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론:Xakyntos/201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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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xus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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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정말 확인해 볼래요? ==
== 한번 정말 확인해 볼래요? ==


정말 드러운 인간같군요..경고합니다..쫓아다니며 편집방해를 하지마시요..최치원과 천부경의 관련 내용이 수록된 책들이 만일 하나라도 밝혀진다면 어떻게 할래요? 최치원과 개천절에 관련된 책들을 님에게 확인이라도 받으면서 참조할까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는지..참 이해가 안되네요..
정말 드러운 인간같군요..경고합니다..쫓아다니며 편집방해를 하지마시요..최치원과 천부경의 관련 내용이 수록된 책들이 만일 하나라도 밝혀진다면 어떻게 할래요? 최치원과 개천절에 관련된 책들을 님에게 확인이라도 받으면서 참조할까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는지..참 이해가 안되네요.. [[사용자:Lexus|진실탐구]] ([[사용자토론:Lexus|토론]]) 2013년 8월 27일 (화) 16:55 (KST)

2013년 8월 27일 (화) 16:55 판

소수설, 다수설의 문제가 아닌 편견 때문

주석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견해가 포함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위키백과가 다수의결의 결정으로 이루워지는 편집도 아니고 지금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반달에 해당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하는 것은 지나친 행동이고 반성없이 계속 반복하는 것은 이곳 편집자분들에게 해악과 민폐를 주고 있는 행위입니다.

지금까지 제3자로 지켜본 바로는 아사달(Asadal)님같은 서울대 출신과 Xakyntos님같은 국민대 출신의 역사를 보는 가치관의 차이에 비롯된 주장과 행위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도가 지나친 것같았습니다. 님이 대단한 역사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묘히 이곳 위키백과의 일부 관리자힘을 빌려서 되돌림과 삭제가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님이 자신의 개인문서에서도 밝혔듯이 재야사학과 정통사학의 구분조차 제대로 인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병적으로 편협된 편집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토론문서를 보면서 관리자같지 않은 편협된 관리(반복된 되돌림과 공격성 토론)로 인하여 수많은 편집자들이 스스로 편집의 의욕을 접는 사례를 보면서 안타까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키백과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 생각되어 편집자 한사람으로 자중을 권고합니다. 자중하세요. Lexus (토론) 2013년 2월 5일 (화) 20:34 (KST)[답변]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십니다. 특정 학벌의 가치관 차이와는 전혀 무관한 문제입니다. Lexus 님께서 하신 편집의 대부분은 일개 신문기사에 실린 비전문가의 주장입니다. 애초에 학계의 검토를 받는 주장 수준 자체가 아닙니다.' 이러한 비전문가의 주장이 문서의 중심인 것처럼 서술되는 것은 위키백과의 원칙 자체에 위배됩니다. 원칙에 위배되는 내용을 수정하고 지적하는 일은 반달 행위가 아닙니다. 입장을 똑바로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중하셔야 할 분은 제가 아니라 Lexus 님이십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2월 5일 (화) 21:31 (KST)[답변]

더이상 대꾸할 가치를 못느끼지만 끝으로 한마디만 남깁니다. 전문가, 비전문가를 나누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재야사학이 비전문가고 정통사학이라는 것이 전문가란 말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관과 인식의 차이일뿐 위키백과의 원칙에도 하등의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원칙은 지금 몇몇 관리자들이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관점일뿐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패거리 정치라는 말도 있듯이 이곳 위키백과의 편집성향도 다를 것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특히 역사관 차이에서는 몇몇 사람들의 병적인 알레르기같은 감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누구와 뜻이 맞고 누구를 추종하든 상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편협된 행동으로 인하여 다른 편집자들에게 해악과 민폐를 주고 있다는 것, 또한 Xakyntos님의 개인문서에 밝힌 내용처럼 수십번 읽어도 이해할 수 없고 전혀 사관정립이 안되어 감정만 내세운 모습만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제발 역사관을 제대로 인식하고 자숙하기를 권합니다. 자신과 위키백과에도 전혀 도움이 안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6일 (수) 10:09 (KST)[답변]

역사와 신화의 구별

윗 문단에 제 사용자명이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Xakyntos 님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항상 부러워하고 있으며, 또한 Lexus 님의 위키백과에 대한 열정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위에 두 분의 의견이 서로 많이 다른 듯 하여, 제 의견을 남깁니다.

  1. 역사와 신화는 구별해야 합니다. 비록 삼국유사는 역사 서적이지만,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 환웅, 천부인, 태백산, 신단수, 웅녀 등은 '신화'의 내용이지 역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 신화로서 그 역사적 가치는 있지만, 그 내용 자체가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2. 위키백과는 역사 사전이 아니며, 신화의 내용도 수록할 수 있습니다. 위키백과는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루는 백과사전입니다. 백과사전에는 역사뿐 아니라, 종교, 철학, 과학, 경제, 연예, 스포츠, 게임 등 다양한 내용이 모두 수록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Lexus 님이 단군신화에 관한 내용을 올리는 경우, 혹은 전설이나 민간 신앙 혹은 원시 종교적인 내용을 올리는 경우, 그것에 대해서 첫째, 그것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둘째 역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삭제하거나 축소 편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 아폴로 이야기에 대해 그 누구도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문서를 삭제하지도 않습니다. 신화는 신화 자체로서 소중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지, 역사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중국의 삼황오제 전설 역시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위키백과에 수록될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에 대해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삭제하자고 해서도 안 됩니다. 종교는 그 자체로서 소중한 의미가 있고 백과사전에 수록될 가치가 있으며, 과학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단군신화와 관련된 신단수 등의 문서에 대한 Lexus 님의 편집은 상당히 소중한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하며, 단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삭제하거나 축소하는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반대로 이런 신화적 기록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제 의견이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3년 2월 6일 (수) 19:57 (KST)[답변]

역사적 사실 여부가 문제가 아닙니다. 해당 내용들은 명백한 비전문가의 사견입니다. 역사학이든 신화학이든 간에 학문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해석한 전문가의 견해보다 저러한 비전문가의 사견이 우선시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문서의 내용과 분량이 아무리 상세하고 많다고 해도, 그것이 학문적 방법론에 입각하지 않은 비전문가의 사견일 뿐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견해도 있다는 언급 이상은 해서는 안되는 것이 위키백과의 원칙입니다. 소중한 가치를 따지려면 그 내용이 정말 소중한가를 검토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Lexus님의 편집 내용이 학문적 방법론에 입각한 신화학자의 해석이라면 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내용은 학문적 방법론에 입각해 있지도 않고, 심지어 사회적 저명성을 가진 공인된 출처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은 위키백과에서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이 원칙이며, 위키백과의 존재의의입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2월 6일 (수) 22:55 (KST)[답변]

