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8번째 줄: 8번째 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후들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고 여러 세대가 흘러 제후와 주나라 왕실간의 혈연 관계도 약화되면서 종법 질서를 중심으로 한 통제 체제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나라 왕실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수도를 상실하고 낙읍(洛邑)으로 옮겨오면서 실질적인 국력 우위마저 사라지게 되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완전히 소멸되고 혼란기가 찾아왔다. 이 혼란기를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하며, 전반기인 [[춘추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존중하여 제후들이 [[패자]]를 중심으로 왕실을 보호하는 양상이었으나 후반기인 [[전국 시대]]가 되면 제후들이 모두 왕을 자칭하고 주나라 왕실과 동등한 독립국으로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주나라의 제도로서의 봉건제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후들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고 여러 세대가 흘러 제후와 주나라 왕실간의 혈연 관계도 약화되면서 종법 질서를 중심으로 한 통제 체제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나라 왕실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수도를 상실하고 낙읍(洛邑)으로 옮겨오면서 실질적인 국력 우위마저 사라지게 되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완전히 소멸되고 혼란기가 찾아왔다. 이 혼란기를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하며, 전반기인 [[춘추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존중하여 제후들이 [[패자]]를 중심으로 왕실을 보호하는 양상이었으나 후반기인 [[전국 시대]]가 되면 제후들이 모두 왕을 자칭하고 주나라 왕실과 동등한 독립국으로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주나라의 제도로서의 봉건제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한나라]] 이후 중국의 여러 왕조는 황족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하는 '''봉건''' 전통은 형식적으로 부활하여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인 제도는 주나라의 봉건제도와 달랐다. 분봉된 제후왕들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제후왕들의 영지를 포함한 모든 지역은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이 일정한 임기 동안 다스리는 군현제로 통치되었다. 제후왕들의 제후국은 이름만 국(國)이었을 뿐 실질적으로 군(郡)과 차이가 없었다.
[[한나라]] 이후 중국의 여러 왕조는 황족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하는 '''봉건''' 전통은 형식적으로 부활하여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인 제도는 주나라의 봉건제도와 달랐다. 분봉된 제후왕들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제후왕들의 영지를 포함한 모든 지역은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이 일정한 임기 동안 다스리는 군현제로 통치되었다. 제후왕들의 제후국은 이름만 국(國)이고 행정관의 직명만 달랐을 뿐 실질적으로 군(郡)과 차이가 없었다.


== 유럽의 봉건 제도 ==
== 유럽의 봉건 제도 ==

2015년 4월 24일 (금) 09:39 판

봉건 제도(封建制度)는 고대 중국중세 유럽 등에서 시행된 지방 행정 제도이자 정치·사회 체제이다. 중국과 유럽의 봉건제도는 일부 공통성이 있지만 서로 상이한 제도이나, 한자문화권에서는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Feudalism을 중국의 봉건 제도로 번역하여 같은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중앙 정부가 지방을 직접 행정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와 달리 중앙 정부는 수도와 일부 요충지만 직접 통치하고 다른 지방에는 제후나 영주를 임명하여 세습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이다.

중국의 봉건 제도

봉건제는 중국 주나라 때 시행된 것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요충지에 제후로 봉하여 주나라 왕실을 지키는 번병(藩屛)으로 삼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주나라 왕족 및 공신으로 이루어진 50여 제후국들이 임명되어 중국 각지에 남아 있던 기존의 800여 제후들을 아우르도록 한 것이다.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800 제후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에도 봉건제도와 유사한 형태의 체제는 있었지만, 주나라 때 정치·사회 제도로서 본격적으로 정비되어 실시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봉(封)은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고 토지를 하사하는 제도를 가리키는 한자어이다. 봉건제도는 토지를 하사(封)하여 나라를 세운다(建)는 의미이다.[1] 이렇게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제후국을 삼는 것을 분봉(分封)이라 하며, 제후들에게 땅과 함께 작위를 내리는 것을 봉작(封爵)이라 하였다. 대부분의 제후는 주나라 왕족이 임명되었으며, 제후들은 다시 혈족을 중심으로 경대부(卿大夫)를 임명하고 채읍(采邑)을 나누어 줌으로써 계층적인 통치 체제가 나타났다.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혈연을 바탕으로한 종법(宗法) 질서를 통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종법 질서를 확인하는 일이 크게 중시되었으며, 제후들에게는 제사에 참여하고 제사에 쓸 공물을 공급하는 책무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후들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고 여러 세대가 흘러 제후와 주나라 왕실간의 혈연 관계도 약화되면서 종법 질서를 중심으로 한 통제 체제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나라 왕실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수도를 상실하고 낙읍(洛邑)으로 옮겨오면서 실질적인 국력 우위마저 사라지게 되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완전히 소멸되고 혼란기가 찾아왔다. 이 혼란기를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하며, 전반기인 춘추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존중하여 제후들이 패자를 중심으로 왕실을 보호하는 양상이었으나 후반기인 전국 시대가 되면 제후들이 모두 왕을 자칭하고 주나라 왕실과 동등한 독립국으로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주나라의 제도로서의 봉건제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한나라 이후 중국의 여러 왕조는 황족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하는 봉건 전통은 형식적으로 부활하여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인 제도는 주나라의 봉건제도와 달랐다. 분봉된 제후왕들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제후왕들의 영지를 포함한 모든 지역은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이 일정한 임기 동안 다스리는 군현제로 통치되었다. 제후왕들의 제후국은 이름만 국(國)이고 행정관의 직명만 달랐을 뿐 실질적으로 군(郡)과 차이가 없었다.

유럽의 봉건 제도

봉건 제도의 개념

학문상 통일된 개념이 없으나, 주로 3가지 개념으로 대변된다.

법제사적 의미

주군과 기사간의 주종서약이라는 신분관계와 거기 대응하는 토지에 수수라는 불가분의 결합체제를 말한다. 토지에 수수에는 단순히 토지만이 아니라 토지에 소속된 농노등을 함께 포함한다. 서유럽에서는 대략 8세기 말엽~13세기 중엽까지 해당한다.

사회경제사적 의미

노예 제도의 붕괴 후에 성립되어 자본주의에 전에 존재하였던 주군과 기사, 농노사이의 지배·예속관계가 기초를 이룬 생산체제를 말한다. 봉건 제도에서 주군과 기사, 농노는 토지를 매개로 봉건지대를 수취 ·수납하였다. 봉건 시대에는 토지를 주군으로부터 빌려 쓰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 대가로는 부역과 생산물이 있었는데, 화폐로 바뀌어 가며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어 갔다. 그러나, 여전히 주군의 경제외적인 지배와 공동체의 규제가 농민을 극심하게 속박하였다. 서유럽에서는 6세기말엽,7세기 초~ 18세기 시민혁명 때까지가 봉건시대에 해당된다.

사회 유형으로서 의미

국왕 또는 황제를 정점으로 계단형 질서체계를 이루고, 신분제도의 유지, 전통의 고수라는 형태로 개인 기량의 발휘와 내면적 인간적 권위의 존중 등이 억압된 사회를 말한다. 봉건사회는 일반적으로 씨족제의 붕괴 과정에 있는 사회가 보편적인 국가이념과 종교를 이용하여 새로운 정치형성을 도모해 나갈 때에 생긴 역사적 조건의 우연한 산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봉건 제도를 사회 유형으로서 필연적인 한 단계라고는 하지 않는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토지를 중심으로 주종관계라고 하는 인적 결합의 강화를 통한 통일이 국가 통치의 한 방법이었다.

주석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