(金蛙)이다.

생애

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 때의 재상(宰相) 아란불(阿蘭弗)이 꿈에 천제(天帝)를 만났는데, 천제가 말하기를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 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터이니 너희들은 이 곳을 피하여 동해 부근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왕도(王都)를 옮기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아란불은 곧 왕에게 권하여 그 곳으로 천도(遷都)를 하고 국호(國號)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단군조선이 기원전 238년경에 멸망으로 해체되면서 여러 부여족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는데 부여족이 세운 나라로 해모수(解慕漱)가 세운「북부여(北夫餘)」와 해부루와 금와(金蛙)가 세운 「동부여(東夫餘)」그리고 추모왕(주몽)가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부여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 말하며 아들로 삼으니, 이가 곧 금와이다. 금와는 해부루의 아들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금와(金蛙)는 금빛이 나는 개구리라는 의미이다. [1]

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된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이가 바로 유화부인이다. 유화는 부모에게 버려져 그곳에 있었는데, 금와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궁으로 맞아들였다. 유화가 햇빛을 받아 수태한 뒤에 알을 낳자 이상하게 여긴 금와는 알을 버리게 하였는데 짐승들이 알을 품어주고 짓밟지 않고 피해가는 등 기이한 일이 생기자 유화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후 태백산(太白山) 남쪽의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데려다가 방에 가두었더니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잉태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뒤에 고구려의 시조가 된 추모왕(鄒牟王)이 나왔다. 여기서 ‘추모’를 ‘주몽(朱蒙)’이라는 하는 것은 ‘어리석다라는 뜻’으로 중국이 낮춰 부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2][3]

추모가 장성하자 대소(帶素)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처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금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모에게 말을 기르는 임무를 맡겼다. 이후 추모가 대소의 음모를 피해 도피하자 추격대를 파견하였으나 잡지는 못하였다.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인 기원전 24년 유화가 죽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얼마후 금와가 죽고 대소왕이 뒤를 이었다.[1]

금개구리 설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전하기를 어느 날 곤연(鯤淵)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타고 있던 말이 큰 돌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돌을 굴려 보니 그 곳에서 금빛을 두른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나왔다. 해부루 왕은 이를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여기고 그 아이의 이름을 금와라 짓고 고이 길렀다. 이후 금와는 자라서 태자가 되었고, 해부루가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설화에서 나오는 곤연이라는 지명은 동부여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구려가 관리하는 졸본의 땅에 있었으며 금와의 일족들은 곤연의 호족(豪族)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가계

금와왕이 등장한 작품

각주

  1. 김부식 (1145). 〈권13 동명성왕 條〉. 《삼국사기》.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涙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蛙 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왕이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개구리 〈개구리는 또는 달팽이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라 말하며 아들로 삼으니, 이가 곧 금와(금빛이 나는 개구리)이다. ) 
  2. "주몽(朱蒙)은 추모(鄒牟)의 창씨개명" 연합뉴스(2007.03.12) 기사 참조
  3. 고구려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서길수 박사는 발표문에서 주몽(朱蒙)은 추모(鄒牟)의 중국식 표기일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글자를 빌려 써 추모를 비하했다고 지적했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와 5세기 중엽의 고구려 모두루무덤에는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로 표기했지만 6세기 중엽 이후 편찬된 위서(魏書)ㆍ주서(周書)ㆍ북사(北史)ㆍ수서(隋書) 등에서는 주몽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것, 서 박사는 "'주(朱)'자는 '난쟁이(侏)'라는 뜻이 있고 '몽(蒙)'자는 '속이다'ㆍ'어리석다'는 뜻으로 고구려의 시조를 '어리석은 난쟁이'로 폄하한 작명(作名)"이라며 "일본의 창씨개명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참고 자료

  • 김부식, 《삼국사기》
  • 일연, 《삼국유사》
전임
해부루
제?대 부여
?
후임
대소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