아사달(Asadal)님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 매우 중립적이라는 평소의 생각에 잠시 언급하였는데 깜짝 놀라셨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이제 좀 해명아닌 해명을 해보겠습니다. 여기서 Xakyntos님이 주장하는 비전문가, 전문가의 구분은 매우 애매한 구별에 불과할 뿐이라는 저의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나누는 잣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 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윤내현, 최광식, 윤명철, 서영수, 이덕일, 우실하, 서영대, 심백강, 복기대 등등 여러 분들은 대학에서 역사학를 가르치셨고 전공으로 정식 박사학위까지 받은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오래전부터 단군신화의 신화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였고 몇분들은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확신하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을 '전문가', '비전문가'로 구분한다는 자체가 넌센스일 것입니다. Xakyntos님이 30대 초반으로 알고 있는데 이분들의 논증을 무시하는 편집들이 문서 곳곳에서 발견되는 현실을 보면서 추적해보았더니 유독 상고사만을 남다른 감정의 칼날을 세우며 Xakyntos님이 문서 곳곳에 대못을 쳐놓은 느낌들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회적 저명성에 따른 구분을 둔다는 것이 얼마나 허울좋은 허망한 얘기인지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나간 많은 편집자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여러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편집의 변화는 없었던거구요. 나중에 살펴보니 그것을 소명으로 하고 있다고 개인문서에 적어 놓았더군요. 이렇듯이 자신의 편집에 대한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으니 무한 반복의 토론은 이어지는 것이고 출구없는 피로감에 결국 지친 편집자들이 편집의 의욕을 접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태클을 걸어 시비를 만들고 그것을 다수설, 소수설로 구분하여 삭제하고 자신이 인정하는 사회적 저명성을 따져 또다시 삭제하는 무한 반복이 되풀이 되는 것은 그런 의미로 느꼈던 소감입니다. 그리고 출구가 없는 무한 반복의 논쟁거리가 얼마나 편집의 기여도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지 당한 사람만이 아는 느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위키백과에서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이 원칙이며, 위키백과의 존재의의라고 밝히고 있군요. 엄단주의자로써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정한 원칙이란 것입니까? 위키백과의 원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일까요? 위키백과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며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다언어판 인터넷 백과사전라는 것을 잊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Xakyntos님이 편집의 원칙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 끝으로 신화가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위키백과에 수록될 충분한 가치라고 일깨워 주신 아사달(Asadal)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9일 (토) 06:47 (KST)[답변]

상고사에 대한 관점과 병적인 편집태도

하나의 예를 한번 들어보지요.

환단고기에 대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했다는 한국상고사를 서술한 역사책라고 명시해놓고 '≪환단고기≫ 범례에 의하면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가 1911년에 ≪삼성기 三聖紀≫·≪단군세기 檀君世紀≫·≪북부여기 北夫餘紀≫·≪태백일사 太白逸史≫ 등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묶은 다음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고 묘향산 단굴암에서 필사한 뒤 인쇄했다고 한다...(이하 생략)'라고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두산백과에서는 한국 상고사에 대한 책이라고 명시하고 '≪한단고기≫라고도 한다. 한국 상고사에 대한 책으로서 최근에 출판된 책이다. 이 책의 소개서에 의하면, 환단고기는 1911년에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하였다고 한다. 책의 내용은 네 가지 사서, 즉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記), 태백일사(太白一史)를 하나로 묶어 편찬한 것이다. 한국사의 상고 및 고대의 역사, 신앙, 풍습, 정치, 경제, 예술, 철학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이하 생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키백과에서는 《환단고기》(桓檀古記)는 1979년에 출간된 책으로, 한국의 고대 역사를 서술한 책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로 판단하고 있다...(이하 생략)'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느껴집니까? 위키백과에서는 ...역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로 판단하고 있다...를 강조함으로서 누가 봐도 감정적이며 주관적인 태도로 편집하였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님같은 편집자들이 되돌림과 삭제반복하면서 편견에 맞는 내용을 편집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소수설, 다수설의 문제가 아닌 편견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편집태도가 여러 편집자들에게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Xakyntos님이 기여한 문서에는 거의 이런 편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백과에서 볼 수 없는 태도이고 편집자세라는 것입니다. 님이 봐도 내용이 확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이번 편집에서도 명분은 전문가, 비전문가라고 얘기하지만 사학자로써 박사학위까지 받은 분들조차 제도권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습을 여러번 봐왔기에 주석란에 견해가 있다는 내용만을 올려놓았는데 여지없이 되돌림과 삭제를 당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님이 비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의 견해로 주석에 달아놓는 것마저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가 바로 잘못된 편견이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로도가 많아 태도나 자세가 어떠하든 이제 더이상 답글을 달지 않겠습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6일 (수) 21:53 (KST)[답변]

