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4번째 줄: 4번째 줄:
|이름=차범근<br />(車範根)
|이름=차범근<br />(車範根)
|사진=Cha Bum-Kun in 2012 Olympics.jpg
|사진=Cha Bum-Kun in 2012 Olympics.jpg
|설명=런던올림픽 중계때모습 왼쪽은 [[배성재]]아나운서
|설명=[[런던올림픽]] 중계때모습 왼쪽은 [[배성재]]아나운서
|로마자 표기=Cha Bum-Kun
|로마자 표기=Cha Bum-Kun
|국적={{KOR}}
|국적={{KOR}}

2014년 6월 6일 (금) 01:24 판

차범근
(車範根)
런던올림픽 중계때모습 왼쪽은 배성재아나운서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 Cha Bum-Kun
출생일 1953년 5월 22일(1953-05-22)(70세)
출생지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
(현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79cm
포지션 은퇴 (과거 스트라이커)
청소년 구단 기록
1972-1975 대한민국 고려대학교
구단 기록*
연도 구단 출전 (득점)
1976
1976-1978
1978-1979
1979-1983
1983-1989
합계
대한민국 서울신탁은행
대한민국 공군 (군복무)
독일 SV 다름슈타트 98
독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독일 바이어 04 레버쿠젠


001 0(0)
122 (46)
185 (52)
308 (98)
국가대표팀 기록
1972-1986 대한민국 121 (55)
지도자 기록
1991-1994
1997-1998
1998-1999
2004-2010
대한민국 울산 현대 호랑이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선전 핑안
대한민국 수원 삼성 블루윙즈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또한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차범근(車範根, 1953년 5월 22일 ~ , 경기도 화성)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지도자, 해설가, 평론가이다.

푸스발-분데스리가에서 활약했을 당시에는 흔히 차붐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국제 축구 역사 & 통계 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1] MBC의 해설위원으로 해설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2010년 FIFA 월드컵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SBS의 해설위원을 맡았다. 가족은 부인 오은미, 딸 차하나, 아들 차두리, 차세찌가 있다.

개요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 (현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출생으로 화산초등학교, 경신중학교, 경신고등학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푸스발-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할 당시 독일 사람들이 차범근의 로마자 표기를 부르기 어려워 차붐 (Tscha Bum)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빠른 공간 침투와 공중전에 강한 면모 때문에 갈색 폭격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축구인 생활

선수 생활

1976년 10월 공군에 입대해 군 복무를 마치고, 1978년 12월에 푸스발-분데스리가 SV 다름슈타트 98로 이적하였지만 병역 관련 문제로 계약이 파기되었다. (당시 차범근은 공군 팀 전력 강화를 꾀하던 참모총장의 권한으로 2년 뒤 제대를 약속받고, 공군에 입대하였다. 약속된 1978년 12월 복무 기간을 마쳤다고 생각하고, 특별 휴가를 받아 독일로 떠나 푸스발-분데스리가 SV 다름슈타트 98에서 1경기에 출장했다. 그러나 공군의 입장 변화로 출국 11일만에 다시 귀국한 후, 복귀해서 1979년 5월 31일 만기 제대하였다.) 병역 관련 문제를 해결한 후, 1979년 7월 푸스발-분데스리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스카우트된다. 스카우트 후에는 곧바로 1980년 팀을 UEFA컵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고, 이듬해인 1981년에는 팀이 DFB-포칼 우승컵을 드는데 공헌하였다. 1983년 7월에는 푸스발-분데스리가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여 1988년에 다시 한 번 UEFA컵에서 우승하였다. [2] 이 우승으로 차범근은 각기 다른 두 팀에서 UEFA컵 우승을 차지한 9번째 선수가 되었다. 1986년 FIFA 월드컵을 통하여 월드컵 무대도 경험하였지만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1989년 현역에서 은퇴한 차범근은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리그 경기에서 98골을 득점하는 기록을 남겨 기존에 네덜란드빌리 립펜스의 기록(92골)을 경신하고, 리그 외국인 선수 최다 골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999년 스위스스테판 샤퓌자가 106골로 경신했다. [3] 1989년 차범근의 308경기는 1977년 덴마크올레 비요른모세가 수립한 323경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출전 기록이지만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게이 바바레즈가 경신했다. 차범근이 1985-86 시즌에 기록한 17골은 지금까지 푸스발-분데스리가에서 아시아 출신 선수 중 한 시즌 동안 가장 많은 골을 넣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푸스발-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한 10시즌 동안 단 1장의 옐로카드만을 받았을 정도로 투철한 페어플레이 정신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국가 대표 생활

