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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베르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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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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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French 87th Regiment Cote 34 Verdun 1916.jpg
|설명= 304 고지의 프랑스 제6사단 87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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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프랑스]] [[베르됭]], [[뫼즈 강]]
|장소=[[프랑스]] [[베르됭]], [[뫼즈 강]]

2013년 6월 21일 (금) 07:50 판

베르됭 전투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304 고지의 프랑스 제6사단 87연대.
날짜1916년 2월 21일~7월
장소
결과 독일이 끝내 패배함
교전국
프랑스 제3공화국
독일 제2제국
지휘관
프랑스 앙리 페탱 독일 제국 에리히 폰 팔켄하인
독일 제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병력
75개 사단 50개 사단, 대포 1400문

베르됭 전투(Battle of Verdun)는 1916년 제1차 세계대전프랑스의 소도시 베르됭에서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치른 전투로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장 격렬했던 전투로 불릴 만큼 치열했다.

배경

당시 독일 제국의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프랑스가 마지막 병사까지 투입하지 않을 수 없는 지구전을 위한' 공격지점을 선택함으로써 프랑스군을 피흘려 죽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은 그 지점으로 베르됭 요새와 그 주변 뫼즈 고원의 요새들을 선정해 대규모 군대와 대포를 동원했다.

프랑스도 독일군의 공격을 알고 있었으나 베르됭이 아닌 다른 곳일 것이라고 생각해 아무 방비도 해놓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장 극심한 포격을 받았다.

전투 과정

1916년 2월 21일에 팔켄하인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지휘하는 제5군 14만 명의 병력에 1400문 이상의 대포를 지급해 새벽부터 12시간 이상 매 시간당 10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4일 동안에 기습적인 독일군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10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2월 24일에 프랑스군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2월 25일에는 베르됭 최후 전방 보루였던 두오몽 요새가 함락되었다.

이에 프랑스군은 필리프 페탱 장군의 휘하 아래에 2월 26일부터 2월 29일까지 전력을 다해 맞서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시켰다. 독일군은 3월 28일부터 재공격을 했으나 프랑스군의 방어는 더욱 완강해졌고 소강상태 후에 전투는 계속되어 3월과 4월 뫼즈 강 동서쪽 언덕과 능선에서는 포격과 공격, 반격, 점령, 탈환이 반복해졌다.

5월이 되자 전투는 3번째 국면을 맞아 독일군이 뫼즈 고원을 재공격하여 함락시키자 프랑스군은 방어선이 뚫린 절제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때 영국군과 프랑스군 연합군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솜 강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했고 동부 전선에서도 러시아군이 공격하자 독일군은 솜 강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하였다.

병력을 분산하자 독일군의 전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공세는 수시로 전환되어 7월에 결국 독일군은 베르됭을 점령해 프랑스의 저항의지를 약화시키려던 자신들의 계획이 엄청난 물자와 인명 손실을 가져와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아 물러났다.

8월이 되자 프랑스군은 공격을 재개해 잃었던 요새와 영토를 탈환했고 10월에 대대적인 공세로 독일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이 전투로 독일은 33만 7000명을, 프랑스는 37만 1000명 이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냈고 베르됭 전투의 실패로 독일빌헬름 2세는 팔켄하인을 해임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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