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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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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Prince Yi Kang House.jpg|thumb|200px|사동궁 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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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Prince Yi Kang House 02.jpg|thumb|200px|사동궁 양관]]
사동궁은 의친왕 이강의 사저로 관훈동 196번지 일대에 있던 궁으로 양옥 1동과 한옥 수십동으로 구성된 대저택이었다. 1906년 사동궁에 의친왕부(義親王府)가 설치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4307022_00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B9%9C%EC%99%95%EB%B6%80|제목=민철훈을 의친왕부 총판에 임명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작성일자=1906-07-22|확인일자=2013-10-12}}</ref>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 이강이 [[일본 제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방계 혈족에 대해 규정한 신분인 공족으로 분류되어 공의 지위를 받으면서 사동궁은 ‘이강공저’(公邸)로 불리었다. 이강이 [[상하이]]로 망명하려다 실패하였던 대동단 사건의 영향으로 1930년에 강제로 은거하게 되고, 장남 이건이 뒤를 이어 공가를 세습하게 되면서 ‘이건공저’로 불리었다.
사동궁은 의친왕 이강의 사저로 관훈동 196번지 일대에 있던 궁으로 양옥 1동과 한옥 수십동으로 구성된 대저택이었다. 1906년 사동궁에 의친왕부(義親王府)가 설치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4307022_00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B9%9C%EC%99%95%EB%B6%80|제목=민철훈을 의친왕부 총판에 임명하다|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작성일자=1906-07-22|확인일자=2013-10-12}}</ref>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 이강이 [[일본 제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방계 혈족에 대해 규정한 신분인 공족으로 분류되어 공의 지위를 받으면서 사동궁은 ‘이강공저’(公邸)로 불리었다. 이강이 [[상하이]]로 망명하려다 실패하였던 대동단 사건의 영향으로 1930년에 강제로 은거하게 되고, 장남 이건이 뒤를 이어 공가를 세습하게 되면서 ‘이건공저’로 불리었다.



2014년 2월 5일 (수) 21:38 판

사동궁(寺洞宮)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96번지 일대에 있었던 대한제국 고종의 5남 의친왕의 사저이자 친왕부(親王府)이다.

역사

사동궁 양관
사동궁 양관

사동궁은 의친왕 이강의 사저로 관훈동 196번지 일대에 있던 궁으로 양옥 1동과 한옥 수십동으로 구성된 대저택이었다. 1906년 사동궁에 의친왕부(義親王府)가 설치되었다.[1]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 이강이 일본 제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방계 혈족에 대해 규정한 신분인 공족으로 분류되어 공의 지위를 받으면서 사동궁은 ‘이강공저’(公邸)로 불리었다. 이강이 상하이로 망명하려다 실패하였던 대동단 사건의 영향으로 1930년에 강제로 은거하게 되고, 장남 이건이 뒤를 이어 공가를 세습하게 되면서 ‘이건공저’로 불리었다.

의친왕은 한국기원의 모태인 한성기원이 자리를 잡지 못할 때 자신의 사위 이학진(李鶴鎭)의 주선으로 사동궁의 한옥 15칸을 기원으로 제공하였고, 사동궁에 자리를 잡으며 조선기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2][3]

1917년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따르면 사동궁은 대지가 총 7880㎡에 달하였지만 점차 축소되어가다 1947년에 민간에 불하되었다.[4][5] 그 후 사동궁 건물의 일부가 1955년부터 ‘도원’이라는 요정으로 사용되었다. 2005년 종로구청이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공영주차장을 조성하였다. 매입 당시 1950년대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옥 3채와 1970년대 이후 증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옥 2채가 있었으나 증축된 한옥은 한옥 본연의 목조구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나머지 한옥 3채의 경우도 증축, 개축, 도로 개설 등으로 일부 변형, 훼손된 상태였다. 서울시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건물 1동을 보수하여 현재 인사동 관광홍보관으로 사용 중에 있으며, 그 이외 건물은 주차장 조성 시에 철거되었다.[6]

역대 주인

  • 제1대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 1955년)
  • 제2대 이건(李鍵, 1909년 ~ 1990년)

사동궁 사손

  • 이곤(李錕, 1920년 ~ 1984년)
  • 이준(李준, 1961년 ~ )

주석

  1. 고종실록. “민철훈을 의친왕부 총판에 임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013년 10월 12일에 확인함. 
  2. 한송희 (2009년 11월 16일). “<부음> 한국 바둑계의 큰 별 이학진 옹 타계”. 엑스포츠뉴스. 2013년 10월 12일에 확인함. 
  3. 이청 (2013년 2월 20일). “(사동궁 기원) 근대와 현대 그리고 바둑 - 2”. 2013년 10월 12일에 확인함. 
  4. 박주연 (2011년 9월 20일). “<국감초점> "의친왕궁은 주차장, 日장교관사는 문화재?". 뉴시스. 2013년 10월 12일에 확인함. 
  5. 권세진 (2013년 2월). “<추적> 대한제국 皇室 재산 소송,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황실재산, 주인은 누구?”. 월간조선. 2013년 10월 12일에 확인함. 
  6. 문화재청 (2011년 11월 3일). “2011년도 국정감사 서면질의 답변서”. 2013년 10월 12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