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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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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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固城 李氏)는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고성]]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덕종]] 때 인물인 '''이황'''(李璜)이다.


== 시조 ==
'''고성 [[이씨]]'''(固城 李氏)는 [[한국]]의 성씨로, 고대 중국 [[한나라]] 전한시대 문제(文帝,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57년)때 사람인 반(槃)의 24세손으로 알려진 이황(李璜)에서부터 유래되었으며 [[본관]]은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고성]]이다. 고성의 과거 지명을 따 '''철성 이씨'''라고도 불린다.
『이씨추원록(李氏追遠錄)』에 의하면 중국 한(漢)나라 무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던 이반(李槃)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온 뒤 눌러 살게 되었는데 이황은 그 후손으로 24세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후 세계를 알 수 없어 고증할 수 없다.


고성 이씨의 구전(口傳)에 따르면 반(槃)은 [[춘추전국시대]]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성 이씨의 구전(口傳)에 따르면 반(槃)은 [[춘추전국시대]]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구전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어머니 뱃속에서 70년을 있다가 나이 70에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만물의 이치를 모두 깨우치고 있었다고 하며,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나 성을 이(李)씨로 정했다고 한다. 노자의 실제 이름은 이이(李耳)이다.
구전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어머니 뱃속에서 70년을 있다가 나이 70에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만물의 이치를 모두 깨우치고 있었다고 하며,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나 성을 이(李)씨로 정했다고 한다. 노자의 실제 이름은 이이(李耳)이다.


고성 이씨 시조 이황(李璜)은 고려 시대 사람으로 고려 덕종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를 지내고 이후 1033년 거란의 침입시에 공을 세우고 승급한 기록이 있고, 고려 문종(재위 1046~1083)때인 1063년 호부상서에 올라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李璜)과는 동명이인이다.
이황(李璜)은 고려시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만성보(萬姓譜)』등에는 고려 덕종 문과(文科)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거란군(契丹軍)의 침입 공을 세워 이부상서(吏部尙書) 이르렀으며, 철령군(鐵嶺君:고성(固城)의 별호)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李璜)과는 동명이인이다.


== (派) ==
== 계파(派) ==
고성이씨 계파는 8대에서 11대에 걸쳐 점차 형제가 나누어지면서 가계가 번창함에 따라, 안정공파(安靖公派), 둔재공파(鈍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동추공파(同樞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사암공파(思菴公派), 도촌공파(桃村公派), 은암공파(隱菴公派)로 이루어져 있다.
고성이씨 계파는 8대에서 11대에 걸쳐 점차 형제가 나누어지면서 가계가 번창함에 따라, 안정공파(安靖公派), 둔재공파(鈍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동추공파(同樞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사암공파(思菴公派), 도촌공파(桃村公派), 은암공파(隱菴公派)로 이루어져 있다.


== 인구 ==
== 인구 ==
2000년 인구조사에서 고성 이씨로 분류한 84,383명과 철성 이씨로 표기한 4871명을 포함하면, 총 89,254명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고성 이씨로 표기한 인구수는 71,910명(가구수는 17,571가구)이었고, 철성 이씨까지 합치면 75,904명이었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고성 이씨로 분류한 84,383명과 철성 이씨로 표기한 4871명을 포함하면, 총 89,254명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고성 이씨로 표기한 인구수는 71,910명(가구수는 17,571가구)이었고, 철성 이씨까지 합치면 75,904명이었다.


== 주요 인물 ==
== 인물 ==
고려 말과 조선 초 많은 문관 및 무관을 배출했고,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말 명필이자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 등을 지낸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杏村) [[이암 (고려)|이암]](李嵒, 1297~1364),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지낸 용헌(容軒) [[이원 (1368년)|이원]](李原, 1368~1430), 조선 성종 시절 청파극담으로 알려진 이육(李陸, 1438∼1498) 등이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 많은 문관 및 무관을 배출했고,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말 명필이자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 등을 지낸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杏村) [[이암 (고려)|이암]](李嵒, 1297~1364),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지낸 용헌(容軒) [[이원 (1368년)|이원]](李原, 1368~1430), 조선 성종 시절 청파극담으로 알려진 이육(李陸, 1438∼1498) 등이 있다.



2014년 11월 14일 (금) 09:56 판

고성 이씨 (固城 李氏)
관향경상남도 고성군
시조이황
주요 인물이암, 이원, 이괄, 이상룡, 이한동, 근비 이씨, 이서진
인구(2000년)89,254

고성 이씨(固城 李氏)는 경상남도 고성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덕종 때 인물인 이황(李璜)이다.

시조

『이씨추원록(李氏追遠錄)』에 의하면 중국 한(漢)나라 무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던 이반(李槃)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온 뒤 눌러 살게 되었는데 이황은 그 후손으로 24세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후 세계를 알 수 없어 고증할 수 없다.

고성 이씨의 구전(口傳)에 따르면 반(槃)은 춘추전국시대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구전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어머니 뱃속에서 70년을 있다가 나이 70에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만물의 이치를 모두 깨우치고 있었다고 하며, 오얏나무 밑에서 태어나 성을 이(李)씨로 정했다고 한다. 노자의 실제 이름은 이이(李耳)이다.

이황(李璜)은 고려시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만성보(萬姓譜)』등에는 고려 덕종 때 문과(文科)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거란군(契丹軍)의 침입 때 공을 세워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철령군(鐵嶺君:고성(固城)의 별호)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李璜)과는 동명이인이다.

계파(派)

고성이씨 계파는 8대에서 11대에 걸쳐 점차 형제가 나누어지면서 가계가 번창함에 따라, 안정공파(安靖公派), 둔재공파(鈍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동추공파(同樞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사암공파(思菴公派), 도촌공파(桃村公派), 은암공파(隱菴公派)로 이루어져 있다.

인구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고성 이씨로 분류한 84,383명과 철성 이씨로 표기한 4871명을 포함하면, 총 89,254명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고성 이씨로 표기한 인구수는 71,910명(가구수는 17,571가구)이었고, 철성 이씨까지 합치면 75,904명이었다.

인물

고려 말과 조선 초 많은 문관 및 무관을 배출했고,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말 명필이자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 등을 지낸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7~1364),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지낸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30), 조선 성종 시절 청파극담으로 알려진 이육(李陸, 1438∼1498) 등이 있다.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이괄(李适, 1587~1624)은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일으켜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제(興安君 瑅)를 왕으로 세웠으나 한달만에 난이 평정되어 실패했다.

최근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현재의 국가원수 또는 대통령에 해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 전 국무총리이자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이한동 등이 있다.

보물 182호이자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안동 임청각(臨淸閣)은 사대부 반가로서는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99칸짜리 집으로 유명하며 현존하는 민가로는 가장 크다. 임청각은 1519년 이명(李洺)이 지어 500년 가까이 고성 이씨 종가로 보존되어온 고택이지만, 일제시대에는 일제가 이 집의 맥을 끊기 위해 집 안을 지나도록 철로를 부설하면서 일부 철거를 당하기도 했으며, 2002년 후손들이 국가에 헌납했다.

고려 왕실과의 인척관계

바깥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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