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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숙부 해색주(解色朱, [[고구려 민중왕|민중왕]])가 왕위에 올랐고, [[48년]]에 민중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모본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국사를 살피지 못해 백성들이 원망했다고 한다.
[[32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숙부 해색주(解色朱, [[고구려 민중왕|민중왕]])가 왕위에 올랐고, [[48년]]에 민중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모본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국사를 살피지 못해 백성들이 원망했다고 한다.


[[49년]]에 장수를 보내 [[후한]]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이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화친을 청해와 화친하였다.<ref>이 습격 기사를 오환 또는 선비를 고구려로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병도, 《삼국사기》, 을유문화사</ref>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49년]]에 장수를 보내 [[후한]]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이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화친을 청해와 화친하였다.<ref>이 습격 기사를 오환 또는 선비를 고구려로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병도, 《삼국사기》, 을유문화사</ref><ref>후한서 동이열전에는 고구려와 선비가 연합하여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을 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고구려를 선비나 오환과 착각했을 가능성은 낮다.</ref>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51년]]에는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이에 [[53년]]에 신하 [[두로]](杜魯)가 쿠데타를 일으켜 처형당했다.
[[51년]]에는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이에 [[53년]]에 신하 [[두로]](杜魯)가 쿠데타를 일으켜 처형당했다.

2015년 5월 2일 (토) 15:29 판

고구려 모본왕
高句麗 慕本王
고구려의 5대 대왕
재위 48년 - 53년
전임 민중왕
후임 태조대왕
부왕 대무신왕
이름
고해우(高解憂)
신상정보
부친 대무신왕

모본왕(慕本王, 32년 이전[1] ~ 53년, 재위: 48년 ~ 53년 음력 11월)은 고구려의 제5대 이다. 이름은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이나 해씨(解氏)일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대무신왕의 원자(元子)이자 둘째 아들이다.

생애

32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숙부 해색주(解色朱, 민중왕)가 왕위에 올랐고, 48년에 민중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모본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국사를 살피지 못해 백성들이 원망했다고 한다.

49년에 장수를 보내 후한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이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화친을 청해와 화친하였다.[2][3]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51년에는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이에 53년에 신하 두로(杜魯)가 쿠데타를 일으켜 처형당했다.

즉위년 10월 왕자 고익(高翊)을 태자로 책립했으나, 그가 죽은 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인 궁(宮)이 제6대 태조왕으로 즉위했다.

가족관계

  • 부 : 대무신왕
  • 모 : 왕후 송씨(王后 松氏)
  • 이복형 : 호동
    • 아들 : 고익(高翊) - 48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이후의 생애는 알 수 없다.

참고

주석

  1. 대무신왕의 큰아들 호동이 32년에 죽을 때, 해우는 태어난 상태였다.[출처 필요] 민중왕이 등극한 44년, 해우는 아직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이 습격 기사를 오환 또는 선비를 고구려로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병도,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3.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고구려와 선비가 연합하여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을 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고구려를 선비나 오환과 착각했을 가능성은 낮다.
전 대
민중왕
제5대 고구려 국왕
48년 - 53년
후 대
태조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