*즉 이 책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검토하는 일이 필요해지는데, 이에 대한 시각은 그 내용을 수용하는 태도와 비판적 태도, 예컨대 위서(僞書)로 간주하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이 책을 위서로 간주하는 논자들의 입론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독자들은 애국적 저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책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중략) 이런 논쟁은 역사적 사실(史實 historical fact)의 진위여부와 함께 앞으로 더 고찰하여야 할 부분이다. - 두산백과
타 백과사전을 인용하려면 똑바로 하셨으면 합니다. 위 인용문에서 보시다시피 두 백과사전 모두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에 대해 명백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아예 진서론자의 입장에 대한 서술 자체가 없고, 두산백과는 신봉자의 존재를 언급한 뒤 신중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확연히 다르다고 하셨습니까? 제가 보기에 차이는 크지 않은데 말이죠.
그리고 명백한 사실이 분명한 학계에서 위서로 보고 있다는 것을 서술하는게 도대체 왜 문제가 됩니까? 저 언급이 싫다면 학계라는 사회적 저명성이 높은 공인된 출처를 통해 위서론이 대세가 아님을 입증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어쩌죠? 학계의 대세는 위서론인걸요. 게다가 진서론자의 주장도 모두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마당에 도대체 왜 저 내용이 문제가 된단 말인지 저는 오히려 Lexus님께 궁금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자중하셔야 할 분은 Lexus님 본인이십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2월 6일 (수) 22:45 (KST)[답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과 강조단정으로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된 서술을 구분도 못합니까? 초등학생도 아니고 편집자들이 님보다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역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로 판단하고 있다...(위키백과)라고 하는 단정형 서술이에 대한 시각은 그 내용을 수용하는 태도와 비판적 태도, 예컨대 위서(僞書)로 간주하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이 책을 위서로 간주하는 논자들의 입론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또는 이런 논쟁은 역사적 사실(史實 historical fact)의 진위여부와 함께 앞으로 더 고찰하여야 할 부분이다.(두산백과)라고 하는 열거형 서술을 같다고 보는 그 자체가 잘못된 역사관, 편집자세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갖고 있는 역사관만이 옳다고 보는 자세가 독선이고 편견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자꾸 말의 요점을 다른 방향으로 일반화하여 희석시키려 하고 있군요. 그리고 사회적 저명성이라면 님의 잣대로 보는 저명성을 얘기하는 겁니까? 결국 님이 인정하지 않는 저명성이라면 출구가 없는 무한 반복의 논쟁거리에 불과한 것이지요. 태클을 걸어 시비를 만들고 그것을 다수설, 소수설로 구분하여 삭제하고 자신이 인정하는 사회적 저명성을 따져 또다시 삭제하는 무한 반복이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왜 수많은 편집자들이 봉사의 마음을 갖고 편집하고자 하는 의욕을 묘한 기분으로 만듭니까? 이 위키백과가 님소유의 백과입니까? 그것이 편집의 방침이라고요? 다른 편집자의 견해를 무시하는 것이 어떻게 편집의 방침입니까? 누가 님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해주었다는 말입니까? 다른 편집자와 비교되는 모습이 아닙니까? 그것을 이사용자는 엄단주의자입니다라는 말로 핑계와 변명이 되는 겁니까? 이러한 변명아닌 변명은 대화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만 아직도 수용하지 않고 계속 이해하지 못하니 더이상의 논쟁은 피로도만 높일 것같아 이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7일 (목) 06:03 (KST)[답변]

두 분 토론중에 잠시 참견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환단고기 항목을 살펴보았습니다.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학계에서는 20세기 이후에 조작된 위서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라는 표현이 있고, 표현의 근거로 김상호, 박광용, 이도학, 이순근, 이상시, 조인성, 문혁 등의 논문이 제시되었습니다. 렉서스님은 이것이 단정적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사실 그 앞 문장에 "1985년 이후로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재야사학가들이 옛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주장하기도 하였으나"라는 부분도 있다는 점에서 현재 환단고기 항목은 읽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선택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세부 항목에서도 xakyntos님 말씀처럼 진서론 입장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독선과 편견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글을 남깁니다. adidas (토론) 2013년 2월 7일 (목) 19:13 (KST)[답변]

《환단고기》(桓檀古記)는 1979년에 출간된 책으로, 한국의 고대 역사를 서술한 책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로 판단하고 있다. 옛부터 전해져 왔다는 4권의 고서(古書)를 엮은 형식이며 한민족 또는 동이족이 오랜 역사와 넓은 영토를 가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처음 소개된 이후로 기존의 역사의 틀과 구별되는 내용으로 일본에서 주목을 받았고, 1985년 이후로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재야사학가들이 옛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학계에서는 20세기 이후에 조작된 위서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위키백과, 이하생락)

위의 내용중에서 역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僞書)로 판단하고 있다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학계에서는 20세기 이후에 조작된 위서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라는 내용이 단정형 표현(서술)이라는 얘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두산백과의 표현(서술)과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위키백과위서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라는 표현과 이런 논쟁은 역사적 사실(史實 historical fact)의 진위여부와 함께 앞으로 더 고찰하여야 할 부분이다.(두산백과)라는 표현이 설마 같다고 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것은 마치 송호정 교수의 『단군, 만들어진 신화』라는 책에서 읽혀지는 표현(서술)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신화는 신화일뿐 신화적 가치마저 무시하는 것은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역사학계 사람들의 독선편견 그리고 아집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여기서 확대논쟁으로 이어질 것같아 여기서 차단코자 합니다. 이처럼 아직도 역사학계의 논쟁들이 내재되어 있어 상고사의 많은 부분에서 이곳 위키백과처럼 병적인 현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로든 다른 백과의 서술처럼 최소한 편집자의 생각이 반영된 단정형이 아닌 열거형(나열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본문'이 아닌 '주석'란은 여러가지 논증들을 참고나 참조할 수 있도록 뉴스나 책자들의 인용에 개방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지요.

adidas님은 환단고기의 지나간 토론란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Xakyntos님을 두둔하거나 추종하는 모습이던데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표현을 써서 뭐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생각에 출구가 없는 무한 반복의 논쟁거리로 이어질 것같아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이런 논쟁은 객관적인 생각들이 있는 분들과 나누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오해없길 바랍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8일 (금) 09:06 (KST)[답변]

Lexus님께서 해당 내용들을 단순 나열식으로 바꾸시고자 하신다면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학계의 통일적인 의견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하시면 됩니다. 학계라는 사회적 저명성을 갖춘 공인된 출처에서 위서론을 지배적 견해로 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위키백과의 정책은 사회적 저명성에 따른 비중의 차등을 둘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회적 저명성을 갖춘 내용이 중심이 되고, 소수설은 존재 여부만 밝히는 나열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비중의 차등이라 함은 소수설이 다수설을 반박하기 위해 막대한 분량의 증명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싣는 것을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설이 하는 주장의 핵심만 전달하고, 필요한 증명 과정은 링크나 출처를 통해 확인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주석에 천문학적인 증명 과정을 싣는 일도 옳지 않습니다. 주석은 출처를 밝히거나, 말 그대로 참고가 될 내용을 서술하는 공간입니다. 주석에 막대한 분량의 내용을 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말슴하신대로 여러가지 논증을 주석에 싣고 싶으시다면 책이나 뉴스의 출처만 실으십시오. 왜 쓸데없이 책이나 뉴스의 내용을 직접 인용해서 다수설의 비중을 상대적으로 떨어뜨리는 비중립적 편집을 용납해야 합니까? 논증 과정은 관심 있는 사람이 출처를 통해 찾아 보는 것으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위키백과의 원칙인 중립성을 지키는 길입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2월 8일 (금) 13:30 (KST)[답변]