1971년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1년 후인 1972년에 당시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5월 7일 이라크와의 AFC 아시안컵 경기에서 데뷔하였다. 1986년 FIFA 월드컵에도 참가하였다.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1:4로 뒤지고 있을 때 7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해 동점을 만든 것은 유명하며 특히 일본과의 정기전을 치를 때마다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1986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였던 1986년 6월 10일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에서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국가대표로 121경기에 출전하여 55골을 넣었는데 A매치 55골은 대한민국 선수 중 최다 골 기록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지도자 생활

독일에서 영구 귀국한 후 "차범근 축구교실"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11월 23일 K리그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아, 1991년 K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1994년 시즌을 마치고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어 팀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997년 1월 7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됬는데, 당시 대표팀의 상황은 어수선했다. 불과 한 달 전인 1996년 12월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 이란에 2-6의 참패를 당해 8강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어 박종환 감독이 경질되었고, 선수단의 사기 역시 떨어져 있었다. 차범근은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고 수습하여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에 대비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차범근은 자신이 경험한 독일 푸스발-분데스리가 시절을 토대로 독일식 축구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그 결과 서서히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인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일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조였는데 무엇보다도 숙적 일본과 같은 조에 속한 것이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아랍에미리트우즈베키스탄 역시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우선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카자흐스탄과의 1차전에서는 예상대로 3-0의 완승을 거뒀으나 우즈베키스탄과의 2차전에서는 동점골을 허용하며 후반 종료 3분 전까지 1-1로 무기력한 경기를 했다. 다행히 후반 42분 이상윤이 터뜨린 천금같은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뒀다.

