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백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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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백제의 역대 국왕|백제의 30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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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武王, [[580년]] ~ [[641년]] [[음력 3월]], 재위: [[600년]] ~ [[641년]] [[음력 3월]])은 [[백제]]의 제30대 [[군주|국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장(璋), 아명은 [[서동]](薯童)이다. 다른 이름은 [[무강]](武康), [[헌병 (무왕)|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백제 법왕|법왕]](法王)의 아들이다.
'''무왕'''(武王, 생년미상 ~ [[641년]] [[음력 3월]], 재위: [[600년]] ~ [[641년]] [[음력 3월]]) 은 [[백제]]의 제30대 [[군주|국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장(璋), 아명은 [[서동]](薯童) 혹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백제 법왕|법왕]](法王)의 아들이다<ref><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ref>.


== 생애 ==
== 생애 ==
=== 생애 초반 ===
=== 출생 ===
《[[삼국사기]]》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고 《[[삼국유사]]》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고 있다<ref>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어릴 적 이름은 [[서동]]으로 뒤에 장(璋)으로 개명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백제 법왕|법왕]]의 아들이라고 나오지만,[[삼국유사]] 무왕열전에서는 [[저수지|못]]가에 사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나온다. [[백제 무왕|무왕]]의 어머니는 [[저수지|못]]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저수지|못]]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백제]]의 왕위에 올라 [[백제 무왕|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시|익산]]에는 [[백제 무왕|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삼국사기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전하였으나,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small>三國史記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small>
</ref>. 《삼국유사》 무왕을 [[저수지|못]]가에 사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나온다. 무왕의 어머니는 [[저수지|못]]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저수지|못]]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시|익산]]에는 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 치세 ===
=== 치세 ===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재위기간 중 [[신라]] 아막산성(阿莫山城), 가잠성(椵岑城), 모산성(母山城), 늑노현(勒弩縣),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西谷城)·독산성(獨山城) 등을 공격하였다.


==== 신라와의 전쟁 ====
한편 [[백제 무왕|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공 [[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629년]] [[미륵사 (백제)|미륵사]]를 완공하였다.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602년]]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611년]] 10월 가잠성(椵岑城),을 [[616년]]에는 모산성(母山城)을 점령하고 [[623년]] 가을에는 늑노현(勒弩縣) 침범하였다. [[633년]] 음력 8월 서곡성(西谷城)을, [[636년]] 5월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독산성(獨山城) 습격하였다.


한편 [[백제 무왕|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공 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602년]](백제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cw}}[[책력]]{{.cw}}[[지리]]{{.cw}}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백제의 불교]]를 전파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꺾쇠표 =예|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二|卷第廿二 推古天皇]] |인용문=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 }}</ref><ref >{{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고대문화의 발전#관륵|관륵]]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觀勒 백제의 고승. ...문무왕 3년(602) 불교 외에 역본(曆本)·천문(天文)·지리(地理) 및 둔갑방술(遁甲方術)의 책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ref>


[[602년]](백제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cw}}[[책력]]{{.cw}}[[지리]]{{.cw}}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백제의 불교]]를 전파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꺾쇠표 =예|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二|卷第廿二 推古天皇]] |인용문=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 }}</ref><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고대문화의 발전#관륵|관륵]]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觀勒 백제의 고승. ...문무왕 3년(602) 불교 외에 역본(曆本)·천문(天文)·지리(地理) 및 둔갑방술(遁甲方術)의 책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ref>
=== 왕권 강화 정책 ===