이해를 안하는 겁니까? 처음부터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겁니까? 이미 예견하였듯이 출구가 없는 무한 반복의 논쟁거리로 이어지는 것같아 최종 편집을 해보겠습니다. 사회적 저명성은 누구의 잣대로 나누는 것이지요? 결국 님같은 몇몇 사람들의 생각에 좌우되는 게 아닌가요? 그리고 사회적 저명성을 인정했기에 각각 본문에 내용을 담는 거고 다른 견해도 있다는 것을 주석으로 달아놓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위키백과의 원칙인 중립성을 지키는 것도 이래야 되는 거구요. 예로든 환단고기는 위서의 비중을 70%라면 진서의 비중을 30%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예시하는 거고 다른 백과같이 50%대 50%로 보여지는 편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겁니다.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한 자유롭게 편집이 되어야 하는데 유독 대한민국의 상고사만은 그런 모습이 아니어서 편집기여를 추적하다보니 님같은 편집자를 접하게 되는 겁니다. Xakyntos님이 다른 편집자와 다르다는 것을 아직도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위키백과의 편집 참여자로 느낀 소감을 이렇게 남겨보는 것입니다. 모두 환단고기의 격렬했던 토론을 보고 간접적으로 알게된 내용들입니다. 더이상 확대해석을 하지 않길 바랍니다. 끝으로 한번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시길 진심으로 빌어봅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8일 (금) 16:50 (KST)[답변]

다른 견해가 있다는 걸 싣지 말라고 한 적 자체가 없습니다. 문제는 다른 견해, 즉 소수설을 실을 때는 다수설과 명백하게 차등을 두어서 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석이 뭔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주석은 부가적인 설명이나 출처를 싣는 공간이지, 소수설의 내용을 싣는 공간이 아닙니다. 삼한에 제가 해 놓은 편집을 보십시오. Lexus님께서는 명백히 특정한 주장을 담고 있는 내용을 주석에다 써 놓으셨습니다. 게다가 그 주석이 붙은 부분과 주석의 내용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들 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그러한 내용은 주석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저는 해당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본문의 하단으로 옮기고, 해당 출처를 주석으로 달았던 것입니다. 대체 어떤 것이 올바른 편집입니까?--Xakyntos (토론) 2013년 2월 9일 (토) 01:28 (KST)[답변]
제가 Xakyntos님의 입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것이, Xakyntos님이 출처없는 편집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위키백과는 두산동아백과사전이 아닙니다. 두산동아백과사전과 같은 내용일 이유도 없고요. 환단고기 위서론 진서론이 50:50이라고 볼만한 근거를 렉서스님을 비롯해 환단고기 진서론자들이 한가지라도 제시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저도 의견을 바꿨겠죠. 교과서에 진화론과 창조론을 5:5로 실어야 한다는 주장과 환단고기 진서론 위서론을 5:5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adidas (토론) 2013년 2월 10일 (일) 23:52 (KST)[답변]

Xakyntos님의 상고사 편집에 대한 병적인 태도를 지적하는 이유

Xakyntos님의 상고사 편집에 대한 병적인 태도를 지적하는 까닭은 사학자 송호정의 '단군 만들어진 신화'로 보는 주장과 거의 같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님이 언급한 예처럼 우리가 그 시대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론이 맞는지, 진화론이 맞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환단고기여러가지 역사서가 합본되어 나왔기 때문에 진서와 위서로 나누어 주장이 다르게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님이 '맞선다는 표현이 틀리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소수의 의견이라도 진서로 보는 역사학자도 있기때문에 본인은 열거형 편집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송호정의 '단군 만들어진 신화'로 보는 주장도 단정형의 서술이기에 많은 사학자들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박사학위까지 받은 전문성을 인정받은 학자들의 견해이니 그분들의 주장도 존중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님이 위키백과 공동체 총의를 얘기하지만 그것도 다수결의 원칙에 의거한 다수인의 횡포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문서는 대통령같은 책임자를 선출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의견이 전체를 대변할 이유가 없는 열거형 문서여야 합니다. 그것이 위키백과가 천명하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며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다언어판 인터넷 백과사전이다”라는 의지에 부합하는 편집의 태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꾸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보는 것이 독선이고 아집이라는 얘기지요. 왜 어떤 사실에 단정적으로 자신의 사관과 주의,주장을 반영해야하는지 그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발 출구없는 반복된 토론이 봉사의 마음을 갖고 이곳에서 편집에 기여하고자 하는 순수 편집자에게 얼마나 많이 지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는지 이해하길 바랍니다. 그것이 위키백과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글로벌 백과사전으로 거듭나는 일에 일조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Lexus (토론) 2013년 2월 18일 (월) 10:39 (KST)[답변]

기자동래설

안녕하세요. Xakyntos님!! 사용자:Kangyg99가 27일에 기여한 기자동래설 문서와 관련하여 문의드립니다. 기존 문서는 기자 (고조선) 문서로 넘겨주기가 되어 있었는데 사용자:Kangyg99가 이를 독립 문서로 내용을 채웠습니다. 해당 내용을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천리주단기 (토론) 2013년 2월 27일 (수) 17:10 (KST)[답변]

내용의 검토 자체가 불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 내용은 기자조선의 내용을 그냥 복사한 것입니다. 비교해보니 첫줄 빼고는 똑같습니다. 세 번 편집을 했는데, 첫 번째 편집은 기자 (고조선) 문서를 복사한 것이고, 두 번째 편집은 기자조선을 복사한 것이네요. 기자동래설 문서가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그냥 기자 (고조선) 문서로 넘겨주는 원래 형태로 되돌리는 게 더 낫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2월 27일 (수) 18:23 (KST)[답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리주단기 (토론) 2013년 2월 27일 (수) 21:14 (KST)[답변]

저작권 지적에 대해서

해당 기사에 실린 정보나 사실들이 언론매체의 정형적이고 간결한 문체와 표현 형식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에는 해당 기사 및 사진을 복제하였다고 하더라도 저작권법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법원의 입장입니다.(대법원 2006. 9. 14. 선고 2004도5350 판결)

문서의 편집은 어디까지나 기여자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출처가 미흡하거나 편집의 잘못이 발견되었다면 그때 그때 직접 수정하거나 보완,보정해주세요. 편집의 기여자로서 하고싶은 얘기는 편집하는 문서가 개인 것도 아닌 전세계인 모두가 볼 수 있는 문서이기 때문에 어느분이 참여하여 기여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문서의 결재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허가나 허락, 승인, 용인, 용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관리자는 관리하는 차원에서 옳은 방향으로 나가도록 인도하거나 안내하면 그뿐입니다. 관리자와는 달리 편집기여자는 모두가 시험을 보거나 절차를 거쳐서 검증된 분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그저 봉사하는 차원으로 참여하여 충실할 뿐입니다. 이곳에서 줄곧 얘기하였지만 더이상의 확대해석은 사양합니다. 아무쪼록 이해를 바랍니다.

