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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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는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州)이다. 주치(州治)는 [[하남위례성|백제 한성]](漢城) 인근인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하남 이성산성|광주 고읍]])이고, [[중원경]]과 28개 군, 49개 현이 소속되어 있으며, 직접 관할하는 현은 2개이다. 영역은 지금의 [[경기도]], [[황해도]], [[충청북도]] 동북부([[남한강]] 유역)이다.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는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州)이다. 주치(州治)는 [[하남위례성|백제 한성]](漢城) 인근인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하남 이성산성|광주 고읍]])으로 추정되고, [[중원경]]과 28개 군, 49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직접 관할한 현은 2개이다. 영역은 지금의 [[경기도]], [[황해도]], [[충청북도]] 동북부([[남한강]] 유역), [[강원도]] 일부([[철원군]], [[평강군]])이다.


== 연혁 ==
== 연혁 ==


=== 한산주 이전 ===
=== 한산주 이전 ===
한산주가 있던 지역은 유사 이래 [[마한]]의 북쪽지역이었다. 그 이북에는 [[대방군]]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부여족]]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자 [[낙랑]]과 [[말갈]]의 침입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마한의 의도로 서울 [[송파구]], [[강동구]]를 중심으로 [[백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한강 일대를 손안에 넣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결국 서기 9년에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의 [[마한]] 연맹체를 웅천([[공주시]]) 남쪽으로 밀어냈다. 지금의 경기도 일대는 백제의 중핵이 되었다.
한산주가 있던 지역은 유사 이래 [[마한]]의 북쪽지역이었다. 그 이북에는 [[대방군]]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부여족]]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자 [[낙랑]]과 [[말갈]]의 침입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마한의 의도<ref>18년([[기원전 1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임진강]])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ref>로 서울 [[송파구]], [[강동구]]를 중심으로 [[백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한강 일대를 손안에 넣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마한]] 연맹체를 [[노령산맥]] 남쪽으로 밀어냈다. 지금의 경기도 일대는 백제의 중핵이 되었다.


[[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에 이어 [[대방군]]을 병합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패수([[예성강]])에서 국경을 접했다. 두 나라는 백제 [[근초고왕]]이 [[371년]]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기면서 항쟁을 벌이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漢城,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직산]]([[천안]]) 이남까지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백제는 수도지역을 회복했지만 이내 신라가 이를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에 이어 [[대방군]]을 병합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패수([[예성강]])에서 국경을 접했다. 두 나라는 백제 [[근초고왕]]이 [[371년]]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기면서 항쟁을 벌이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漢城,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직산]]([[천안시]]) 이남까지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백제는 [[551년]] 한성 지역을 잠시 회복했지만 이내 신라가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 한산주 ===
=== 한산주 ===
한산주의 치소 일대는 원래 [[백제]]의 수도 [[한성]]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다시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겼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557년]]에는 한산주(漢山州, 북한산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개칭하였고, 남천주(南川州) 치소가 옮겨지기도 하였으나 [[604년]]([[진평왕]] 26년)에 한산주로 다시 옮겼다.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고려]] 때는 광주(廣州)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산주의 치소 일대는 원래 [[백제]]의 수도 [[한성]]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553년]] 신라 [[진흥왕]]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취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557년]] 신주를 한산주(漢山州)로 개칭하였는데, 이후에는 전세(戰勢) 따라 [[한강]] 유역에 한산주, 북한산주(北漢山州, [[서울시]]의 한강 이북), 남천주(南川州, [[이천시]]) 설치되었다가 폐지되고 합쳐졌다가 분리되기를 반복하며 치소(治所)가 옮겨다니다가, [[604년]]([[진평왕]] 26년)에 한산주로 다시 옮겼다.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고려]] 때는 광주(廣州)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산주는 [[신라의 삼국통일|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수행하면서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나당 전쟁 직후에는 황해도 지역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이후 북쪽으로 계속 확대하면서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해 나갔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12년3)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에 패강에 300리 길이의 장성(長城)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한산주는 [[신라의 삼국통일|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시기에도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나당 전쟁 직후에는 황해도 지역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이후 북쪽으로 계속 확대하면서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해 나갔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12년3)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에 패강에 300리 길이의 장성(長城)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경덕왕이 고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경덕왕이 고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 패강진 ===
=== 패강진 ===
신라는 황해도지역을 영토화하면서 이를 방어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북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고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ref>대개는 황해도 평산군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ref>일대에 [[패강진]]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라는 살수(薩水)유역까지 가시권에 넣게 되었고 발해와는 평북일대를 중립지대로 두고 접했다.<ref>조이옥(2001)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ref> 나중에 신라가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무주지(無主地)가 되어 황폐화 되었다가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영토가 되어 서경(西京)으로 승격되었다.
신라는 황해도지역을 영토화하면서 이를 방어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북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고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ref>대개는 황해도 평산군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ref> 일대에 [[패강진]]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라는 살수(薩水)유역까지 가시권에 넣게 되었고 발해와는 평북일대를 중립지대로 두고 접했다.<ref>조이옥(2001)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ref> 나중에 신라가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무주지(無主地)가 되어 황폐화 되었다가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영토가 되어 서경(西京)으로 승격되었다.