2연승을 기록한 대한민국은 본선 진출에 있어 최대 고비인 일본과의 원정 경기를 9월 28일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치르게 되었다. 반드시 월드컵 본선에 첫 진출하겠다는 일본에 맞서 대한민국은 상당히 고전했고, 결국 후반 20분 고정운의 패스미스로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가모 슈 감독은 선제골을 지키기 위해 로페스 와그너를 빼고 수비수 아키타 유타카를 넣는 수비전술을 펼쳤고, 이를 눈치챈 차범근은 수비수 홍명보에게까지 공격에 적극 가세할 것을 지시하여 공격전술로 맞불을 놓았다. 이 전술이 적중하여 마침내 후반 40분과 43분 잇따라 골을 기록해 2-1로 역전승을 거둬 대한민국은 3연승으로 B조에서 단독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이 경기는 소위 ‘도쿄 대첩’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10월 4일에는 조 2위 아랍에미리트잠실종합운동장에서 대결을 펼쳤는데, 전반전에 하석주의 선제골로 경기가 쉽게 풀리는 듯했으나 아랍에미리트의 적극적인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후반에 유상철의 페널티킥과 이상윤의 헤딩골로 3-0의 승리를 거둬 4연승을 기록한 후 중앙 아시아 원정 2연전에 돌입하였다. 카자흐스탄과의 원정 경기에서는 무기력한 경기끝에 1-1 무승부를 기록하여 연승 가도에 제동이 걸렸지만 여전히 1위를 유지하였고, 우즈베키스탄과의 원정 경기에서 예상 외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5-1의 대승을 거둬 조 1위를 사실상 확정지었다. 이후 일본아랍에미리트의 예상 밖 무승부로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직행 티켓을 잡는 데 성공해 2002년 FIFA 월드컵 개최국 자동 진출까지 합쳐 5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비록 11월 1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홈 경기에서는 충격적인 0-2 완패를 당했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조차 불투명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경우의 수 자체를 논할 필요가 없는 조 1위 본선 직행으로 이끈 차범근은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아랍에미리트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3-1의 완승을 거둬 최종 성적 6승 1무 1패로 예선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프랑스에서 개최된 1998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 선제 골을 터뜨린 하석주의 퇴장으로 멕시코에 1-3 역전패,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에 0-5 참패를 당하는 등 참담한 성적을 기록했다. 결국 대한축구협회는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례적으로 차범근을 대회 도중에 경질하고, 그 당시 코치였던 김평석을 감독 대행으로 임명하였다. 이 사례는 같은 대회서 사우디아라비아페레이라 감독을 경질한 뒤 2번째 사례였고, 대한민국 축구사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국 벨기에와의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는 유상철의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경질 이후 차범근은 1999년까지 중국 슈퍼리그 선전 핑안의 감독을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K리그에 승부 조작이 있다는 발언을 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1998년 8월 12일 대한축구협회는 이 일로 그에게 5년 간 대한민국 국내 지도자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로 인해 이듬해 선전의 감독에서 물러나 귀국한 후 한동안 ‘차범근 축구교실’을 운영하여 유소년 육성에만 전념하고 MBC에서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징계가 해제된 2003년 말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감독을 맡게 되어 현장에 복귀했다.[4] 이듬해 2004년에는 K리그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며 감독 생활 이후 처음으로 우승을 맛보았고,[5] 2005년에는 컵대회 우승을 차지하였다.[6] 2008년에는 자신의 K리그 통산 2번째 우승과 컵대회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여 더블을 이룩하였다.

시즌 후 겨울 이적 시장에서 마토, 이정수, 조원희 등 주축 선수들이 이적했지만 이 공백을 제대로 메우지 못한 상태에서 2009 시즌에 임해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10위에 머물렀다.

이후 강민수, 조원희, 염기훈 등을 영입해 전력을 보강하여 시즌을 준비하였으나 2010 시즌 초반에도 부진한 모습을 이어가자 팬들 사이에서 퇴진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2010년 4월 24일 강원 FC와의 경기에서 패하며 5연패를 기록한 뒤 인터뷰에서 퇴진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7] 이후 AFC 챔피언스리그 2010 16강전에서 승리하며 팀을 8강에 올려놓기도 하였으나 5월 20일에 기자회견을 열고 6월 6일부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에서 사임할 것이라고 밝혔으며,[8] 6월 6일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포스코컵 2010 경기가 끝난 후 공식적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010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SBS에 영입되어 해설가로 활동 중이며, 런던 올림픽에서도 해설을 맡았다.