위에 분명히 대법원 판결에도 나와 있듯이 해당 기사에 실린 정보나 사실들이 언론매체의 정형적이고 간결한 문체와 표현 형식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에는 해당 기사 및 사진을 복제하였다고 하더라도 저작권법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법원의 입장을 예시하여 주었는데 무슨 다른 얘기가 필요합니까? 지적해주는 것은 좋으나 정도껏 하세요. 님도 편집기여자 한사람에 불과할뿐이니 단죄나 허락, 허가, 승인, 용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 마음에 안들면 삭제하면 되고 더이상의 시비는 없길 정중히 경고합니다. Lexus (토론) 2013년 3월 6일 (수) 18:36 (KST)[답변]

저작권 문제는 해석나름이고 이해하기 나름입니다. 남의 잘못만 눈에 띄고 자신의 잘못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좋을텐데 곳곳마다 시비를 만들며 저작권 운운하지말고 직접 보정,보완하여 주세요. 그것이 위키백과에 더 어울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으면 독자연구, 다른 사람의 글을 복사해 놓으면 저작권 침해, 적당히 짜집기 해놓으면 출처요구, 참 어렵습니다. 그만합시다. 그정도하면 알았으니 더이상 토론은 사양합니다. Lexus (토론) 2013년 3월 6일 (수) 20:08 (KST)[답변]

진국이 고조선?

진국이 틀 한국사에 보면 고조선에 포함되어 있네요? 아시는 것이라도 있는지요?--18호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11 (KST)[답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진국은 엄연히 고조선과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만?--Xakyntos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13 (KST)[답변]
틀 한국사에 보면 고조선 줄 밑에 진국이 있습니다.--18호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14 (KST)[답변]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대략적인 연대를 기준으로 고조선보다 늦게 건국된 국가인데 대체 왜 이렇게 그려진 게 문제인가요? 제가 보기에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만.--Xakyntos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16 (KST)[답변]

그림에서 마치 진국이 고조선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18호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20 (KST)[답변]

그렇게 따지면 그 밑에 부여니 옥저니 하는 나라들도 다 고조선에 포함되어 있었던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만. 그냥 그림상의 표현 문제일 뿐입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30 (KST)[답변]
그림 상의 표현을 다른 사람들이 보아도 진국이 고조선의 후예처럼 느껴지는 것은 고쳐야 되지 않을까요? 저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가;;--18호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32 (KST)[답변]
제가 보기에는 귀하의 느낌일 뿐인 것 같습니다만. 엄밀히 따지자면 진국 위칸에 고조선이 있는 것은 오류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34 (KST)[답변]
진국 문서에서 맨 하단에 한국의 역사를 기여할때에 틀 한국사를 보고 참조했거던요 그런데 삭제 당했음. --18호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37 (KST)[답변]
일단 연대에 맞도록 수정했습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0:39 (KST)[답변]
우와.. 어떻게 수정했는지요? 저도 수정할려고 해도 잘안되던데. 아뭇튼 고생하셨습니다. --18호 (토론) 2013년 5월 27일 (월) 01:29 (KST)[답변]

을미사변 당시 민비 생존설

을미사변 문서 내용에 다음과 같은 문단[1]을 덧대기 했습니다. 이 기사를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정상수라는 분이 사학계에서 어떤 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보기에는 그럴듯한 내용으로 보입니다. 일전에는 을미사변 민비 생존설이 없었는지도 궁금하고요. 아는 부분이 있다면 내용 보충을 부탁드립니다. adidas (토론) 2013년 7월 1일 (월) 13:59 (KST)[답변]

두 번째 주석의 기사 하단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존에도 풍문으로 전해지던 민비의 생존설이 있었다고 하네요.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만, 지금 하신 편집 정도면 무난하다고 생각됩니다 --Xakyntos (토론) 2013년 7월 1일 (월) 21:05 (KST)[답변]

또 시작입니까?

가짜라는 것은 없는 얘기를 하는 거겠지요.. 삼국유사의 기록상을 언급하면서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조, 추정하여 B.C 2333 ~ B.C 238라는 년도를 제시했을 뿐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단군조선기자조선이 병존했던 사실을 기록해 주었기 때문이지요..왜 곳곳마다 사관이 다른다는 이유로 삭제해야 되지요? 현재도 정확한 년도의 기록도 남기지 않는데 당시의 년도의 기록이 정확하게 명시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2:10 (KST)[답변]

황룡국은 지금의 평안도 용강(龍岡)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려 때 용강성 또는 군악(軍岳)으로도 불렸다.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조차 의주로 보기도 하였다. 용강이 고구려 옛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며, 국내성이 좀더 북쪽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옛 서울은 국내성보다 남쪽, 성천의 서쪽 어딘가에 있었다.



‘황룡국/용강’은 중세 말 ‘미르’(龍)와 고구려말 ‘갑’(岳)으로 보면 ‘미르갑’이었다. 족보들을 보면, 황룡국 왕족은 후조선의 후예인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다. 고구려 해명태자의 허망한 죽음을 충효 관점이 아닌 단군조선 후예와 기자조선 후예 사이의 자존심 대결로 보는 해석도 있다.

모두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자간에도 해명태자 설화에 나오듯 위같은 견해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요..그 대체적으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조하여 년도를 집어넣었던 거구요..정확한 년도가 없어 참조하여 기술한 거고..정확한 사실을 기술한 것도 아니고 대체적의 견해라는 그렇다는 것인데 경고라니 님이 무슨 권한으로 그리 말하는 것이지요?..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2:23 (KST)[답변]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들이 피난해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거처하는 마을을 사탁(沙涿)이나 점탁(漸涿) 등으로 불렀다.” 신라인들의 방언에 탁(涿)을 읽을 때 도(道)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고 쓰고, 량(粱)을 도(道)라고 읽었다.



단군조선이 기원전(B.C) 238년경(환단고기로 임의로 추정함)에 멸망하면서 72국으로 흩어져 살았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第一卷, 제1기이(第一紀異) 72국(七十二國), 조선의 유민들이 70여 국으로 나뉘다)의 기록과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서한(西漢)은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뒤에는 2부를 두었는데, 법령이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갈라져 78국으로 나뉘고 각각 1만 호씩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에 의거 연나라에 살던 단군조선의 유민으로 추정된다.