=== 한산주 이후 ===
=== 한산주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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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군 (경기도)|한주(漢州)]]
| [[광주군 (경기도)|한주(漢州)]]
| 백제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br /> 고구려 한산군(漢山郡)<br /> 신라 신주(新州) → 한산주(漢山州)
| 백제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br /> 고구려 한산군(漢山郡)<br /> 신라 신주(新州) → 한산주(漢山州)
| [[경기도]]<br />[[하남시]]
| 서울시 [[송파구]]·[[강동구]]<br />경기도 [[하남시]]
| 황무현(黃武縣)<br /> [[거서현]](巨黍縣)
| 황무현(黃武縣)<br /> [[거서현]](巨黍縣)
| 남천현(南川縣)<br /> 구성현(駒城縣)
| 남천현(南川縣)<br /> 구성현(駒城縣)

2015년 6월 18일 (목) 12:48 판

남북국 시대 신라9주 5소경
서울의 역사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는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州)이다. 주치(州治)는 백제 한성(漢城) 인근인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광주 고읍)으로 추정되고, 중원경과 28개 군, 49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직접 관할한 현은 2개이다. 영역은 지금의 경기도, 황해도, 충청북도 동북부(남한강 유역), 강원도 일부(철원군, 평강군)이다.

연혁

한산주 이전

한산주가 있던 지역은 유사 이래 마한의 북쪽지역이었다. 그 이북에는 대방군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부여족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자 낙랑말갈의 침입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마한의 의도[1]로 서울 송파구, 강동구를 중심으로 백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한강 일대를 손안에 넣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마한 연맹체를 노령산맥 남쪽으로 밀어냈다. 지금의 경기도 일대는 백제의 중핵이 되었다.

314년 고구려 미천왕낙랑군에 이어 대방군을 병합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패수(예성강)에서 국경을 접했다. 두 나라는 백제 근초고왕371년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기면서 항쟁을 벌이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漢城,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직산(천안시) 이남까지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백제는 551년 한성 지역을 잠시 회복했지만 이내 신라가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한산주

한산주의 치소 일대는 원래 백제의 수도 한성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취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557년 신주를 한산주(漢山州)로 개칭하였는데, 이후에는 전세(戰勢)에 따라 한강 유역에 한산주, 북한산주(北漢山州, 서울시의 한강 이북), 남천주(南川州, 이천시)가 설치되었다가 폐지되고 합쳐졌다가 분리되기를 반복하며 치소(治所)가 옮겨다니다가, 604년(진평왕 26년)에 한산주로 다시 옮겼다.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고려 때는 광주(廣州)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산주는 삼국 통일 전쟁나당 전쟁 시기에도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나당 전쟁 직후에는 황해도 지역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이후 북쪽으로 계속 확대하면서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해 나갔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12년3)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에 패강에 300리 길이의 장성(長城)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경덕왕이 고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패강진

신라는 황해도지역을 영토화하면서 이를 방어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북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고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2] 일대에 패강진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라는 살수(薩水)유역까지 가시권에 넣게 되었고 발해와는 평북일대를 중립지대로 두고 접했다.[3] 나중에 신라가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무주지(無主地)가 되어 황폐화 되었다가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영토가 되어 서경(西京)으로 승격되었다.

