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 라자크 후세인: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전거 정보 틀 추가; 예쁘게 바꿈
SouthSudan (토론 | 기여)
잔글 HotCat을 사용해서 분류:무슬림을(를) 삭제함, 분류:말레이시아의 무슬림을(를) 추가함
33번째 줄: 33번째 줄:
}}
}}


'''압둘 라작 후세인'''({{llang|ms|Abdul Razak Hussein}}, [[1922년]] [[5월 11일]] ~ [[1976년]] [[1월 14일]])은 [[말레이시아]]의 전 정치인이었다. 본명은 '''툰 압둘 라작 빈 후세인 알하지'''({{llang|ms|Abdul Razak bin Hussein Al-Haj}})이다. 1970년부터 총리로 재직하였으나, 임기 중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현임 총리 나집 툰 라작의 부친이다. 호칭은 '''개발의 아버지'''({{llang|ms|Bapa Pembangunan}})이다.
'''압둘 라작 후세인'''({{llang|ms|Abdul Razak Hussein}}, [[1922년]] [[5월 11일]] ~ [[1976년]] [[1월 14일]])은 [[말레이시아]]의 전 정치인이었다. 본명은 '''툰 압둘 라작 빈 후세인 알하지'''({{llang|ms|Abdul Razak bin Hussein Al-Haj}})이다. 1970년부터 총리로 재직하였으나, 임기 중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현임 총리 나집 툰 라작의 부친이며, 호칭은 '''개발의 아버지'''({{llang|ms|Bapa Pembangunan}})이다.


== 약력 ==
== 약력 ==
82번째 줄: 82번째 줄:
[[분류:말레이시아의 부총리]]
[[분류:말레이시아의 부총리]]
[[분류:말레이인]]
[[분류:말레이인]]
[[분류:무슬림]]
[[분류:말레이시아의 무슬림]]

2015년 2월 7일 (토) 22:08 판

압둘 라작 후세인
툰 압둘 라작 빈 후세인 알하지
Tun Abdul Razak bin Hussein Al-Haj
말레이시아제2대 총리
임기 1970년 9월 22일~1976년 1월 14일
부통령 압둘 할림
전임: 툰쿠 압둘 라만(1대)
후임: 후세인 온(3대)

신상정보
출생일 1922년 3월 11일(1922-03-11)
출생지 말레이시아 프칸
사망일 1976년 1월 14일(1976-01-14) (향년 53세)
사망지 영국 런던
국적 말레이시아
학력 말라야 대학교
정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
배우자 라하흐 노아흐
자녀 5명
종교 이슬람교

압둘 라작 후세인(말레이어: Abdul Razak Hussein, 1922년 5월 11일 ~ 1976년 1월 14일)은 말레이시아의 전 정치인이었다. 본명은 툰 압둘 라작 빈 후세인 알하지(말레이어: Abdul Razak bin Hussein Al-Haj)이다. 1970년부터 총리로 재직하였으나, 임기 중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현임 총리 나집 툰 라작의 부친이며, 호칭은 개발의 아버지(말레이어: Bapa Pembangunan)이다.

약력

1922년 파항 주 프칸의 풀라우 클라디에서 후세인 빈 모하마드 타이브와 하자흐 트흐 파티마흐 다우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귀족 가문 출신이고, 쿠알라 캉사르 말레이 공과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싱가포르 래플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장학금을 수여했으며, 전쟁 때는 파항에서 투항하는 군을 지원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영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이를 통해 링컨스 인 대학교의 변호사 자격을 얻는다.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영국노동당의 일원이었으며, 크사투안 믈라유 그레이트 브리튼에서 학생들을 지도한다. 또한 그는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말라얀 포럼을 설립한다.

독립 운동

영국에서 돌아온 후, 그는 말레이 시민국에 합류했으며, 이후 UMNO의 청년 수석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시작하였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1957년 말레이시아가 독립하자, 그는 부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재임 중 5·13 사건이 터지게 되고, 툰쿠 압둘 라만의 인기가 차츰 떨어지게 된다. 결국 라만은 1970년 총리직을 사임하고, 라작은 라만의 뒤를 이어 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

라작과 말레이시아의 2세대 정치가들의 주요 정책은, 민족간의 불평등 해소였다.

그는 MNEP로 알려진, 말레이시아의 새로운 경제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1년부터 실시한 정책으로써, 빈곤을 뿌리뽑고 인종적·경제적 불화를 막는 것이었다.

1973년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에서 동맹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부미푸트라 정책

라작의 주요 정책 중 하나는 부미푸트라(Bumiputera)정책이었다. '부미푸트라'의 뜻은 '자국민', 즉 말레이인 정책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말레이인 또는 말레이 원주민들을 정치적/문화적 등 여러 분야에서 우대하는 것이다.

본디 이 정책은 말레이인과 중국인 간의 마찰이 심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뜻으로 시행했지만, 최근에는 일부 국가들로부터 '인종 차별 정책'이라며 비난을 듣기도 한다. 심지어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도 '이 정책 때문에 말레이시아가 다른 동남아 강대국들에게 밀리고 있다. 이 정책은 외국인들에게는 당연히 피해를 주지만 말레이인들에게조차도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죽음

1975년부터, 그의 건강이 차츰 악화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백혈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후 런던으로 요양을 갔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1]

사후 그에게 개발의 아버지(말레이어: Bapa Pembangunan)라는 칭호를 부여했으며, 현재 콸라룸푸르에 안장되어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