위의 내용은 신라 말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경주 사량부의 사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하면서 옛날 진한(辰韓)의 땅에는 6촌(六村)이 있었다고 전하였지요..위와같이 기록에도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2:34 (KST)[답변]

귀하께서는 《환단고기》를 출처로 달지 않았습니다. 귀하께서 다신 출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책이었죠. 하지만 해당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이게 가짜 출처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 가짜 출처입니까? 가짜 출처를 다는 행위는 중대한 위키백과의 원칙 위반입니다. 당연히 경고해야 할 사안입니다. 게다가 위키백과는 사용자들이 만들어가는 곳이기에 누구나 잘못된 행위에 대해 경고하고 징계를 요청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역시 위키백과의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체 위키백과를 무엇으로 알고 계십니까?
또한 지금도 계속 검토중인데, 여전히 제가 지적했던 사항은 계속 반복되고 있군요. 몇 번이나 경고했다시피, 위키백과는 다수설과 소수설에 대해 명백하게 차등을 두어 서술할 것을 원칙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귀하의 편집은 소수설로서 이러한 주장도 있다는 수준 이상으로 서술되어서는 안됩니다. 게다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애초에 소수설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어요. 본 항목의 주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구요. 그게 소수설인지 다수설인지를 따질 게제조차 없이 그냥 삭제대상이 될 뿐입니다. 아니면 그 내용이 본 항목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증명해보세요. 신시 항목에서 편집 요약란에 썼다시피, 출처랍시고 단 신문기사에는 신시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조차 않습니다. 말 그대로 쓸모없는 내용이에요. 대체 왜 이딴 내용을 넣어서 쓸데없이 분량만 늘려야 한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소수설의 편집에는 주의해 주시고, 문서의 주제를 좀 숙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3:07 (KST)[답변]
동북아역사재단의 책속에는 위만 망명 내용을 비롯하여 고조선의 분류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언급한 것을 참조했을 뿐입니다. 위에 이미 출처로 제공된 사실에 별도로 언급을 생략했을 뿐인데 단어나 문장하나마다 출처가 필요하다는 얘기인지라 이미 환단고기의 기록을 참조했다는 것은 문서 수독자의 해석하기 나름이 아닌가요? 참 님은 여러가지로 까다롭고 자신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군요..그래서 님과 사관이 다른 편집자에게 다양한 방법의 시비외에는 달리 해석하지 않고 있습니다..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3:35 (KST)[답변]
어떤 역사라도 해석에 따라 다양한 의견을 나올 수도 있고 논란도 생겨날 수 있는데 님은 고작하는 일이 대학에서 배운 그 알량한 역사지식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사관이나 역사관에 맞춰 감시나 시비, 되돌림과 삭제밖에 할 수 없습니까? 님의 사관이나 주의, 견해에 맞춰 여기 위키백과의 편집자들이 단어나 문장, 하나하나마다 정확한 출처를 제시해야 하나요? 다수설과 소수설에 대해 논쟁에 대한 어떤 결론도 없이 대체 님이 위키백과에서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무뢰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가요? 참 어이가 없군요..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4:35 (KST)[답변]
귀하께서 단 출처에 해당 내용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게 도대체 왜 자신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역사관입니까? 없는 걸 없다고 지적하는게 도대체 무슨 잘못인가요? 귀하야말로 학계에서 인정받지도 못하는 소수설을 과도하게 신봉하는 편향된 역사관을 가졌다는 사실은 왜 무시하십니까? 귀하의 주장은 명백한 소수설이고, 소수설에 대해서 위키백과는 공식적인 정책으로 아래와 같이 제한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시각들을 다루는 비중은 각각의 중요도에 따라야 합니다. 문서의 구성이나 설명에서 소수 의견이 다수 의견보다 두드러져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저명성의 기준에 따른 적절한 비중 하에 관점들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정책과 지침을 충족하여 기술하였더라도 일부의 시각만이 과도하게 반영된 경우에는 다른 방향의 관점의 내용이 균형있게 보태지기 전에는 중립적 시각의 위배가 될 수 있습니다.

출처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적절해야 합니다. 즉, 대단한 주장에는 대단한 출처가 필요합니다.

다수설과 소수설에 대한 논쟁 자체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위키백과의 공식적인 정책이 저러하니까요. 귀하께서 논쟁을 불러일으켜 저 정책을 고치는데 성공하신다면야 저도 귀하의 편집에 아무런 태클도 달지 못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아니시잖습니까? 애초에 귀하께서 말씀하시는 소수설의 권리(?)는 논쟁감조차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사랑방에라도 논의의 장을 열어 보십시오. 귀하께서 위키백과 사용자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신다면 저 정책을 고치게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면 제 지적을 수용하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4:57 (KST)[답변]


방금 고조선 문서에 달았던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귀하께서 다신 내용은 저 책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더군요. 앞서 지적한 연도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해당 연도 문제만으로도 명백한 가짜 출처에 해당합니다. 《환단고기》에 근거하지 않는 한 기자조선과의 공존 884년이라는 연도는 아예 나올 수조차 없으니까요. 당연히 위 책에는 저 내용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당 책을 과연 읽기는 하셨습니까?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내용에 대해서 왜 저 책을 출처로 다셨습니까? 확실하게 해명하지 않으시면 징계를 요청하겠습니다.

여보세요? 추정되는 년대를 참고하여 계산도 못합니까? 환단고기에 나온 내용에 병존(공존)을 증명하는 삼국유사의 내용이 분명하거늘..《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의 내용은 단군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존재를 참고 했을뿐이라고 분명히 밝혔는데 뭐가 가짜출처라는 건가요? 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5:15 (KST)[답변]
네. 계산하면 안됩니다. 그건 귀하의 독자연구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귀하는 분명 출처랍시고 저 내용을 달았어요. 하지만 해당 출처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명백한 가짜출처입니다. 계속 이렇게 답변하신다면 징계를 요청하겠습니다. 귀하의 생각대로 가짜출처가 아니라면, 징계가 기각되겠지요. 어디 한 번 봅시다.--Xakyntos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5:23 (KST)[답변]

『삼국유사』에서 기자가 동래(東來)하자 단군이 옮겨간 곳으로 황해도 문화현 근방으로 비정된다고 한다. 무왕이 즉위한 해(BC 1046년 무렵)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삼국유사)

위의 내용과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에 수록된 단군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존재의 인정을 참고하여 계산을 했고 이미 환단고기의 기록이 참고가 되었기 때문에 출처제공은 불필요했던 거지요..참 시비도 가지가지합니다..님의 사관에 맞춰 마음대로 하세요..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19일 (월) 15:29 (KST)[답변]

동북아역사재단의 구성원조차 다양한 의견이 있기에 서영수 교수의 내용과 '이청규 교수의 견해대로 전기 고조선(단군조선), 후기 고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의 존재를 참조했다는 것을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의 목차만을 읽어봐도 분명히 나오거늘 그 추종하는 송호정의 실증사관에 묶여 가짜출처로 몰아대고 있는가요? 삼국유사에서는 전기 고조선(단군조선), 후기 고조선(기자조선)이 공존(병존)하는 것으로 추정했기에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 기자가 동래(東來)하자 단군이 옮겨간 곳으로 황해도 문화현 근방으로 비정된다고 동북아역사재단의 구성원들도 대체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거겠지요..

