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 (붕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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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4일 (수) 23:59 판

동인(東人)은 조선 시대 붕당정치 초기의 당파로,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생긴 당파의 하나이다.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서인에 대한 원한이 강화되면서 강경론을 주장하는 북인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남인으로 분열되어 1589년 해체된다.

1567년 이후 몰락한 훈구파와 훈구파 중 비주류인 절의파(청담파)를 흡수하여 당세를 확장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초대 당수는 김효원 이었다.

구성

사림파 가운데 기존의 훈구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진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당파이다. 선조 초 김효원심의겸에서 비롯된 당파로, 그 명칭은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에 있던 것에서 유래한다.

동인은 주로 신진 학자로 구성되었고, 이황의 영남학파와도 관계가 있다. 그 중심 인물은 유성룡·이산해 등이며, 1584년(선조 17년) 동인 득세 이후 격렬한 당쟁이 시작되었다. 동인은 또 남인북인으로 분열되어 사색당파(四色黨派)를 형성하게 된다.

학문적으로는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영남에 기반을 두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집권한 선조 때 처음 등용된 신진 관료들이 중심 세력이었다. 선조 때에 기존 훈척정치에 대한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하며 서인(西人)과 대립하였다. 후에 조식 학파인 북인(北人)과 이황 학파인 남인(南人)으로 갈라지게 된다.

1573년이조 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제수하려 한 세력과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을 제수하려 한 세력이 서로 대립하면서, 이를 계기로 각각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초기에는 김효원이 당을 이끌다가 김효원 사후 파벌이 나뉘면서 유성룡, 김성일남인, 이산해, 이덕형, 정인홍 등의 북인으로 나뉜다. 대표적 인물로는 김성일, 김효원, 유성룡, 이덕형, 이산해, 정여립 등이 있다.

기타

학문, 이념적으로는 이황, 이언적, 서경덕, 조식 계열이었다. 이 중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될 때 이황, 이언적 계열은 보다 온건한 남인으로, 서경덕, 조식 계열은 행동, 실천파적 성격의 북인으로 나뉜다.

함께 보기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양반관료의 대립과 분열"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