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방송협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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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제국]]의 전시하 정책에 따라 선전방송으로 이용되었으며 1942년부터는 한국어 방송이 중단되고 영어식 용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1942년]] 말에는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나 경성방송국 관계자와 관련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에 [[해방]] 이후 [[9월]]부터 '''[[한국방송공사]]'''라고 개칭되었으며, [[9월 15일]]에 [[한국인]] 직원들이 [[방송국]]을 인수하였으나 다음날 [[미군정]]청이 경성중앙방송국을 접수하였다. 이후 조선방송협회에 의해 운영되었다.{{출처|날짜=2009-8-11|날짜=2014-05-13}}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제국]]의 전시하 정책에 따라 선전방송으로 이용되었으며 1942년부터는 한국어 방송이 중단되고 영어식 용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1942년]] 말에는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나 경성방송국 관계자와 관련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에 [[해방]] 이후 [[9월]]부터 '''[[한국방송공사]]'''라고 개칭되었으며, [[9월 15일]]에 [[한국인]] 직원들이 [[방송국]]을 인수하였으나 다음날 [[미군정]]청이 경성중앙방송국을 접수하였다. 이후 조선방송협회에 의해 운영되었다.{{출처|날짜=2014-05-13}}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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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5일 (목) 20:25 판

첫 방송터 기념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은 대한민국 최초의 무선 방송을 시작했던 방속국으로 현재의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이다. 미국에서 1920년 세계 최초의 라디오 정규방송(KDKA (AM)) 이후 7년 만이었으며 당시 일본 제국에서는 도쿄(JOAK), 오사카(JOBK), 나고야(JOCK)에 이어 4번째 방송국이었다. 1926년 11월 30일, 사단 법인 경성방송국의 설립이 허가되어, 12월 9일에 방송용 사설 무선 전화 시설이 허가되었다 (호출부호 JODK, 사용 전파장: 367m (주파수: 817kHz), 공중선 전력 1kW). 1927년 1월20일에 시험 방송을 시작했지만, 다른 방송국과의 혼신을 피하기 위해서, 전파장을 345m (주파수: 870kHz)로 변경하고, 2월16일에 본방송을 시작했다. 장비는 영국산 마르코니 6Q형 방송송신기와 15kW급 변압기 4개, 14kW급 충전용 전동발전기 3대, 6kW급 송신기용 전동 교류발전기 2대 등이었다. 경성방송국의 첫 전파 발사는 오후 1시였다.

사옥의 위치는 서울시 중구 정동 1번지였다. 초기에는 방송국 건물에서 직접 전파를 송출한 형태였다.

방송내용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7시간 방송을 하였는데 방송 내용은 일본어 70%와 한국어 30%정도의 비율로 교차되어 방송하였다. 나중에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별도의 채널로 분리되었었다.

발전

경성방송국은 1932년 4월 7일 법인명을 조선방송협회로 개칭한다. 1935년에는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되었다. 1933년 4월 26일에는 일본어로 방송하는 900kHz의 경성제1방송과 한국어로 방송하는 610Khz의 경성제2방송을 하기 시작하였고 방송기술과 장비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뉴스, 드라마등의 방송내용도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하며 또한 시장에 스피커 내장식의 휴대용 라디오가 많이 보급되어 라디오 전성기를 이루었다. 1937년에는 10만대의 라디오가 한국에 보급되었다. 전국 방송을 위해 연희동에 10kW급 연희 송신소를 만들었고 이후 50kW로 출력을 증강하였다.

지방방송

1935년 경성방송국은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였고 이해에 부산에서 부산방송국(JBAK)이 개국하였으며 1936년에는 평양(JBBK)에, 1937년에는 청진(JBCK)에, 1938년에는 이리(JBFK)와 함흥(JBDK)에 지방방송국을 잇달아 설치하였다. 이후 대구(JBGK), 광주(JBHK), 대전(JBIK), 원산(JBJK), 해주(JBKK), 신의주(JBLK), 춘천(JBMK), 마산(JBOK), 목포(JBNK), 성진(JBPK), 청주(JBQK), 강릉(JBRK) 등 10여개 도시에 지방방송국이 개국하였다. 그러나 1945년 종전 직전 8월 13일에 청진방송국은 소련의 진주에 때문에 방송장악을 우려한 일본제국 육군에 의해 폭파되어 없어졌다.

수신료

라디오를 수신하기 위해서는 라디오 수신기를 구입하는 이외에 2원씩을 징수하였으며 허가장을 문앞에 부착하여야 했다. 지금의 한국방송공사가 가정당 징수하는 수신료가 일제의 잔재라는 비판이 있으나, 일제 강점기때의 수신료 체계는 경성방송국이 본보기로 삼았던 일본 방송 협회가 영국 BBC의 운영체계를 본보기로 삼아 생긴 것이기 때문에 무리라는 의견이 있다.[출처 필요]

라디오 등록 대수

  • 1927년 12월 31일: 총 5,260대(한국인 949대, 일본인 4,161대)
  • 1930년 12월 31일: 총 10,226대
  • 1931년 12월 31일: 총 14,733대
  • 1933년 12월 31일: 총 32,058대
  • 1934년 12월 31일: 총 40.671대
  • 1936년 1월 11일: 라디오 등록 총5만대 돌파 축하 방송.
  • 1936년 12월 31일: 총 73,247대
  • 1936년 12월 31일: 총 112,032대
  • 1940년 12월 31일: 총 227,573대
  • 1941년 12월 31일: 총 272,000대
  • 1943년 7월 30일: 총 285,000대
  • 1944년 12월 31일: 총 300,050대

전시 방송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제국의 전시하 정책에 따라 선전방송으로 이용되었으며 1942년부터는 한국어 방송이 중단되고 영어식 용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1942년 말에는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나 경성방송국 관계자와 관련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해방 이후 9월부터 한국방송공사라고 개칭되었으며, 9월 15일한국인 직원들이 방송국을 인수하였으나 다음날 미군정청이 경성중앙방송국을 접수하였다. 이후 조선방송협회에 의해 운영되었다.[출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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