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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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
[[견훤]](甄萱)의 맏아들이자 적자(嫡子)인 그는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이자 서자(庶子)인 [[금강 (왕자)|금강]](金剛)에게 왕위를 전하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두 동복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의 권유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능환]](能奐)을 비롯한 몇몇 [[후백제]]의 관료들도 동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고려 태조]](高麗 太祖) 18년) [[음력 3월]]에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유폐하고 이복 서제 [[금강 (왕자)|금강]]을 [[암살]]한 후 [[대리청정|대리 집정]]을 하다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후백제]] 제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견훤]](甄萱)의 맏아들이자 적자(嫡子)인 그는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이자 서자(庶子)인 [[금강 (왕자)|금강]](金剛)에게 왕위를 전하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두 동복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의 권유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능환]](能奐)을 비롯한 몇몇 [[후백제]]의 관료들도 동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고려 태조]](高麗 太祖) 18년) [[음력 3월]]에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유폐하고 이복 서제 [[금강 (왕자)|금강]]을 [[암살]]한 후 [[대리청정|대리 집정]]을 하다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후백제]] 제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 감금하였는데, 약 3개월 뒤에 [[견훤]]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고려]](高麗)의 [[개성특급시|송악]](松嶽)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견훤]]은 [[고려]]의 [[고려 태조|태조]](太祖)인 [[고려 태조|왕건]]에게 반역을 꾀한 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였다. [[고려 태조|고려 태조 왕건]]은 [[견훤]]의 요청을 받아들여 [[936년]]에 군대를 이끌고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선산읍(善山邑))으로 갔다.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 감금하였는데, 약 3개월 뒤에 견훤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고려]](高麗)의 [[개성특급시|송악]](松嶽)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견훤은 [[고려]]의 [[고려 태조|태조]](太祖)인 [[고려 태조|왕건]]에게 반역을 꾀한 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였다. [[고려 태조|고려 태조 왕건]]은 견훤의 요청을 받아들여 [[936년]]에 군대를 이끌고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선산읍(善山邑))으로 갔다.


신검의 군사들이 이에 맞서기 위해 나섰으나, [[견훤]]의 사위인 매제 [[박영규 (후백제)|박영규]](朴英規)가 [[견훤]]을 내쫓은 신검에게 불만을 품고 [[고려]]로 귀화하면서 초기부터 전세가 불리해졌다. 게다가 [[고려]]군 앞에 나타난 [[견훤]]을 보자 [[후백제]]의 병사들은 대항의 의지를 잃고 말았다. 결국 싸우기도 전에 애술(哀述)을 비롯한 많은 장수들이 항복하였고, 신검도 황산까지 밀려나자 할 수 없이 항복하였다.
신검의 군사들이 이에 맞서기 위해 나섰으나, 견훤의 사위인 매제 [[박영규 (후백제)|박영규]](朴英規)가 견훤을 내쫓은 신검에게 불만을 품고 [[고려]]로 귀화하면서 초기부터 전세가 불리해졌다. 게다가 [[고려]]군 앞에 나타난 견훤을 보자 [[후백제]]의 병사들은 대항의 의지를 잃고 말았다. 결국 싸우기도 전에 애술(哀述)을 비롯한 많은 장수들이 항복하였고, 신검도 황산까지 밀려나자 할 수 없이 항복하였다.


[[견훤]]은 신검이 아버지인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죄를 벌하여 달라고 [[고려 태조|태조 왕건]]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태조|왕건]]은 반역의 책임이 신검을 부추긴 신검의 아우 [[양검]]과 [[용검]], 그리고 [[능환]] 등에게 있다고 하여 그들에게만 벌을 내렸다. 결국 [[양검]]과 [[용검]], [[능환]] 등은 처형되었으나 신검은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러나, 왕건에게 항복한 이후에 신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신검도 함께 처형을 당했거나 훗날에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견훤은 신검이 아버지인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죄를 벌하여 달라고 [[고려 태조|태조 왕건]]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태조|왕건]]은 반역의 책임이 신검을 부추긴 신검의 아우 [[양검]]과 [[용검]], 그리고 [[능환]] 등에게 있다고 하여 그들에게만 벌을 내렸다. 결국 [[양검]]과 [[용검]], [[능환]] 등은 처형되었으나 신검은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러나, 왕건에게 항복한 이후에 신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신검도 함께 처형을 당했거나 훗날에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 가족 관계 ==
== 가족 관계 ==

2015년 7월 21일 (화) 12:51 판

후백제 신검왕
後百濟 神劍王
후백제의 2대 국왕
재위 935년 11월 15일(음력 10월 17일)~936년 9월 26일(음력 9월 8일)
전임 견훤왕
부왕 견훤
이름
연호 정개
신상정보
사망일 936년 11월 15일(음력 10월 17일)
부친 견훤
모친 왕비 박씨
종교 불교

신검(神劍, ? ~ 936년 9월 26일(음력 9월 8일), 재위: 935년 11월 15일(음력 10월 17일)~936년 9월 26일(음력 9월 8일)은 후백제(後百濟)의 두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생애

견훤(甄萱)의 맏아들이자 적자(嫡子)인 그는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이자 서자(庶子)인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전하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두 동복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의 권유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능환(能奐)을 비롯한 몇몇 후백제의 관료들도 동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고려 태조(高麗 太祖) 18년) 음력 3월에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유폐하고 이복 서제 금강암살한 후 대리 집정을 하다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후백제 제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 감금하였는데, 약 3개월 뒤에 견훤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고려(高麗)의 송악(松嶽)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견훤은 고려태조(太祖)인 왕건에게 반역을 꾀한 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견훤의 요청을 받아들여 936년에 군대를 이끌고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선산읍(善山邑))으로 갔다.

신검의 군사들이 이에 맞서기 위해 나섰으나, 견훤의 사위인 매제 박영규(朴英規)가 견훤을 내쫓은 신검에게 불만을 품고 고려로 귀화하면서 초기부터 전세가 불리해졌다. 게다가 고려군 앞에 나타난 견훤을 보자 후백제의 병사들은 대항의 의지를 잃고 말았다. 결국 싸우기도 전에 애술(哀述)을 비롯한 많은 장수들이 항복하였고, 신검도 황산까지 밀려나자 할 수 없이 항복하였다.

견훤은 신검이 아버지인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죄를 벌하여 달라고 태조 왕건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반역의 책임이 신검을 부추긴 신검의 아우 양검용검, 그리고 능환 등에게 있다고 하여 그들에게만 벌을 내렸다. 결국 양검용검, 능환 등은 처형되었으나 신검은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러나, 왕건에게 항복한 이후에 신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신검도 함께 처형을 당했거나 훗날에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가족 관계

신검이 등장한 작품

TV 드라마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성립(成立)과 호족연합정권(豪族聯合政權)(하현강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7)
  • 후삼국(後三國)의 성립(成立) (박한설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6)
  • 후백제(後百濟) 금강(金剛)에 관하여 (박한설 대구사학 7 8합집 1973
전 대
견훤
제2대 후백제 국왕
935년 - 936년
후 대
-
(왕조 멸망) 고려 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