[[630년]]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 전북 [[익산]]에 [[미륵사 (백제)|미륵사]]와 궁궐([[왕궁리]])을 조성하는 토목공사를 벌였고, [[신라]]와의 전쟁이 잦아 국력을 소모하는 등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탁월한 정치역량을 바탕으로 한 외교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였고 군사력을 크게 신장시킨 치적을 남긴 무왕(武王)은 [[무령왕]], [[성왕]]과 함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전성기 이후로 무너져가는 [[백제]]를 되살린 왕으로 평가받는다.
==== 기타 정책 ====
[[630년]]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ref>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에 의하면 『국사(國史)』에서는 미륵사(彌勒寺)를 왕흥사(王興寺)라고 기록하였다 한다.</ref>하고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 전북 [[익산]]에 [[미륵사 (백제)|미륵사]]와 궁궐([[왕궁리]])을 조성하는 토목공사를 벌였고, [[신라]]와의 전쟁이 잦아 국력을 소모하는 등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 최후 ===
=== 최후 ===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사망하였다. 무왕이 죽자 [[당 태종]]은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으며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哀悼式)을 거행하였고 [[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고 한다.<ref>[http://mtcha.com.ne.kr/king/bagjai/king30.htm [[무왕]](武王)<!-- 봇이 붙인 제목 -->]</ref>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사망하였다. 무왕이 죽자 [[당 태종]]은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으며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哀悼式)을 거행하였고 [[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고 한다.<ref>동사강목(東史綱目) 제 3하, 신축년 신라 선덕여주 10년, 고구려 영류왕 24년, 백제 무왕 42년, 의자왕 원년</ref>


== 서동 설화 ==
== 서동 설화 ==
{{참고|서동요|설명=[[백제 무왕|무왕]]의 서동요 [[전설]]이나 [[설화]]에 대해서는}}
{{참고|서동요|설명=[[백제 무왕|무왕]]의 서동요 [[전설]]이나 [[설화]]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편에 수록 된 설화에 의하면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들어가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동요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blockquote>선화 공주님은<br>
[[백제 무왕|무왕]]은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에 궁 밖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며 마를 캐는 [[서동]]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신라]]의 [[신라 진평왕|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경주시]])로 갔다. 그러고는 [[서라벌]]의 아이들에게 [[마 (식물)|마]]를 주는 선심을 쓰고, [[선화공주]]가 ‘맛둥서방’과 몰래 사귄다는 ‘[[서동요]]’라는 노래를 전해주어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로 [[선화공주]]는 [[신라]] 왕실에서 쫓겨났고, [[선화공주]]와 [[서동]]이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남 몰래 짝을 맞추어두고,<br>
서동 서방을<br>
밤에 몰래 안고 간다.</blockquote>이 동요가 널리 퍼져 궁궐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노래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은 모든 관료들의 주장에 따라 공주는 먼 지방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길을 떠나려고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쓰라고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타나 절을 하고는 자신이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지만 뜻밖에도 믿음직하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따라오도록 하였고 또 몰래 정도 통하였다. 공주는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동요의 내용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다. 그때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자 왕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곳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그래서 왕이 이를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연못을 메우는 일에 대해 묻자,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만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미륵삼존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고 전각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만들고는 미륵사(彌勒寺)<small>[『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하였다.]</small>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수많은 장인들을 보내어 절을 짓는 일을 돕게 하였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최근에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백제 무왕대의 금제 사리 봉안기록을 판독한 결과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무왕과 [[선화 공주]]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식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으나, 당대 백제의 왕은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할 때 설화적 요소가 더해졌을 지라도 그것이 현대까지 이어진 맥락과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섣부른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ref>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4137.html</ref>
최근에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백제 무왕대의 금제 사리 봉안기록을 판독한 결과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무왕과 [[선화 공주|선화공주]]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식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으나, 당대 백제의 왕은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할 때 설화적 요소가 더해졌을 지라도 그것이 현대까지 이어진 맥락과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섣부른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ref>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4137.html</ref>

== 무왕의 신분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백제 무왕|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다. [[백제 무왕|무왕]]을 [[백제 위덕왕|위덕왕]]의 서자 또는 서손자라는 주장은 중국의 《[[북사]]》에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는 단편적 기록에 근거한다. 그런데, [[법왕]]에 대해서도 《[[수서]]》에서 '[[위덕왕]]의 아들이다'고 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기록은 [[법왕]]과 그의 아버지인 [[혜왕 (백제)|혜왕]]의 재위기간이 둘을 합쳐서 고작 1년6개월에 불과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법왕의 아들 [[진이왕]]이 [[백제 무왕|무왕]]의 아버지라는 식의 [[일본]] 기록은 상식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므로 배제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밖에 《[[삼국유사]]》에서는 무왕의 어머니가 서울([[백제]] [[사비성]]) 남쪽에 있는 [[저수지|못]]가(京師南地邊)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못에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사서의 기록과 설화를 기초로 할 때, 무왕의 신분은 [[법왕]]의 [[서자]]일 가능성이 높다.


