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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30일 (수) 16:47 판

발정난 진식 어니스트 로런스
어니스트 로런스
어니스트 로런스
본명 어니스트 올랜도 로런스
Ernest Orlando Lawrence
출생 1901년 8월 8일(1901-08-08)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캔턴
사망 1958년 8월 27일(1958-08-27)(57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팰로앨토
거주지 미국
국적 미국
주요 업적 사이클로트론의 발명
입자 물리학
맨해튼 계획
수상 노벨 물리학상 (1939), 엔리코 페르미 상 (1957), 실바너스 테이어 상 (1958)
분야 물리학
소속 예일 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박사 교수 윌리엄 프랜시스 그레이 스원
박사 학생 에드윈 맥밀런, 밀턴 리빙스턴

어니스트 로런스(Ernest Lawrence, 1901년 8월 8일-1958년 8월 27일)는 미국물리학자이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다. 롤프 비데뢰에(선형 입자가속기를 최초로 특허를 내고 작동)의 연구에 기반한 그의 실험에서 1929년에 시작된 사이클로트론 입자 가속기에 대한 발명, 상용화, 발전 그리고 맨해튼 계획에서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라는 그의 후기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로런스는 그가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오랜 시간 재직했다. 1939년에 로런스는 사이클로트론 개발과 그것의 적용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화학 원소 103번은 로런스의 업적을 기리며 '로렌슘'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또한 실바너스 테이어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형제인 존 H. 로런스는 핵의학 분야의 선구자로 유명하다.

초기 생애

사우스다코타 주캔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칼 거스타부스와 군다 로런스는 노르웨이 출신 이민자의 후손으로, 사우스다코타의 캔턴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며 만났으며, 나중에 로런스의 아버지가 학교의 관리자로 일하게 되었다. 성장기에 멀 튜브(Merle Tuve)와 아주 친했는데, 후에 그도 높은 업적을 성취한 핵 물리학자가 되었다.

로런스는 미네소타 주의 세인트올라프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첫 학년을 마치고 사우스다코타 대학교로 옭겨서, 학사 학위를 1922년에 받았다. 그는 물리학 석사 학위를 1923년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받았다. 그후, 로런스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일년을 보내고 예일 대학교로 가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이때는 유럽의 훌륭한 과학 기관에서 연구하는 것이 과학적 업적를 이루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였으나, 로런스는 유럽으로 가지 않고, 예일에 연구자로 남았다. 광전효과를 연구하며, 그리고 그는 1927년에 그곳에서 조교수가 된다.

1928년, 로런스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물리학과 부교수가 된다, 그리고 2년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가장 젊은 정교수가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입자 가속기’ , 핵에너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나이” 라고 불리었다. “그는 ‘거대 물리학’(거대 과학) 즉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거대한 규모로 행해야 하는 일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로런스 리버모어 실험실의 첫 번째 감독인 허버트 요크가 실험실의 공식 사이트에서 말한 것을 인용했다. 로런스는 캘리포니아의 채트워스의 어니스트 로런스 중학교로 이름 붙여졌다.

로버트 고든 스프라울은 보헤미안 클럽의 멤버였다, 그리고 그는 1932년에 로런스의 회원들을 후원했다. 이 클럽을 통해, 로런스는 윌리엄 헨리 크로커, 에드윈 파울리, 그리고 존 프랜시스 네일란을 만났다. 그들은 그의 활기찬 핵 입자 조사에 돈을 얻도록 도와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입자 물리학의 발전으로 얻어지는 의학적 사용들에 큰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로런스가 획득할 수 있는 발전을 위한 초기의 많은 투자를 이끌어 냈다.

사이클로트론의 발전

로런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발명은 종이 냅킨 한 장의 스케치에서 시작한다. 어느날 밤 로런스가 도서관에 앉아있을 때, 그는 롤프 비데뢰에의 논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도표에 아주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생각은 원자적 붕괴가 요구되는 매우 높은 에너지 입자들을 매우 작은 “밀기”의 연속의 수단을 이용해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묘사된 것처럼 그 장치는 길어지는 전극을 직선 모양으로 하여 설계되었다.

로런스는 그것을 곧 너무 길어져서 그의 대학교 실험실에서 다루기 어려운 가속기로 보았다. 가속기를 좀 더 간편하게 만들 방법을 고민하다가, 전자석의 막대기 사이에 원형의 가속하는 방을 놓기로 결정했다. 그 자기장은 충전된 양전자들이 교류 전류의 전위차(퍼텐셜)에 연결된 반구의 전극 사이에 가속될 때, 나선형의 길 안에 있는 충전된 양전자들을 붙잡을 것이다. 100번 정도 돌고 난 후, 그 양전자는 고 에너지 입자의 광선으로 목표물에 충돌할 것이다. 로런스는 흥분하여 그의 동료들에게 그가 매우 높은 에너지의 입자를 높은 전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얻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다른 과학자들도 유사한 개념을 조사했었지만, 그걸 더 깊게 개발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로런스가 처음이었다.