한산주 이후

신라말이 되자 군웅의 할거와 토착호족에 의한 지방자치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안성일대인 죽주에서는 기훤(箕萱)의 세력이 웅거하고 있었고 패서일대에서는 박지윤유천궁, 용건등의 호족들이 군집하고 있었다. 특히 박지윤은 그 출신이 신라왕실의 후손임에도 고구려의 장군인 대모달(大模達)을 자칭하고 있을 만큼 이 지역은 반 신라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중에 궁예는 자신의 새나라를 세우면서 이점을 적극 활용해 고려를 칭했다. 궁예는 처음에 패서일대인 개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차지했다가 나중에 철원으로 옮겨 마진,태봉으로 바꾸고 과도한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는 등 패서호족의 반감을 사서 결국 왕건에게 나라를 뺐기고 명성산(鳴聲山)에서 패사했다. 왕건의 고려는 다시 패서지역에서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983년 고려 성종2년에 12목이 설치되면서 옛 한산주에는 양주(楊州)·광주(廣州)·해주(海州)·황주(黃州)의 4주가 설치되었고, 995년(성종 14년)에 10도를 두면서 관내도(關內道)가 설치되었다. 5도 양계로 이행한 후 관내도는 개경일대의 경기를 제외하고 양광도서해도로 분할되었다. 조선시대에 각각 지금의 경기도와 황해도가 되었다.

소속 군현

757년 경덕왕이 지명을 고쳤을 당시 한산주에는 1개 소경, 27개 군, 46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 전하는 한주 조에는 1개 소경 28개 군 49개 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헌덕왕 때 설치된 취성군 및 그 소속 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산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을 옛 백제지역임에도 대부분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래 표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는 옛 지명은 모두 고구려의 지명이다.