== 가계 ==
== 가계 ==
* 부왕 : [[백제 법왕|법왕]]
* 부왕 : [[백제 법왕|법왕]](法王)
* 모후 : 왕후해씨(王后解氏)
* 모후 : 미상
** 왕비 : [[선화왕후]](善花王后) - [[신라 진평왕]]의
* 생모 : [[금강]] 남쪽 [[저수지]] 가에 살던 성명 미상의 과부
** 왕비 : [[사택왕후]](沙宅王后) -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2016183 '익산 미륵사 선화공주가 창건 안했다'] 세계일보, </ref>
** 왕후 : [[선화왕후]](善花王后) - [[신라 진평왕]]의 3녀.
*** 처조카 : [[김춘추]]
*** 처조카며느리 : [[문명왕후 김씨]],[[영창부인 김씨]]
*** 장남 : [[의자왕]](義慈王)
*** 장남 : [[의자왕]](義慈王)
*** 차남 : [[교기|부여교기]](扶餘翹岐)
** 왕후 : [[사택왕후]](沙宅王后) -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2016183 '익산 미륵사 선화공주가 창건 안했다'] 세계일보, </ref>
*** 차남 : [[교기|부여교기]](扶餘翹岐)<ref>
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plan/article.shtml?id=20030527.00000014.000010 yeongnam<!-- 봇이 붙인 제목 -->]</ref>
** 동생 : [[부여 서씨]](扶餘氏)
*** 조카 : [[귀실복신]](鬼室福信)
*** 조카 : [[귀실복신]](鬼室福信)


== 무왕이 등장한 작품 ==
== 무왕이 등장한 작품 ==
* 《[[삼국기]]》([[KBS]], [[1992년]]~[[1993년]], 배우:[[최정훈]])
* 《[[삼국기]]》([[KBS]], [[1992년]]~[[1993년]], 배우: [[최정훈]])
* 《[[서동요 (드라마)|서동요]]》([[SBS]], [[2005년]]~[[2006년]], 배우:[[조현재]], [[김석 (1992년)|김석]])
* 《[[서동요 (드라마)|서동요]]》([[SBS]], [[2005년]]~[[2006년]], 배우: [[조현재]], [[김석 (1992년)|김석]])
* 《[[계백 (드라마)|계백]]》([[MBC]], [[2011년]]~[[2011년]], 배우:[[최종환]])
* 《[[계백 (드라마)|계백]]》([[MBC]], [[2011년]]~[[2011년]], 배우: [[최종환]])
* 《[[대왕의 꿈]]》([[KBS]], [[2012년]]~[[2013년]], 배우:[[박철호]])
* 《[[대왕의 꿈]]》([[KBS]], [[2012년]]~[[2013년]], 배우: [[박철호]])


== 참고 ==
==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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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평왕]] ([[579년]] - [[632년]])
** [[진평왕]] ([[579년]] - [[632년]])
** [[선덕여왕]] ([[632년]] - [[647년]])
** [[선덕여왕]] ([[632년]] - [[647년]])
* [[왜]]
**[[스이코 천황]] ([[593년]]~[[628년]])
**[[조메이 천황]] ([[629년]]~[[641년]])
*[[수]]
**[[양견|수 고조 문제]] ([[581년]]~[[604년]])
**[[양광|수 세조 양제]] ([[604년]]~[[617년]])
**[[양유|수 공제]] ([[617년]]~[[618년]])
* [[당나라|당]]
**[[이연|당 고조]] ([[618년]]~[[626년]])
**[[이세민|당 태종]] ([[626년]]~[[649년]])