플레이 스타일

  • 승부차기 실축 경험에 따른 공포감으로 실제 경기 중에 승부차기 기회가 와도 자신이 찬 적이 거의 없었지만 대표팀 A매치 통산 121경기 55골, 푸스발-분데스리가 통산 308경기 98골을 득점할 만큼 뛰어난 골 결정력을 자랑했다. 또한 푸스발-분데스리가에서 기록한 98골 중 페널티골은 단 한 골도 없다.
  • 체격도 좋은 편인데다 경마장으로 보내도 좋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로 번개처럼 빠르게 돌진하며 드리블하는 스타일로 상대 수비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신체 조건이 좋고 거친 몸싸움을 하는 선수들이 많은 푸스발-분데스리가에서도 그의 공격은 충분히 통했다.
  • 대표팀에서는 중앙 뿐만 아니라 사이드에서 돌파하는 윙 역할을 많이 맡았고, 그 결과 많은 득점 찬스를 만들어 냈다. 이후 윙을 활용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격 방식은 대표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변병주, 서정원 등으로 이어졌다.
  • 다만 클럽에서의 포지션은 윙 포워드가 아닌 센터 포워드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윙 플레이에 능했던 최전방 공격수’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언제나 정확한 슈팅을 하였고, 골대를 크게 빗나가거나 어이없이 높이 뜨는 슛은 거의 쏘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느낌을 주면서도 강하고 빠른 슈팅을 하였다. 그의 슈팅 자세는 마치 교본과도 같아서 당시 스포츠 잡지나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잡지에 그의 슈팅 순간 모습이 연속 사진으로 실리기도 했다.
  • 볼 간수에 능해 안정된 플레이를 펼쳐 상대 선수에게 좀처럼 공을 빼앗기지 않았다.
  • 청소년 국가대표 시절 헤딩 경합을 하다 코뼈를 크게 다친 이후 한동안 헤딩슛은 별로 하지 않았으나 푸스발-분데스리가 데뷔골을 헤딩으로 장식한 이후에는 헤딩슛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그 외


“Hymne auf Bum Kun Cha”

Schön ist, Mutter Natur, deiner Erfindung Pracht,

Die den großen Gedanken vermochte, den Knaben zu träumen,

zu denken – und dann auch zu Bilden mit den schnellen, beseelten, jauchzenden

Füßen des Jünglings: Flink, flitzend,

Flirrend und flackernd – nicht lange fackelnd,

Doch feuernd und feiernd; den fühlenden Herzen Frankfurts zur Freude.

Bum Kun Cha! Freund aus dem Osten! Fremdling bist

Du nicht länger – nicht bitt’res Los ist Exil

Dir! Heimat, die zweite, du fandst sie.

경력

선수 경력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 득점

득점 일자 장소 상대팀 최종
결과
대회
1
1972년 5월 10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캄보디아 캄보디아 4 - 1 1972년 AFC 아시안컵
2
1972년 7월 19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싱가포르 4 - 1 메르데카컵
3
1972년 7월 19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싱가포르 4 - 1 메르데카컵
4
1972년 7월 23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2 - 0 메르데카컵
5
1972년 7월 29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2 - 1 메르데카컵
6
1972년 9월 20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태국 태국 3 - 0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7
1972년 11월 22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1 - 1 킹스컵
8
1973년 5월 28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이스라엘 이스라엘 1 - 0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9
1973년 9월 22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캄보디아 캄보디아 6 - 0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10
1973년 9월 22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캄보디아 캄보디아 6 - 0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11
1973년 9월 30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6 - 0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12
1973년 12월 16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캄보디아 캄보디아 5 - 0 킹스컵
13
1973년 12월 22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미얀마 미얀마 5 - 0 킹스컵
14
1973년 12월 25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5 - 0 킹스컵
15
1974년 5월 18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미얀마 미얀마 3 - 0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16
1974년 12월 25일 영국의 기 영국 홍콩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3 - 1 친선 경기
17
1975년 7월 29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3 - 1 메르데카컵
18
1975년 8월 7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태국 태국 6 - 0 메르데카컵
19
197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일본 3 - 1 메르데카컵
20
197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일본 3 - 1 메르데카컵
21
197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일본 3 - 1 메르데카컵
22
1975년 8월 11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5 - 1 메르데카컵
23
1975년 8월 15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4 - 0 메르데카컵
24
1975년 12월 21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미얀마 미얀마 3 - 1 킹스컵
25
1975년 12월 21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미얀마 미얀마 3 - 1 킹스컵
26
1976년 8월 10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인도 인도 8 - 0 메르데카컵
27
1976년 8월 10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인도 인도 8 - 0 메르데카컵
28
1976년 8월 10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인도 인도 8 - 0 메르데카컵
29
1976년 8월 15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미얀마 미얀마 2 - 2 메르데카컵
30
1976년 9월 11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4 - 4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31
1976년 9월 11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4 - 4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32
1976년 9월 11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4 - 4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33
1976년 9월 13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인도 인도 4 - 0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34
1976년 9월 17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싱가포르 싱가포르 7 - 0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35
1976년 9월 17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싱가포르 싱가포르 7 - 0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36
1976년 12월 22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1 - 1 킹스컵
37
1977년 2월 14일 싱가포르의 기 싱가포르 싱가포르 싱가포르 싱가포르 4 - 0 친선 경기
38
1977년 3월 20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이스라엘 이스라엘 3 - 1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39
1977년 4월 3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일본 1 - 0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40
1977년 6월 26일 영국의 기 영국 홍콩 홍콩 홍콩 1 - 0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41
1977년 7월 17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리비아 리비아 4 - 0 메르데카컵
42
1977년 7월 22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5 - 1 메르데카컵
43
1977년 7월 24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미얀마 미얀마 4 - 0 메르데카컵
44
1977년 7월 31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이라크 이라크 1 - 0 메르데카컵
45
1977년 8월 27일 오스트레일리아의 기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오스트레일리아 1 - 2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46
1977년 9월 3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태국 태국 3 - 1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47
1977년 9월 5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인도 인도 3 - 0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48
1977년 9월 5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인도 인도 3 - 0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49
1977년 9월 13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2 - 2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50
1977년 11월 5일 쿠웨이트의 기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 쿠웨이트 쿠웨이트 2 - 2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51
1978년 7월 19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일본 4 - 0 메르데카컵
52
1978년 7월 22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이라크 이라크 2 - 0 메르데카컵
53
1978년 7월 25일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2 - 0 메르데카컵
54
1978년 12월 11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바레인 5 - 1 1978년 아시안 게임
55
1978년 12월 17일 태국의 기 태국 방콕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5 - 1 1978년 아시안 게임

