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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터는 본래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를 봉안한 덕안궁이 있던 곳이다. [[경성전기회사]]는 서울의 전기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그 댓가로 50만원을 납부하였다. 그 돈을 바탕으로 경성부의 부민들을 위하여 5,600여 제곱미터의 규모의 다목적 강당을 지어 문화공연장으로 사용하였다.
부민관터는 본래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를 봉안한 덕안궁이 있던 곳이다. [[경성전기회사]]는 서울의 전기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그 댓가로 50만원을 납부하였다. 그 돈을 바탕으로 경성부의 부민들을 위하여 5,600여 제곱미터의 규모의 다목적 강당을 지어 문화공연장으로 사용하였다.


일제말기에 부민관은 일제의 전쟁독려를 위한 정치집회를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었다. [[모윤숙]]과 [[이광수]]는 부민관에서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라는 연설을 하였다.
일제말기에 부민관은 일제의 전쟁독려를 위한 정치집회를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모윤숙]]과 [[이광수]]는 부민관에서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라는 연설을 하였다.


해방 후 미군 사령부가 사용하였고, 한국전쟁 때 서울수복 이후부터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을 하였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별관로 이용하다가 지방자치제 확대 실시와 함께 서울시의회가 사용하게 되었다.
해방 후 미군 사령부가 사용하였고, 한국전쟁 때 서울수복 이후부터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을 하였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별관로 이용하다가 지방자치제 확대 실시와 함께 서울시의회가 사용하게 되었다.

2015년 7월 21일 (화) 13:26 판

서울 구 국회의사당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등록문화재
종목등록문화재 제11호
(2002년 5월 31일 지정)
수량1동 연면적 7,097.3㎡
시대일제강점기
소유서울특별시
위치
주소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5 (태평로1가)
좌표북위 37° 34′ 3.2″ 동경 126° 58′ 35.8″ / 북위 37.567556° 동경 126.976611°  / 37.567556; 126.976611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부민관(府民館) 또는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은 일제 강점기 경성부에 의해 운영된 부립(府立)의 다목적 홀이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 3층, 연면적 5,676m², 높이 45m로, 현 태평로 1가에 있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한 때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시민회관과 세종문화회관 별관을 거쳐 현재는 서울특별시시의회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

부민관터는 본래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를 봉안한 덕안궁이 있던 곳이다. 경성전기회사는 서울의 전기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그 댓가로 50만원을 납부하였다. 그 돈을 바탕으로 경성부의 부민들을 위하여 5,600여 제곱미터의 규모의 다목적 강당을 지어 문화공연장으로 사용하였다.

일제말기에 부민관은 일제의 전쟁독려를 위한 정치집회를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모윤숙이광수는 부민관에서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라는 연설을 하였다.

해방 후 미군 사령부가 사용하였고, 한국전쟁 때 서울수복 이후부터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을 하였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별관로 이용하다가 지방자치제 확대 실시와 함께 서울시의회가 사용하게 되었다.

부민관 사건

일제 강점기 당시의 부민관
왼쪽부터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

1945년 7월 24일에 부민관에서는 박춘금의 '아시아민족의 해방' 강연회와 '남년청년 분격웅변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이 설치한 다이너마이트가 터져 대회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건물 앞에 있다.

같이 보기

참고 자료

  • 부민관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