== 함께 보기 ==
== 함께 보기 ==
* [[미륵사 (백제)|미륵사]]
* [[선화공주]]
* [[익산 미륵사지 석탑|미륵사지 석탑]]
* [[사택왕후]]
* [[서동요]]


== 주석 ==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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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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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6세기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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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백제의 왕]]
[[분류:백제의 왕]]

2015년 10월 28일 (수) 21:10 판

백제 무왕
百濟 武王
백제의 30대 국왕
재위 600년 ~ 641년
전임 법왕
후임 의자왕
부왕 법왕
이름
부여 장(扶餘 璋)
신상정보
부친 법왕
모친 미상
배우자 선화공주(善花公主), 사택왕후(沙宅王后)

무왕(武王, 생년미상 ~ 641년 음력 3월, 재위: 600년 ~ 641년 음력 3월) 은 백제의 제30대 국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는 장(璋), 아명은 서동(薯童) 혹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법왕(法王)의 아들이다[1].

생애

출생

삼국사기》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고 《삼국유사》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고 있다[2]. 《삼국유사》는 무왕을 가에 사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나온다. 무왕의 어머니는 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에서 검은 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에는 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치세

신라와의 전쟁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602년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을, 611년 10월 가잠성(椵岑城),을 616년에는 모산성(母山城)을 점령하고 623년 가을에는 늑노현(勒弩縣)을 침범하였다. 633년 음력 8월 서곡성(西谷城)을, 636년 5월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독산성(獨山城) 을 습격하였다.

한편 무왕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공 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602년(백제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 책력 · 지리 · 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백제의 불교를 전파하였다[3][4]

기타 정책

630년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5]하고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 전북 익산미륵사와 궁궐(왕궁리)을 조성하는 토목공사를 벌였고, 신라와의 전쟁이 잦아 국력을 소모하는 등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최후

무왕641년 음력 3월에 사망하였다. 무왕이 죽자 당 태종은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였으며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哀悼式)을 거행하였고 광록대부추증하였다고 한다.[6]

서동 설화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편에 수록 된 설화에 의하면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들어가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동요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짝을 맞추어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동요가 널리 퍼져 궁궐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노래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은 모든 관료들의 주장에 따라 공주는 먼 지방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길을 떠나려고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쓰라고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타나 절을 하고는 자신이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지만 뜻밖에도 믿음직하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따라오도록 하였고 또 몰래 정도 통하였다. 공주는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동요의 내용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다. 그때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자 왕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곳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그래서 왕이 이를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연못을 메우는 일에 대해 묻자,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만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미륵삼존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고 전각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만들고는 미륵사(彌勒寺)[『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수많은 장인들을 보내어 절을 짓는 일을 돕게 하였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최근에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백제 무왕대의 금제 사리 봉안기록을 판독한 결과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식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으나, 당대 백제의 왕은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할 때 설화적 요소가 더해졌을 지라도 그것이 현대까지 이어진 맥락과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섣부른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7]

가계

무왕이 등장한 작품

참고

함께 보기

주석

  1.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2.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삼국사기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전하였으나,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三國史記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3. 卷第廿二 推古天皇〉. 《일본서기》. 720. 十年... 冬十月、百濟僧觀勒來之。仍貢暦本及天文地理書、幷遁甲方術之書也。是時、選書生三四人、以俾學習於觀勒矣。 
  4. 관륵〉.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觀勒 백제의 고승. ...문무왕 3년(602) 불교 외에 역본(曆本)·천문(天文)·지리(地理) 및 둔갑방술(遁甲方術)의 책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 
  5.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에 의하면 『국사(國史)』에서는 미륵사(彌勒寺)를 왕흥사(王興寺)라고 기록하였다 한다.
  6. 동사강목(東史綱目) 제 3하, 신축년 신라 선덕여주 10년, 고구려 영류왕 24년, 백제 무왕 42년, 의자왕 원년
  7.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4137.html
  8. '익산 미륵사 선화공주가 창건 안했다' 세계일보,

바깥 고리

전 대
법왕
제30대 백제 국왕
600년 - 641년
후 대
의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