로런스의 사이클로트론의 첫 번째 모델은 놋쇠, 전선과 납봉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직경이 4인치에 불과했다.-그것은 글자 그대로 한 손에 집혔다. 그것은 아마 전부 25달러였고 그것은 작동했다. 1931년 1월 2일, 로런스가 2,000볼트의 전기를 그의 임시의 사이클로트론에 적용했을 때, 그는 80,000 전자볼트의 주위를 도는 양전자를 얻었다(빛의 속도의 약 1%). 그의 점점 더 거대해 져가는 기계를 통하여, 로런스는 고에너지 물리학의 실험에 필요한 중대한 장비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장치 주변에, 로런스는 1930년대에 핵 물리학 연구에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되는 방사선 실험실을 지었다. 그는 1934년에 그가 연구협회에 맡겼던 사이클로트론에 대한 특허권을 받았다. 1936년에 방사선 시험실은 로런스가 공식적인 감독으로 지명됨과 함께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공식 부서가 된다. 그는 그 지위로 그가 죽을 때 까지 근무했다. 1937년에, 그는 미술/과학의 미국 아카데미의 선임연구원으로 지명된다.

1939년 11월에, 로런으는 높은 에너지를 얻는 첫 번째 입자 가속기인 사이클로트론에 대한 그의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그는 입자 가속기로 노벨상을 받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인데, 나머지 한 사람은 시몬 판 데르 미에르이다. 그가 버클리에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일 뿐만 아니라, 주립 대학교에서 나온 첫 번째 수상자였다. 노벨상 수여식은 1940년 2월 29일 제 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 캠퍼스의 윌러 홀의 강당에서 로런스가 그의 메달을 스웨덴 총영사인 칼 월러스테드에게 수여 받으며 이루어졌다.

제 2차 세계 대전과 맨해튼 계획

로런스의 실험실에서 개발된 거대한 칼루트론 시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첫 번째 원자폭탄에 사용할 우라늄을 정제하기 위해서 site X로 사용되었다.

전쟁중에 로런스는, 미국의 핵분열을 무기에 이용할 가능성 조사를 증가시키기 위해 열심히 도왔다. 그의 UC버클리의 방사선 실험실(Rad Lab)은 전쟁기간 핵 연구의 핵심 기관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로버트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에게 무엇이 곧 맨해튼 계획이 될 것인지 첫 번째로 설명해준 사람이 바로 로런스였다. 우라늄의 핵분열성인 U-235의 비율을 증가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한 전자기적 분리 방법의 초기 챔피언인 로런스는 그의 자기적 칼루트론-거대한 분광계로 전문화된 형태-을 테네시 주오크 릿지에 동위원소 분리 시설을 위해 제작한다. 어니스트 로렌스가 자기적 분리 또는 농축을 봤다는 것은 유명하다. 그리고 정부가 동시에 그리고 관대하게 결국 더 효과적으로 될 화학적 농축 기술 연구를 후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공적인 완료와 뉴멕시코 주의 트리니티 실험 구역에서 첫 번째 핵 폭탄의 실험 이후, 일본에 떨어진 기능적인 무기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의 질문이 과학자들에게 화젯거리였다. 오펜하이머가 일본 지도층에 새 무기의 힘을 보여주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반면에, 로런스는 그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증하지 않는 것은 군대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 군을 항복시키고 백만 명의 사상자가 예상되던 대량 일본 침략 계획(다운폴 작전)을 피하기 위해서 맨해튼 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했고 태평양 전쟁을 종식시켰다.

로런스의 비서 헬렌 그릭스는 1942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글렌 시보그와 결혼했다. 일리노이의 시카고에서 그들 셋은 함께 일했다.

전후 생활과 유산

전후, 로런스는 거대 과학적 프로그램들을 위한 정부의 지원을 위해 널리 캠페인을 펼쳤다. 로런스는 큰 기계와 큰 돈이 필요한 “거대 과학”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의 조국을 위한 그의 헌신으로 로렌스는 1957년 미국 원자 에너지 위원회로부터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상하고 1958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로부터 명망 있는 실바너스 테이어 상(국가 이익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의 첫 번째 수상인이 되었다.

1958년 6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로런스에게 스위스 제네바소련과 핵 무기 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을 협상하는 것을 도우러 가줄 것을 요청한다. 그의 심한 만성 대장염의 갑작스러운 재발에도 불구하고, 로런스는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에 있을 때 악화되었고, 스탠퍼드 대학교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로런스는 한 달 후, 57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 팰로앨토에서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지 23일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이사회는 대학교의 핵 연구 시설을 로런스의 이름을 따서 다시 짓기로 했다. 하나는 로런스 리버모어 연구소이고, 다른 하나는 로런스 버클리 연구실이다. 어니스트 올랜도 로런스 상은 1959년 그를 기리며 설립되었다. 1961년 LBNL에서 발견된 화학 원소 번호 103번 ‘로렌슘’은 그의 업적을 기리며 붙여졌다. 1968년 ‘로런스 과학관’이 그의 일생동안 대중의 과학에 대한 흥미, 특히 취학 아동에 대해 과학적 흥미를 끌어 올리는 것에 열정적으로 지원했던 어니스트 로런스의 업적을 기리며 설립되었다. 그 박물관은 로런스의 일생에 대한 영구적인 전시를 특색으로 한다.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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