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엽 (156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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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과 저술 ==
== 학문과 저술 ==
저서로 『수몽집(守夢集)』과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가 있다. 『근사록석의』는 『근사록(近思錄)』의 해설서로 목판본 14권 4책이다. 김장생(金長生)이 시작한 주석 작업을 정엽이 이어받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사위 나만갑이 정서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본문과 주석을 나누고 내용을 고증하여 1661년(현종 2)에 간행하였다. 『근사록』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학문의 중심이 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추려서 편집한 신유학(新儒學)의 중심 문헌으로 조선에서는 사림파에 의해 연구, 보급되었다.
저서로 『수몽집(守夢集)』과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가 있다. 『근사록석의』는 『근사록(近思錄)』의 해설서로 목판본 14권 4책이다. 김장생(金長生)이 시작한 주석 작업을 정엽이 이어받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사위 나만갑이 정서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본문과 주석을 나누고 내용을 고증하여 1661년(현종 2)에 간행하였다. 『근사록』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학문의 중심이 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추려서 편집한 신유학(新儒學)의 중심 문헌으로 조선에서는 사림파에 의해 연구, 보급되었다.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초계 정씨 묘역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묘역 입구에 자리한 신도비는 1637년(인조 15)에 세워졌다. 옥개형의 2면 비로 옥개석의 크기는 너비 140㎝, 높이 50㎝, 두께 65㎝이고, 비신은 너비 94㎝, 높이 236㎝, 두께 31㎝이다. 비좌는 148㎝, 40㎝, 88㎝이다. 비문은 좌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호조 참판 김광현(金光炫)이 전(篆)하였다.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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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6일 (금) 16:19 판

정엽(鄭曄, 1563년~1625년)은 조선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정치가이며,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설촌(雪村), 시호는 문숙(文肅),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학자 이산보(李山甫)의 사위이며 북인 당수 이산해의 당조카사위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생애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성혼(成渾)과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사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처가는 북인 이산해의 가문이었다. 1583년(선조 16)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1587년에 감찰(監察)·형조 좌랑을 지내었다. 1593년 황주 판관으로 왜군을 격퇴하고, 그 공으로 중화 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수찬(修撰)·장령(掌令) 및 서천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예조 정랑으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사성(司成)이 되고, 수원 부사를 거쳐 이듬해 응교로 필선을 겸임하였다. 이어 승지·형조 참의·나주 목사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1602년(선조 35)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다가 1606년 성주(星州) 및 홍주(洪州)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 초 예조 참의·대사성·승지·판결사(判決使)·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0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612년(광해군 4) 도승지로 왕을 경연에 자주 나가도록 했고, 대북이 집권한 뒤에도 그의 처당숙이 이산해였던 탓에 관직에 계속 나갈 수 있었다. 1614년 공조 참판이 되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1년 만에 사퇴했다. 그 뒤 서인들하고 교류하다가 인조 반정을 지지하게 된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 겸 동지경연·원자사부(元子師傅)가 되어 학제(學制)를 상정했고, 여러 번 다른 직에 전임되었으나, 언제나 대사성을 겸함으로써 이 때부터 대사성을 겸직하게 하는 선례(先例)를 만들었다. 대사헌을 거쳐 좌참찬ㆍ좌부빈객(左副賓客) 등을 지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수몽집(守夢集)』과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가 있다. 『근사록석의』는 『근사록(近思錄)』의 해설서로 목판본 14권 4책이다. 김장생(金長生)이 시작한 주석 작업을 정엽이 이어받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사위 나만갑이 정서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본문과 주석을 나누고 내용을 고증하여 1661년(현종 2)에 간행하였다. 『근사록』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학문의 중심이 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추려서 편집한 신유학(新儒學)의 중심 문헌으로 조선에서는 사림파에 의해 연구, 보급되었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초계 정씨 묘역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묘역 입구에 자리한 신도비는 1637년(인조 15)에 세워졌다. 옥개형의 2면 비로 옥개석의 크기는 너비 140㎝, 높이 50㎝, 두께 65㎝이고, 비신은 너비 94㎝, 높이 236㎝, 두께 31㎝이다. 비좌는 148㎝, 40㎝, 88㎝이다. 비문은 좌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호조 참판 김광현(金光炫)이 전(篆)하였다.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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