한산주의 소속 군현
군의 이름 원래 군명 현재 지명 소속 현 원래 현명 현재 지명
한주(漢州) 백제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
고구려 한산군(漢山郡)
신라 신주(新州) → 한산주(漢山州)
서울시 송파구·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황무현(黃武縣)
거서현(巨黍縣)
남천현(南川縣)
구성현(駒城縣)
이천시
용인시
중원경(中原京) 고구려 국원성(國原城)
신라 국원소경(國原小京)
충청북도
충주시
- - -
한양군(漢陽郡) 고구려 남평양(南平壤)
신라 북한산군(北漢山郡)
서울특별시
종로구
황양현(荒壤縣)
우왕현(遇王縣)
골의노현(骨衣奴縣)
개백현(皆伯縣)
남양주시 진접읍
고양시 행주내동
율진군(栗津郡) 율목군(栗木郡) 경기도
과천시
곡양현(穀壤縣)
공암현(孔巖縣)
소성현(邵城縣)
잉벌노현(仍伐奴縣)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
매소홀현(買召忽縣)
서울특별시 금천구
서울특별시 강서,양천구
인천광역시 남구
내소군(來蘇郡) 매성현(買省縣) 경기도
양주시
중성현(重城縣)
파평현(波平縣)
칠중현(七重縣)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
파주시 적성면
파주시 파평면
장제군(長堤郡) 주부토군(主夫吐郡)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
수성현(戍城縣)
김포현(金浦縣)
동성현(童城縣)
분진현(分津縣)
수이홀(首尒忽)
검포현(黔浦縣)
동자홀현(童子忽縣)
평유압현(平唯押縣)
김포시 대곶면
김포시 시내지역
김포시 하성면
김포시 월곶면
해구군(海口郡) 혈구군(穴口郡) 인천광역시
강화군
호음현(沍陰縣)
교동현 (喬桐縣)
수진현(守鎭縣)
동음나현(冬音奈縣)
고목근현(高木根縣)
수지현(首知縣)
강화군 하점면
강화군 교동면
강화군 양도면
장구군(獐口郡) 장항구현(獐項口縣) 경기도
안산시
- - -
수성군(水城郡) 매홀군(買忽郡) 경기도
수원시
- - -
당은군(唐恩郡) 고구려 당성군(唐城郡)
신라 당항성(黨項城)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차성현(車城縣)
진위현(振威縣)
상홀현(上忽縣)
부산현(釜山縣)
평택시 안중읍
평택시 진위면
백성군(白城郡) 나혜홀(奈兮忽) 경기도
안성시
적성현(赤城縣)
사산현(蛇山縣)
사복홀(沙伏忽)
사산현(蛇山縣)
안성시 양성면
천안시 직산읍
개산군(介山郡) 개차산군(皆次山郡)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음죽현(陰竹縣) 노음죽현(奴音竹縣) 이천시 장호원읍
소천군(泝川郡) 술천군(述川郡)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황효현(黃驍縣)
빈양현(濱陽縣)
골내근현(骨乃斤縣)
양근현(楊根縣)
여주군 여주읍
양평군 양평읍
교하군(交河郡) 천정구현(泉井口縣)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봉성현(峯城縣)
고봉현(高烽縣)
술이홀현(述尒忽縣)
달을성현(達乙省縣)
파주시 파주읍
고양시 관산동
견성군(堅城郡) 마홀군(馬忽郡)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사천현(沙川縣)
동음현(洞陰縣)
내을매현(內乙買縣)
양골현(梁骨縣)
동두천시 송내동
포천시 영중면
철성군(鐵城郡) 철원군(鐵圓郡) 강원도
철원군
동량현(㠉梁縣)
공성현(功成縣)
승량현(僧梁縣)
공목달현(功木達縣)
연천군 인목면
연천군 연천읍
부평군(富平郡) 부여군(夫如郡)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광평현(廣平縣) 부양현(斧壤縣) 평강군 평강읍
괴양군(槐壤郡) 잉근내군(仍斤內郡) 충청북도
괴산군
- - -
흑양군(黑壤郡) 금물노군(今勿奴郡) 충청북도
진천군
도서현(都西縣)
음성현(陰城縣)
도서현(道西縣)
잉홀현(仍忽縣)
증평군 도안면
음성군 음성읍
송악군(松岳郡) 부소갑(扶蘇岬) 개성직할시
개성시
여비현(如羆縣)
강음현(江陰縣)
약두치현(若豆恥縣)
굴압현(屈押縣)
파주시 진서면
금천군 서북면
개성군(開城郡) 동비홀(冬比忽) 황해북도
개풍군
덕수현(德水縣)
임진현(臨津縣)
덕물현(德勿縣)
진림성(津臨城)
개풍군 봉동면
파주시 군내면
토산군(兎山郡)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 황해북도
토산군
안협현(安峽縣)
삭읍현(朔邑縣)
이천현(伊川縣)
아진압현(阿珍押縣)
소읍두현(所邑豆縣)
이진매현(伊珍買縣)
이천군 안협면
연천군 중면
이천군 이천면
우봉군(牛峯郡) 우잠군(牛岑郡) 황해북도
금천군 현내리
임강현(臨江縣)
장단현(長湍縣)
임단현(臨端縣)
장항현(獐項縣)
장천성현(長淺城縣)
마전천현(麻田淺縣)
연천군 왕징면
파주시 장남면
연천군 미산면
영풍군(永豐郡) 대곡군(大谷郡)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단계현(檀溪縣)
진단현(鎭湍縣)
수곡성현(水谷城縣)
십곡성현(十谷城縣)
신계군 다율면
곡산군 곡산면
서암군(栖嵒郡) 휴암군(鵂嵒郡) 황해북도
봉산군 구읍리
- - -
오관군(五關郡) 오곡군(五谷郡) 황해북도
서흥군 화곡리
장새현 (獐塞縣) 장새현 (獐塞縣) 수안군 수안면
취성군(取城郡) 동홀(冬忽) 황해북도
황주군
토산현(土山縣)
당악현(唐嶽縣)
송현현(松峴縣)
식달(息達)
가화압(加火押)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
중화군 상원면
중화군 당정면
중화군 해압면
폭지군(瀑池郡) 내미홀군(內米忽郡) 황해남도
해주시
- - -
해고군(海皐郡) 동삼홀군(冬彡忽郡) 황해남도
연안군
구택현(雊澤縣) 도랍현(刀臘縣) 연백군 은천면
중반군(重盤郡) 식성군(息城郡) 황해남도
삼천군 고현리
- - -

같이보기

주석

  1. 18년(기원전 1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임진강)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
  2. 대개는 황해도 평산군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3. 조이옥(2001)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