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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6일 (화) 12:52 판

금성대군
錦城大君
대군(大君)
이름
이유
李瑜
별호 시호는 정민(貞愍)
신상정보
출생일 1426년 5월 5일/음력 3월 28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457년 11월 7일/음력 10월 21일 (32세)
사망지 조선 경상도 순흥부
국적 조선
학력 1436년 성균관 수학
자녀 아들 이맹한(李孟漢)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년 5월 5일/음력 3월 28일~1457년 11월 7일/음력 10월 21일)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종소헌왕후 심씨의 여섯째 아들이다.

1436년 6월에는 부왕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의안대군 방석의 봉사손으로 입양되었으며 단종 폐위 이후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하다가 관노의 밀고로 배소에서 사형당한다. 사후 숙종 때 복관되고,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추배되었다. 은 유(瑜), 본관전주(全州),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생애

생애 초반

1426년(세종 8년) 음력 3월 28일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양육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가 맡았다[1]. 1433년(세종 15년)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년) 4월에 친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어 12살때인 1437년(세종 19년) 2월최사강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이맹한(李孟漢)을 두었다. 같은 해 6월에는 부왕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의안대군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왕자 시절

세종대왕은 그를 총애하여 계속 그의 집에 거처하거나 이어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 6월 경 한때 창진(瘡疹)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기도 했다.[2]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의 병환이 나았고, 세종은 그를 치료한 의관들과 관련자들에게 크게 상을 내린다.[3]

임금이 금성 대군(錦城大君)의 병이 나은 것을 기뻐하여 시병한 환관 최습(崔濕)에게 말 한 필과 밭 5결(結)을 주고, 김충(金忠)·김연(金衍)·전균(田畇)에게 각각 한 등급을 가하고 밭 5결을 주고 이해(李海)의 관직을 가하고, 또 의원 노중례(盧重禮)에게 안구마(鞍具馬) 한 필과 밭 5결을 주고, 배상문(裴尙文)에게 한 등급을 더하고 말 한 필과 밭 5결을 주고, 양홍수(楊弘遂)·전인귀(全仁貴)·전순의(全循義)·김지(金智)에게 각각 옷 한 벌을 주고, 박연생(朴延生)은 한 등급을 뛰었는데 연생은 대군(大君)의 유모의 남편이었다. 중례의 조카 노고헌(盧高憲)도 역시 한 등급을 더하였다.[3]

그는 불교 신자였고 사찰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1452년(문종 2년) 한때 문종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병환을 낫도록 축원케 하도록 사찰에 파견될 계획이 세워졌으나 중간에 취소되었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 이유(首陽大君 李瑈)와 함께 즉위한 단종에 의해 사정전(思政殿)으로 호출되었다. 이때 단종에게 친히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안평대군을 숙청하고 단종의 보필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수양대군과의 갈등과 유배

그는 조카 단종이 즉위하면서 단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것이 친형 수양대군(세조)의 반감을 샀다.

1455년(단종 2년) 1월에는 영의정인 수양대군과 영의정(領議政)과 우의정(右議政) 한확(韓確)·우찬성(右贊成) 이계린(李季疄)·좌참찬(左參贊) 강맹경(姜孟卿)·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계전(李季甸)·형조 판서(刑曹判書) 이변(李邊)·도승지(都承旨) 신숙주(申叔舟)·우부승지(右副承旨) 구치관(具致寬)이 빈청(賓廳)에 모여 왕족들이 그의 집에서 활쏘기 시합을 한 것을 구실삼아 탄핵하였다.[4]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최영손(崔泳孫)·김옥겸(金玉謙) 등이 금성 대군(錦城大君)3021) 이유(李瑜) 집에 모여서 사연(射宴)3022) 하고서도 이를 숨겼습니다. 그리고 이영(李瓔)은 평원 대군(平原大君) 의 첩(妾) 초요갱(楚腰輊)을 간통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핑계하여 죄를 줄 수가 있으나, 그 숨기는 것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이영(李瓔)은 외방(外方)에 유배하고, 이유(李瑜)의 고신(告身)은 거두도록 하소서.[4]

그리하여 그 해 2월 고신을 박탈당하고 유배령이 내려졌으나[5], 무죄로 판결받고 고신을 되돌려받는다.[6]

그러나 세조 즉위 후에는 1455년(세조 1년)에 경상도 순흥(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안치되고, 그의 재산 및 노비는 모두 몰수당했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와 처형

금성단 안에 있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2년 후,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비밀리에 단종복위를 위한 거병과 거사를 계획한다. 그러나 당시 순흥의 관노가 탈출하여 한성으로 달려가 세조에게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노산군(단종)의 복위를 꾀하고 있다.' 라는 보고를 올려 사사되고 말았다. 그 때가 1457년(세조 3년) 음력 10월 21일로,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이와 더불어 그의 자손들은 단종과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던 다른 세종의 왕자들(한남군, 영풍군 등)의 자손들과 함께 종친록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사후

금성대군의 묘소를 찾던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금성단이라 한다.

그 뒤 중종조에 와서 금성대군의 증손이 왕에게 청을 올려,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이를 옳게 여긴 중종은 1519년(중종 14년), 금성대군의 자손 3대에게 관작을 봉하고 승습의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금성대군의 관작이 숙종조에 들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때에는 그의 자손들이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현재도 금성대군을 기리는 여러 사적지에서 그에게 사사 명령이 내려진 음력 10월 21일을 기일로 보고, 봉사손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평가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과 다른 서자 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하여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두 분이 사랑하던 손자이자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 되는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7]는 평가가 있다.

사적

가족 관계

관련 작품

드라마

같이 보기

출처

  1. 《조선왕조실록》1453년(단종 1년) 6월 26일 1번째 기사
  2.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6월 11일(신사) 2번째기사 "금성 대군이 창진으로 위독하게 되다"
  3.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6월 21일(신묘) 5번째기사 "금성 대군의 쾌유에 공이 있는 자들을 상을 주다"
  4.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2월 27일(계묘) 2번째기사 "화의군 이영 등을 유배하고 환관 엄자치 등을 파출시키다"
  5.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2월 27일(계묘) 3번째기사 금성 대군 이유 등의 고신을 거두고 엄자치 등 환관을 외방에 유배시키다
  6.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3월 7일(임자) 1번째기사 "좌사간 대부 신전이 금성 대군 이유·화의군 이영·무신 홍약·환관 엄자치 등의 죄명을 밝히도록 아뢰다"
  7. 금성대군
  8. 《조선왕조실록》중종 32권, 13년(1518 무인 / 명 정덕(正德) 13년) 2월 21일(경인) 5번째기사
  9. 《조선왕조실록》중종 32권, 13년(1518 무인 / 명 정덕(正德) 13년) 2월 21일(경인) 5번째기사
  10. 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10월 19일(계축) 3번째기사 "간통죄를 범한 이정근과 이영근에게 각기 곤장 1백 대를 집행하였다"

바깥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