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신라의 삼국통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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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8일 (수) 06:40 판


이름 자체가 코미디

1) 당시 삼국은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표현대로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었다면, 나당동맹 성립이 오히려 통일의 정당성을 상당히 훼손하는 셈이다. 살고자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인들이 치열한 내분속에 외국에 지원을 요청했나?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자승자박이다. '삼한일통'이니 '삼국통일'이니 하는 것 따위는 나중 신라계 김씨 유학자들이 억지로 끼워맞춘 명칭이다. 정복으로 보는 게 옳다.

2) 민족문화의 역량을 닦고 어쩌고 하는데, 남북국시대의 신라 문화재는 거의 경주 중심에 집중되어있다. 아전인수인 셈이다. 차라리 다른 곳의 문화를 억제하고 신라의 문화를 강요했다고 보는게 옳다. 1)번과 같이 사실을 외면하고 왜곡한 표현이다. 오히려 민족문화의 역량은 신라가 멸망할 즈음에 지방 각지 호족이 세우는 여러 절이나 불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영토상으로는 말할 것도 없다. 대동강-원산만 이남의 통일은 고구려의 영토를 잃고, 이후 전개된 고려,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북방 영토 확장에 있어서도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앞에서 말했듯 냉정하게 말해서 백제만 흡수한 것이지 고구려땅은 다시 안동도호부의 지배에 있었다. 물론 발해가 성장하였지만, 지금 발해는 우리만 우리 민족이라 주장할뿐, 외국에서는 거의 말갈국가로 간주한다. 신라가 고구려땅까지 확장했더라면, 중국에서 신라를 말갈역사로 취급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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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혹시 말씀하시는 바에 대한 출처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케골 2011년 8월 2일 (화) 02:04 (KST)[답변]

제목: 신라의 삼국 통일? 그딴 거 없다.

신라는 삼국 통일의 꿈이 없었다. 신라의 최종 목표는 다만 백제였다. 결국 백제는 신라에 패망했고, 고려는 당에 패망했다.

이로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다고 하여 통일이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반쪽짜리 통일이라 하는 것도 아니다. 신라의 승리는 통일도, 반쪽 통일도 아니었다. 아예 통일 자체가 없었다.

신라에게는 당만이 외세가 아니었다. 백제와 고려도 똑같은 외세였다.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백제를 제거하여야만 했고, 고려와 당도 몰아내야만 했었다. 그러지 않으면 자국이 망할 터, 신라를 망하도록 놔두는 신라인이 어디 있을까? 따라서 신라의 승리가 민족 반역 행위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그것이 삼국의 통일이라는 논리도 성립할 수 없다. 결국 통일 신라(統一新羅)란 없다.

다만, 신라는 백제를 합치면서 자국의 영토를 세 배나 확장했다. 따라서, 대신라(大新羅)가 옳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신의가 있다. 하지만,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신의란 없다. 오직 승자만이 정의롭고, 생존자만이 정의로운 것이다. 신라는 백제와 고려, 당을 몰아냄으로써 결국 살아남았다. 동시에, 자국의 영토를 세 배나 넓혔다.

신라는 무력한 약소국에서 정의로운 생존자가 되어 대신라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결론을 말한다. 신라의 삼국 통일? 그딴 거 없다. --고려태왕, 2014. 01. 25(토) 오후 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