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흠돌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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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의 난'''은 [[신라]]에서 [[681년]] [[소판]](蘇判) [[김흠돌]]이 [[파진찬]] [[흥원]](興員),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으로 신라의 왕권이 전제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사건이다. [[신문왕]]은 이를 계기로 진골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김유신의 사위이고, 신문왕의 장인이었다.<ref>조경란. [http://news.sportsseoul.com/read/ptoday/922233.htm 어긋난 ‘외사랑’이 부른 비극, 김흠돌의 난]. 스포츠서울. 2011년 3월 3일.</ref>
'''김흠돌의 난'''은 [[신라]]에서 [[681년]] [[소판]](蘇判) [[김흠돌]]이 [[파진찬]] 흥원(興員),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으로 신라의 왕권이 전제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사건이다. [[신문왕]]은 이를 계기로 진골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김유신의 사위이고, 신문왕의 장인이었다.<ref>조경란. [http://news.sportsseoul.com/read/ptoday/922233.htm 어긋난 ‘외사랑’이 부른 비극, 김흠돌의 난]. 스포츠서울. 2011년 3월 3일.</ref>


== 주석 ==
== 주석 ==

2014년 8월 31일 (일) 20:40 판

김흠돌의 난신라에서 681년 소판(蘇判) 김흠돌파진찬 흥원(興員),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건으로 신라의 왕권이 전제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사건이다. 신문왕은 이를 계기로 진골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김유신의 사위이고, 신문왕의 장인이었다.[1]

주석

  1. 조경란. 어긋난 ‘외사랑’이 부른 비극, 김흠돌의 난. 스포츠서울. 2011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