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대군 (138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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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6일 (화) 12:14 판

의안대군
宜安大君
군(君)
세자(世子)
대군(大君)
이름
이방석
李芳碩
별호 별칭은 폐세자 이방석(廢世子 李芳碩)
시호는 소도군(昭悼君)
신상정보
출생일 고려 우왕 8년(1382)
출생지 고려 개경
사망일 조선 태조 7년(1398) 10월 6일(음력 8월 26일) (17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朝鮮)
가문 조선 태조
배우자 세자빈 유씨(초실)
삼한국대부인 현빈 심씨(계실)
자녀 슬하 1남(조졸)
종교 유교(성리학)
묘소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의안대군(宜安大君, 1382년 ~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8왕자로, 시호소도(昭悼), 본명은 이방석(李芳碩)이다. 태조의 왕비(제2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다. 조선 최초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폐위되고 향년 17세로 암살되었다.

생애

세자 책봉

태조 1년(1392) 9월 7일(음력 8월 20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짧은 세자 기간 중 부인 현빈 류씨(賢嬪 柳氏)와 내시 이만(李萬)의 간통 사건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류씨와 이만은 처벌[1]받고, 세자는 현빈 심씨(賢嬪 沈氏)를 새 부인으로 맞게 되었다.[2]

태조 5년(1396) 9월 15일(음력 8월 13일)에는 세자의 어머니 현비 강씨(顯妃 康氏·신덕왕후)가 사망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

태조 7년(1398)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의 주도로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세자는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있던 정안군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었으나,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 기병이 꽉 찼다"는 봉원량(奉元良)의 보고[3]에 군사 대응을 포기하고 만다.

정도전, 남은, 박위 등 정안군의 시점에서 부정적인 세력이 제거되고 난 뒤, 정안군 세력은 세자를 방석에서 영안군 이방과(永安君 李芳果·후일의 정종)로 교체했다. 유배되기로 한 폐세자 방석은 잠시 후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에서 나왔고, 이거이(李居易) 등 정안군 세력은 도평의사사와 합의하여 자객을 보내 방석을 죽였다.

사후

명예 회복

태종 6년(1406) 9월 14일(음력 8월 3일), 태종은 방석에게 소도군(昭悼君·또는 소도공), 방번에게 공순군(恭順君·또는 공순공)의 시호를 추시했다. 숙종 6년(1680) 8월 21일(음력 7월 27일), 숙종은 신원정치의 일환으로 방석을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방번무안대군(撫安大君)으로 추증하였다.

무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의안대군방석묘역’내에 위치해 있다. 1998년 4월 13일경기도기념물 제166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가족 관계

  • 조부 : 환조대왕
  • 대왕대비 : 의혜왕후
  • 부왕 : 태조대왕, 대한(大韓)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 조선 건국조
  • 모후 : 신덕왕후, 대한(大韓) 신덕 고황후(神德 高皇后) 강씨(康氏)
    • 형(兄) :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
    • 자(姉) : 경순공주(敬順公主)
    • 자형(姉兄) : 흥안군(興安君) (李濟), 개국공신
  • 정부인 : 현빈 유씨(賢嬪 柳氏) - 폐출
  • 계부인 : 삼한국대부인 현빈 심씨(三韓國大夫人 賢嬪 沈氏 , ? - 1448년) - 부성군(富城君) 심효생의 딸. 본관은 부유.
    • 장남 : 원손, 이름미상(元孫, 1398년 5월 29일/6월 14일 - 1398년 8월 26일/10월 6일) - 출생 기록만 남겨져 있다.

관련 작품

드라마

같이 보기

주석

  1.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 음력 6월 19일 1번째 기사. 이날 세자빈 현빈 유씨는 폐출되었고, 이만은 참수되었다.
  2.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1397) 음력 9월 27일 1번째 기사. 현빈 심씨의 세자빈 책봉 과정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3.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1398) 음력 8월 26일 1번째 기사. 봉원량의 보고만을 놓고 봤을 때, 제1차 왕자의 난에 동원된 정안군 측 병력이 상당히 많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기사에 정안군 측의 병력은 수십여 명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태조실록이 태종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당히 윤색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로 활용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