물론 동북아역사재단이 님처럼 환단고기를 위서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분적으로 내용을 진서로 인정하는 학자(교수)도 계십니다..왜 위키백과의 편집자들께서 님의 사관에 의한 시비로 그걸 증명하기 위하여 문장과 단어마다 출처를 명확히 제시해야한다고 생각합니까? 문서 수독자의 이해로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문제를 건건마다 곳곳에 삭제를 당하고 되돌림과 무시를 당해야 합니까? 객관적으로 보기엔 아직도 많이 부족한 역사지식으로 보이는데..본인은 대단한 역사지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나요? 사실 그건 시중에 나와있는 중학교의 교과서만 봐도 읽혀지는 내용들이 아닌가요?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조금이라도 추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공존(병존)의 햇수를 884년으로 볼 수도 있는 건데..가짜 출처라고 몰아대며 징계를 운운하고 있으니 황당합니다..적반하장도 유분수지..문서마다 일언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삼족오', '신시', '고조선', '부여' 등등에서 여지없이 삭제와 되돌림을 당하였지요..이건 상대방 편집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무시 그자체가 아닌가요?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해온 편집들이 이런 것같은데 틀렸습니까? 님이 위키백과의 형사나 경찰이라도 됩니까? 아니 징계라는 공소까지 주장하는 것보니 검사수준까지 간것 같습니다..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20일 (화) 05:47 (KST)[답변]

동북아역사재단의 어느 구성원도 환단고기를 부분적으로라도 진서로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이청규 교수의 전기 고조선과 후기 고조선, 위만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과 관련이 없는 견해입니다. 이청규 교수가 말하는 전·후기 고조선은 BC3세기 경 연나라에게 밀려나는 것을 경계로 구분하는 것을 말하며, 애초에 북한의 시대구분론을 언급하면서 단군을 이야기했을 뿐, 전기 고조선과 후기 고조선에 대해서 단군이나 기자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즉, 귀하는 저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목차 운운하는 것을 보니 목차만 보고 지레 짐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군요. 확실하게 말씀하십시오. 저 책을 읽었습니까? 읽지 않은 채로 저런 출처를 달았다명 명명백백한 가짜 출처가 됩니다. 확실하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현재 제대로된 학자는 그 누구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병존했다는 말도 안되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애초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존재 여부조차 논하는 학자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도대체 귀하는 어떤 책을 읽은 겁니까? --Xakyntos (토론) 2013년 8월 20일 (화) 10:04 (KST)[답변]
Xakyntos (토론)님에게 묻습니다..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겁니까?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에 의한 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에 의한 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하고 위만조선을 후속시켜 고조선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나누고 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이라는 이름 아래 단군조선, 기자조선을 포괄하고 있다. 위키백과에서도 이미 기술해 놓았듯이 기자조선은 단군조선과 같은 ‘조선’이지만, 구분을 위해 후조선이라 부르고 있다. 학계에서 단군에 의한 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에 의한 조선을 후조선(後朝鮮), 그리고 위만조선으로 구분하는 것이 고조선에 대한 대체적인 분류이다.

그러나 이청규 교수가 분류하는 전기 고조선과 후기 고조선, 위만조선은 위의 내용과 관련이 없다? - 이청규 교수가 말하는 전·후기 고조선은 BC 3세기 경 연나라에게 밀려나는 것을 경계로 구분하는 견해는 이미 환단고기의 단군조선(B.C 2333 ~ B.C 238)과도 상통하는 내용으로 삼국유사의 공존(병존)를 증명해주는 얘기가 아닌가요?

“진한(辰韓)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들이 피난해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거처하는 마을을 사탁(沙涿)이나 점탁(漸涿) 등으로 불렀다.” 신라인들의 방언에 탁(涿)을 읽을 때 도(道)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고 쓰고, 량(粱)을 도(道)라고 읽었다.



단군조선이 기원전(B.C) 238년경(환단고기로 임의로 추정함)에 멸망하면서 72국으로 흩어져 살았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第一卷, 제1기이(第一紀異) 72국(七十二國), 조선의 유민들이 70여 국으로 나뉘다)의 기록과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서한(西漢)은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뒤에는 2부를 두었는데, 법령이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갈라져 78국으로 나뉘고 각각 1만 호씩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에 의거 연나라에 살던 단군조선의 유민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신라 말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경주 사량부의 사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밝힌 《삼국유사》에서의 내용과 옛날 진한(辰韓)의 땅에는 6촌(六村)이 있었다는 전제로 전한 연(燕)나라 사람들이 피난해 온 사실과도 일맥상통하는 일이고 해명태자 설화와도 의미가 닿는 견해라 생각되는데 왜 글자하나, 숫자하나에 매달리는지 모르겠군요. 나무만 보지말고 숲을 보았으면 싶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밝히지만 책은 빌려 참조했고 책 전체는 읽지는 않았서도 부분적으로 읽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자신의 자행한 행동엔 반성도 없고 오로지 가짜출처로만 몰아가는 모습이 너무 감정적입니다. 서로간 편집의욕을 상실케하는 피곤한 일이니 이쯤 해둡시다. 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20일 (화) 21:34 (KST)[답변]

≪환단고기≫ 범례에 의하면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가 1911년에 ≪삼성기 三聖紀≫·≪단군세기 檀君世紀≫·≪북부여기 北夫餘紀≫·≪태백일사 太白逸史≫ 등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묶은 다음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고 묘향산 단굴암에서 필사한 뒤 인쇄했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위키백과의 문서 환단고기 개요에 환단고기》는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각기 다른 시대에 쓰여졌다는 5권(4종류)의 책을 엮은 것이다.

일연은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서 기록하지 않은 신이한 일을 자신의 저서에서 기록한 이유에 대해 위와 같이 밝혔다. 『삼국사기』에도 신이한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어서 『삼국유사』처럼 전편을 꿰뚫지는 못한다.

