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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9일 (화) 08:59 판

이종가(李從珂, 885년 ~ 936년)는 오대십국시대후당의 마지막 황제이다. 시호는 말제(末帝) 혹은 폐제(廢帝)로 불리고 있다.

생애

진주(鎭州, 지금의 허베이 성 스자좡 시 정딩 현)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 위씨(魏氏)와 함께, 후에 후당 명종이 되는 이사원에 납치되어, 그 뒤에 이사원이 양자로 되어 이종가로 불리게 되었다. 성장하면서 모습은 웅장하고, 싸움에 대해 용맹하였고 의부 이사원의 총애를 받는다.

이사원이 즉위하고, 이종가는 호국군 절도사(護國軍節度使에 임명되지만, 추밀사인 안중회(安重誨)와 권력 쟁탈에 패배하여 930년(장흥 원년)에 모든 지위를 잃고, 수도인 낙양에 거주하게 된다. 그러나 931년에 안중회가 실각하자, 이종가는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으로 중용되어, 932년에는 봉상절도사(鳳翔節度使)에게 임명되어 그 후에 933년에 왕으로 봉해졌다.

이사원이 933년에 사망하자, 이종후가 황제로 즉위 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934년(응순 원년) 이종후는 대신들의 제안을 받아 들여 절도사의 권력을 억제하여 약체화를 시키는 계획하였다. 이종가는 이 정책에 대해 반대를 표명하여, 마침내는 군사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이 내란에 패배한 이종후는 폐위되고, 결국 이종가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민제 이종후를 살해한 이종가는 낙양 입성 후에 후당의 황제로 즉위 하여, 연호를 청태(淸泰)로 개원하였다. 당초에는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를 지낸 황제 이사원의 사위인 석경당(石敬瑭)과 동맹 관계였고, 이종가가 즉위 한 이후에는 석경당을 의심과 경계를 하였다. 936년에 석경당을 천평군 절도사(天平軍節度使)으로 좌천을 시켜 임명하여, 석경당은 불만을 품어서, 석경당은 요나라와 손잡아 군사를 일으켰다.

석경당이 요나라의 군대를 이용하여 낙양을 포위하였고, 패색이 짙은 이종가는 937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후에 시호 및 묘호는 주어지지 않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은 말제 또는 폐제라는 시호를 주었다.

이때 진시황 으로부터 내려오던 전국옥새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전임
의제 후당 민제 이종후
제4대 후당의 황제
934년 ~ 936년
후임
(멸망)
(석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