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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5일 (금) 23:37 판

박문수
朴文秀
출생1691년
조선
사망1756년 (66세)
조선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자(字)는 성보(成甫)
아호(雅號)는 기은(耆隱)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직업문신(文臣)
정치가(政治家)
부모박항한(부)
자녀양아들 1명
친척박선(할아버지)
이세필(외할아버지)
박장원(증조할아버지)
박태한(큰아버지)
김도협(장인)

박문수(朴文秀, 1691년 ~ 1756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 정치가(政治家)이다. 자(字)는 성보(成甫)이고 호(號)는 기은(耆隱)이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아버지는 박항한(朴恒漢)이고 큰아버지는 박태한(朴泰漢)이다.

생애

1723년(경종 3)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이듬해 설서(設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削職)되었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에 등용되어 영남안집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 도순문사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成君)에 봉해졌다. 1730년 참찬관에 이어 호서 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에 진주사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豊德) 부사로 좌천되었다.

1741년(영조 17) 어영대장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 와서 기민(飢民)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 판서,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해를 논하다 충주 목사로 다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均稅使)를 거쳐 판의금부사·세손사부를 지내고 1752년 왕세손인 의소세손이 죽자 약방제조로 책임을 추궁 받아 제주도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평가

관찰사 등 지방관으로서 군정과 세정에 밝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

그러나 고집이 센 성격으로 끝내 영의정에 오르지 못했다.

암행어사로서의 활동 여부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그와는 달리 실제로 임금으로부터 암행어사로 임명된 적은 없으며, 별견어사로만 4번 파견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 [2]

저서

  • 《탁지정례》등.

기타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박문수는 큰아버지 박태한(朴泰漢)의 손자들 가운데서 1명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박문수를 연기한 배우들

함께 보기

주석

  1. 최영창. “박문수, 암행어사 한번도 한 적 없다”. 문화일보. 2010년 5월 11일에 확인함. 
  2. 권영전. “대중서로 윤색된 김삿갓ㆍ박문수 이야기”. 연합뉴스. 2010년 5월 11일에 확인함. 

바깥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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