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폰시아노: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0번째 줄: 20번째 줄:
폰시아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당시 로마 황제는 기독교에 대해 온건한 입장이었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독교는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다. 폰시아노는 로마의 주교인 교황으로서 로마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두 차례나 공포한 [[오리게네스]]의 정죄(데메트리우스 주교가 오리게네스의 사제 서품을 무효라고 선언한 사실을 말함)를 재확인하였다.<ref name="ce"/>
폰시아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당시 로마 황제는 기독교에 대해 온건한 입장이었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독교는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다. 폰시아노는 로마의 주교인 교황으로서 로마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두 차례나 공포한 [[오리게네스]]의 정죄(데메트리우스 주교가 오리게네스의 사제 서품을 무효라고 선언한 사실을 말함)를 재확인하였다.<ref name="ce"/>


로마 제국의 새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선대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는 달리 기독교에 대하여 강경한 정책을 펼쳤다. 교황 폰시아노는 [[대립 교황]] [[로마의 히폴리토]]와 함께 체포된 후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사르데냐]] 광산에서 광부로 노역하였다.
로마 제국의 새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선대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는 달리 기독교에 대하여 강경한 정책을 펼쳤다. 교황 폰시아노는 [[대립 교황]] [[로마의 히폴리토]]와 함께 체포된 후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사르데냐]] 광산에서 광부로 노역하였다.<ref>G. W. Clarke, "Some Victims of the Persecution of Maximinus Thrax," ''Historia: Zeitschrift für Alte Geschichte'', Bd. 15, H. 4 (Nov., 1966): pp. 445-453, p. 451.</ref>


[[로마]] 태생으로 5년간 교회를 통치하였다. [[235년]]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에 의해 신학자이자 대립자였던 히폴리토와 함께 [[사르데냐]]로 유배되어 [[235년]] 10월에 사망하였다. 히폴리토는 유배지에서 폰시아노와 화해하였다. 폰시아노와 히폴리토의 시신은 [[교황 파비아노]]에 의해 [[236년]] 로마로 운구되어 그 곳에 묻혔다. 폰시아노는 갈리스토 묘지 안의 [[주교]]들을 위한 특별 묘소에 제일 먼저 묻힌 주교였다.
[[235년]]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에 의해 신학자이자 대립자였던 히폴리토와 함께 [[사르데냐]]로 유배되어 [[235년]] 10월에 사망하였다. 히폴리토는 유배지에서 폰시아노와 화해하였다. 폰시아노와 히폴리토의 시신은 [[교황 파비아노]]에 의해 [[236년]] 로마로 운구되어 그 곳에 묻혔다. 폰시아노는 갈리스토 묘지 안의 [[주교]]들을 위한 특별 묘소에 제일 먼저 묻힌 주교였다.


==주석==
==주석==

2013년 5월 24일 (금) 10:09 판

폰시아노
전임자우르바노 1세
후임자안테로

교황 폰시아노(라틴어: Sanctus Pontianus, 이탈리아어: Papa Ponziano)는 제18대 교황(재위: 230년 7월 21일 - 235년 9월 28일)이다. 235년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으며, 폰시아노는 사르데냐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에 폰시아노는 교회를 위하여 스스로 교황직을 사퇴하여 자신의 후임자를 선출하도록 하였다.[1]

폰시아노에 대해서는 전임 교황들보다 좀 더 자세하게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지금은 없었진 교황 연대기 덕분이다. 이 책은 4세기에 편찬된 《리베리오 교황표》의 편집자가 교황 목록을 작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폰시아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당시 로마 황제는 기독교에 대해 온건한 입장이었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독교는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다. 폰시아노는 로마의 주교인 교황으로서 로마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두 차례나 공포한 오리게네스의 정죄(데메트리우스 주교가 오리게네스의 사제 서품을 무효라고 선언한 사실을 말함)를 재확인하였다.[1]

로마 제국의 새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선대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는 달리 기독교에 대하여 강경한 정책을 펼쳤다. 교황 폰시아노는 대립 교황 로마의 히폴리토와 함께 체포된 후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사르데냐 광산에서 광부로 노역하였다.[2]

235년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에 의해 신학자이자 대립자였던 히폴리토와 함께 사르데냐로 유배되어 235년 10월에 사망하였다. 히폴리토는 유배지에서 폰시아노와 화해하였다. 폰시아노와 히폴리토의 시신은 교황 파비아노에 의해 236년 로마로 운구되어 그 곳에 묻혔다. 폰시아노는 갈리스토 묘지 안의 주교들을 위한 특별 묘소에 제일 먼저 묻힌 주교였다.

주석

  1. Kirsch, Johann Peter (1911). "Pope St. Pontian" in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12.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2. G. W. Clarke, "Some Victims of the Persecution of Maximinus Thrax," Historia: Zeitschrift für Alte Geschichte, Bd. 15, H. 4 (Nov., 1966): pp. 445-453, p. 451.
전임
우르바노 1세
제18대 교황
230년 7월 21일 - 235년 9월 28일
후임
안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