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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9년 문과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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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황군의 조선인 장군}}


[[분류:1871년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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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일 (일) 11:43 판

조동윤
복무 대한제국,일제 강점기
복무기간 1897년 ~ 1923년
최종계급 일본군 중장

조동윤(趙東潤, 1871년 ~ 1923년)은 조선 말기의 관료로 일제 강점기조선귀족이다. 아호는 혜석(惠石)이며 본관은 풍양이다.

생애

조선 후기 권세가 중 하나인 풍양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조영하신정왕후의 조카로, 고종 즉위를 도와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에 판서를 지낸 인물이다.

1884년 조동윤이 십대 중반일 때 갑신정변이 일어나 수구파의 조영하는 개화파들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조동윤은 개화파의 거두인 홍영식의 조카딸과 조혼한 상태였는데, 조영하가 살해당하고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집안의 원수라 하여 어린 부인은 쫓겨났다. 이후 다른 사람과 결혼해 있다가 십여 년 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복권되자 고종의 허락을 받고 첫 부인을 다시 맞아들여 두 명의 정식 부인과 살았다는 일화가 있다.[1]

188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섰다. 그는 문과 시험에 급제했으나 이후 총어영군사마(摠禦營軍司馬) 등 무관 벼슬들을 다수 역임했고, 1897년 육군 참령이 되어 육군법원장,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 등을 지냈다.

한일 병합을 위해 군부를 먼저 장악하려는 일본의 계획에 따라 일본 육군을 여러 차례 시찰하고 훈장을 받는 등 친일파로 활동했으며, 친일 단체 일진회에도 가입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조약 체결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합병 이후에도 영친왕의 강제 결혼을 추진하는 데 윤덕영과 함께 앞장서는 등 친일 행위에 적극 나섰다. 고종이 사망했을 때는 일본인이 제관을 맡아 일본식으로 치른 장례의 부제관에 임명되기도 했다.[2]

사후

그의 작위는 아들 조중구가 습작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한편, 조동윤 사후에 후손들은 사치와 낭비로 경제적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1926년에 의복 값 1,300엔, 쇠고기 값 1,600엔, 약 값 1,100엔 등 생활비로 부채가 14,000엔에 달했다.[3] 조동윤은 서화에 뛰어났다고 하며, 특히 잘 그렸다는 난(蘭) 그림 작품이 남아 있다.[4]

참고자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동윤〉 (PDF). 《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서울. 446~463쪽쪽. 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주석

  1. 독립신문강독회. 《독립신문 다시 읽기》. 서울: 푸른역사. 137~139쪽쪽. ISBN 8987787850. 
  2. 박정호. “`마지막 황실 … ` 사진전 서울대 박물관서 열려”. 중앙일보. 2008년 5월 22일에 확인함. 
  3. 양정우. "매국노 이완용은 `조선의 현금왕'"”. 연합뉴스. 2008년 7월 13일에 확인함. 
  4. “혜석 조동윤 필묵란”. 대한민국 육군박물관. 2008년 6월 7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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