지도자 경력

해설위원 경력

CF 경력

수상

개인

국가대표팀

감독

대한민국 울산 현대 호랑이

대한민국 수원 삼성 블루윙즈

주석

  1. IFFHS 공식 홈페이지
  2. 그리고 독일의 아벤트 포스터지 (Abend Post, 당시 서독의 지역 일간지)에서 선정한 1985-86 시즌 푸스발-분데스리가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공식적인 1986년 독일 올해의 선수는 하랄트 슈마허였다. 역대 독일 올해의 선수
  3. 2008-2009 시즌을 기준으로 차범근은 현재 지오바니 에우베르 (브라질, 133골), 클라우디오 피사로 (페루, 117골), 스테판 샤퓌자 (스위스, 106골), 아일통 곤사우베스 다 시우바 (브라질, 106골)에 이어 5위로 기록되어 있다.
  4. 차범근, 프로축구 수원 사령탑
  5. 차범근 감독, "그동안 힘들었던 것이 한 순간에 날아가는 기분"
  6. 수원 차범근 감독, “선수-팬-구단이 하나 되어 이룩한 결과"
  7. 박상경. “차범근 감독 "5연패는 내 책임, 원한다면 물러나겠다". 뉴시스. 
  8. 서호정. “수원 삼성 차범근 감독 전격 사임”. 스포탈 코리아. 
  9. 차범근 감독, 방송 해설가로 활동 재개
  10. 차범근, ‘MBC 해설위원’ 공식 발표, 마스크맨 김태영

바깥 고리

전임
대한민국 김호
제4대 현대 호랑이 감독
1991년 - 1994년
후임
대한민국 고재욱
전임
대한민국 박종환
대한민국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7년 1월 8일 - 1998년 6월 21일
후임
대한민국 허정무
전임
대한민국 김호
제2대 대한민국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2003년 10월 16일 - 2010년 6월 6일
후임
대한민국 윤성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