일연은 대업을 이룩한 역대 제왕이 모두 신이한 일이 있었던 것은 중국이나 우리 삼국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제 그 신이한 일을 당당하게 기록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삼국사기』에서 기록하지 않았던,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조선왕 준이 세운 마한, 조선의 유민들이 흩어져 세운 72국, 오가야(五伽倻)와 부여 등등 삼국 이전의 고대국가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이로써 『삼국사기』에 빠져 있었던 고대사의 맥을 이을 수 있었다.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일연 지음, 신태영 옮김, 2012.8.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참조)

(일연은) 72국조를 통해, 『삼국유사』에서는 한(韓)의 종족을 조선의 유민으로 설정하여 조선→4군→2부→삼한 78국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상정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新羅史硏究會, 1996)

한편 72국조의 마지막에 붙은 세주에는 마한・진한・변한에 각각 “소읍(小邑)”이 있는데 모두 “국(國)”이라 칭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따르면 『삼국유사』에서는 “소읍”과 “국”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삼한의 “국”에 대해서는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 마한과 진한 및 변진(변한)의 국명이 기록되어 있다. 즉 마한에는 원양국(爰襄國) 등 50여국이 있는데 대국(大國)은 만여 가(家), 소국(小國)은 수천 가라고 하였고, 진한에는 이저국(已柢國) 등 12국, 변진(변한)에는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등 12국이 각각 있었으며 대국은 4-5천 가, 소국은 6-7백가라고 하였다. 또 “국읍(國邑)”과 “읍락(邑落)”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국읍”에는 “주수(主帥)”가 있었고 또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읍락”과 잡거(雜居)하여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락”은 본래 혈연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 부락공동체적인 성격을 갖는 취락 단위였으나 삼한시대에는 이미 정치적 세력단위로 성장하였으며, 이들 읍락간의 차등화현상 속에서 삼한의 “국읍”이 등장하였다고 한다.(문창로, 2000) 그리고 “국”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한 중심의 “대읍락”을 지칭하는 “국읍”을 중심으로 하여, 재분배와 잉여생산물의 보관 등을 위한 경제적 기능, 외부세력과의 전쟁과 방어를 위한 군사적 기능, 다수의 읍락을 결집시키는 천군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기능을 가지고 있던 삼한의 정치세력 단위였다고 보고 있다.(이현혜, 1984; 권오영, 1995)

이들 “국”은 대체로 평균 인구 1만여 명으로 추측된 바 있으며, 준 국가단계인 군장사회(君長社會, chiefdom)로 이해하거나(김정배, 1986), 혹은 성읍국가(城邑國家)로 부르기도 한다.(천관우, 1989) 그러나 이 중 목지국(目支國), 사로국(斯盧國), 백제국(伯濟國), 구야국(狗邪國)과 같은 대국의 경우에는 이미 국가 단계에 도달했다고 보기도 하며, 그 연장선에서 『삼국지』․『진서(晉書)』에 보이는 3세기 삼한의 왕들을 군사권과 대외교섭권까지 획득한 국가(state) 단계의 왕(king)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박대재, 2006) (김정배, 1986, 『韓國 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고려대학교출판부,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 硏究』, 일조각, 권오영, 1995, 「三韓社會 ‘國’의 구성에 대한 고찰」『韓國古代史硏究』10, 新羅史硏究會, 1996, 「『三國遺事』 譯註(3)」『朝鮮文化硏究』3, 문창로, 2000, 『三韓時代의 邑落과 社會』, 신서원, 박대재, 2006,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참조)

Xakyntos (토론) 편집자가 위에 언급한 《북부여기》는 《환단고기》에 포함된 책인데 무슨말을 하고자 하는지 모르겠군요..북부여기의 저자, 범장은 고려 말 금성(현 전라남도 나주)출신은 범장은 여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제자로 호가 복애이므로, 복애거사라고도 불렀는데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에 올랐던 분..이분이 아닌가요?

다시한번 묻습니다..대체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얘기하고자하는 겁니까?

한시대에 같이 역사를 배우고 공부하면서 왜 역사를 보는 눈이 편협적인가요? 오로지 단군신화를 꾸며진, 날조된 허구로 몰아대는 송호정과 맥을 같이하는 사람들 주장처럼 선사시대를 비롯한 한국의 상고사는 거짓이고 만들어진 얘기인가요?

현재 대한민국의 상고사에 대한 역사서라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계통의 역사서가 하나의 줄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명, 이암, 이맥, 이기, 이유립, 계연수같은 지식들이 편집한 환단고기라고 본인은 여겨지는데 그게 잘못된 겁니까? 왜 같은 책, 같은 내용을 읽어도 해석을 달리해야 하나요? 분명히 문서 전반에 참조된 내용(삼국유사, 삼국사기, 제왕운기, 환단고기 기타 역사서)과 동북아역사재단의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참조하여 맞춰보면 퍼즐처럼 조금씩 상고사의 사건들이 이루워져가는데 그것을 위서라는 말한마디로 평가절하하여 무시, 폄하, 폄훼하는 이유가 뭡니까?

BC 3세기경, 고조선(단군조선)지역에 무슨일이 발생했는데 환단고기처럼 BC 238년에 단군조선이 멸망했는지 아니면 《동사강목》처럼 BC 221년에 연나라가 멸망했는지 추정하여 알아보는 것이 한국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요? 저 위의 인용문에 언급했듯이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공존(병존)으로 보았던 것이고 강단사학자들도 이제는 새로운 긍정적인 시각으로 상고사를 바라보려는데 유독 Xakyntos (토론) 편집자만은 이상한 해석으로 엄단주의에 입각하여 한민족 상고사 문서 곳곳에 대못을 쳐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소명이라구요? 그쯤 했으면 서로간의 다른 주의, 주장, 역사관과 가치관의 차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알고 있으니 동조시키려 하지말고 이제 결과나 지켜봅시다..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21일 (수) 08:57 (KST)[답변]

한번 정말 확인해 볼래요?

정말 드러운 인간같군요..경고합니다..쫓아다니며 편집방해를 하지마시요..최치원과 천부경의 관련 내용이 수록된 책들이 만일 하나라도 밝혀진다면 어떻게 할래요? 최치원과 개천절에 관련된 책들을 님에게 확인이라도 받으면서 참조할까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는지..참 이해가 안되네요.. 진실탐구 (토론) 2013년 8월 27일 (화) 16:55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